카페에 가면 기분이 좋다, 카페에 가면 나도 카페를 해보고 싶다는 지구인의 귀여운 꿈을 꾼다.
카페는 자영업자의 문턱 낮기로 소문난 업종 넘버 투다. (넘버 원은 치느님이다.)
나는 지구인의 귀여운 꿈, 카페 창업을 서른에 이루었다. 맞다. 심히 창대하게 이루어내었다. 성공했다는 자랑이 아니다. 다만, 시작을 했다는 것이다. 카페를 해 본 사람이 주위에 많다. 그리고 다들 말린다. 카페가 넘쳐난다고, 또 생긴다고… 내가 창업한 2009년에도 그러더니 2022년에도 여전하다. 아니 2022년에는 코로나로 더 어려워졌다.
나이 서른에 갑자기 카페 창업의 운만 뗐을 뿐인데도 엄마는 사업은 절대 안 된다고 선언을 해버렸다. 하지만 나는 엄마 말 안 듣는 개딸이었기에 엄마 몰래 카페를 차려버렸다.
엄마 말을 안 들어서 후회하는 것들이 많긴 하지만, 카페를 연 것은 후회가 없다. 그때가 아니었으면 그렇게 무모하게 카페를 열어보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엄마는 내가 카페를 열었다는 걸 알면서도 모른 채 해줬고, 나는 엄마가 아는 걸 알면서도 카페를 열지 않은 척했다.
나는 카페 손님과 결혼한 사장이다. 그냥 손님도 아니고, 커피를 배운 제자와 결혼했다. 아주 시시한 연애사다. 카페를 하면서 사람들에게 대놓고 말한 야심 목록 중 하나이기도 했다. 카페를 시작하게 된 계기에는 놀랍게도(?) 연애가 끼어있었다. 나는 수년간 사귄 애인에게 당차게 차이고 카페를 차린 비련의 여사장이 되시겠다. 카페 자리를 계약하고, 서울서 내려온 오기사와 전주에서 처음 만난 날은 그 남자의 결혼식 날이었다. 나는 그 당혹감을 어쩌지 못하고 오기사에게 주절이 주절이 떠들어 버렸고, 그날 오후 친구를 꼬드겨 제주행 비행기를 타고 말았다. 전주에서 1시간 거리의 군산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면 제주까지 1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다행히 비행기 표도 아직 남아있었다. 나의 재미없고 길기만 한 연애사를 날마다 들어야 되는 숙명을 타고난 나의 친구는 갑자기 제주도를 가자는 나의 한심한 제안에도 같이 제주를 가주었다. 둘이 제주에 가서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만 제주 시청 근처에 가서 각재기국을 먹고, 커피를 마셨고, 공중전화로 그 남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벌써 신혼여행이라도 간 걸까... 차마 나의 핸드폰으로는 걸지 못하고, 제주까지 와서야 그에게 공중전화를 걸었지만 그 가상한 용기에도 불구하고 전화기가 꺼져 있었다. 세상 참 무심하다. 운이라는 게 따라주질 않는다.
아무튼 그렇게 지지리 궁상인 연애사를 끼고 카페를 차렸다. 어머나!운이 따라 주지 않는다는 말을 취소해야 한다. 카페에 잘 생긴 남자 손님들이 하늘에서 마구 떨어지는 게 아니겠는가.
할렐루야… 잇츠 커피 데이다! 무심했던 세상이, 이제는 내게 통쾌한 복수라고 하게 해주는 걸까? 그 남자와 연애가 깨지지 않았더라면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없었으리라 생각하니, 어머나! 인생이 왜 이렇게 아름다운지.
카페는 사랑의 기운이 넘실거렸다. 신이 나의 거지 같은 연애사에 대한 보상이라도 내리려는 듯이 카페에는 흔히 말하는 러브러브 한 분위기가 심심치 않게 포착되었다. 그 신의 이름이 ‘카페’ 일지 모르겠다.
사람들은 커피를 원하는지 카페를 원하는지 모를 정도였다. 공간의 힘이라고 해야겠다. 나도 카페를 사랑했지만, 손님들 역시 카페를 사랑했다. 카페에 오는 걸 너무나 좋아했고, 카페에 앉아있는 시간을 사랑했다. 카페에 오고 싶었다고, 그 소리가 그렇게 좋았다.
커플들이 끊임없이 생기고, 헤어지고… 젊음은, 사랑은 아름답고 슬펐다. 그 커플들은 신기한 점이 하나 있었는데 연애상담을 나에게 한다는 것이었다. 주로 그 상대는 남자였다. 여자는 자신의 연애 대해 감추려 들었고-그러면서도 내가 궁금해하길 바라고, 남자는 여자와 연애하면 힘든 점을 내게 얘기하며-나도 그 여자의 단점에 대해 공감해 주길 바라고. 나는 그들의 연애사보다 내 삶이 앞섰기 때문에 그들의 연애사의 다음날이 궁금할 시간이 없었다. 궁금할 시간이 없는 나를 위해 그들은 나를 독점하려 했다. 어떻게 해서든 나와 독대를 원했다.
카페에서의 커플들 중 결혼까지 이른 커플은 딱 한 커플이었다. 어쩌다 보니 내가 그 딱 한 커플이 되었다.
카페에서는 커피도 팔지만 커피를 만드는 방법도 판다. 소위 아카데미라고 한다. 나는 주로 핸드드립을 가르쳤는데 남편은 나에게 핸드드립을 배운 제자다. 수많은 제자 중, 가장 커피를 못 내렸다. 이 남자는 통영에서 조선회사를 다니고 있었는데 주말을 이용해 토요일에 커피를 배우러 오고 있었다. 그렇게 어렵게 배우러 오는데 커피를 너무 못 내려 그는 어떨지 모르겠으나 나는 속이 상했다. 그 시간과 노력이 아까워서 말이다.
그런데 그 남자는 내게 달라이 라마의 <행복론>을 선물해주고, 복숭아를 좋아한다고 했더니 복숭아를 한 박스 선물하기도 하고, 어느 날 아침엔 ‘귿모닝 생선 좋아해요?’라는 시간과 상황에 너무 맞지 않는 뜬금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는 그 주 토요일, 커피를 배우러 오면서 커다란 아이스 박스를 가지고 나타났다. 아이스 박스엔 감성돔이 세 마리 담겨 있었다. 낚시 갔다가 잡은 거란다.
카페 손님들은 내게 선물을 많이 줬다. 그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고, 생선은 좀 특이한 선물 군에 속해 특별히 인상적이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그 남자와 결혼하게 될 운명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쩌다 네팔에 같이 가게 되고, 안나푸르나에 오르게 되면서 둘의 인생이 겹쳐지기 시작했다. 비행기 안에서 나는 그 남자에게 쓸데없게도 연애사 얘길 꺼냈고, 그러다 잠이 들었는데 잠결에 그 남자가 이불을 덮어 주는 걸 알아챘다. 그리고 엄청난 생각을 해버렸다.
‘이 남자는 참 따뜻하구나. 이런 남자라면 결혼해도 괜찮겠다.’라고.
그리고 안나푸르나에 오르며 이 남자와 결혼해야겠다 다짐했다. 그리고 나는 그 남자와 정말 결혼했다.
카페 손님과의 꿈을 이루어 버린 것이다.
다시 카페라는 지구인의 꿈으로 돌아가자. 카페를 차린다는 것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를 먼저 생각해보라고 하고 싶다. 카페를 왜 하고 싶은지가 아니라, 카페가 당신에게 주는 의미 말이다.
나에겐 그 의미가 ‘재미’였다.
카페를 2009년2월에 창업했고, 그로부터 12년이 흘렀다. 여전히 나는 카페 창업에 대한 후회도 없고, 당신이 카페 창업에 대해 상담해 온다면 ‘의미’를 먼저 묻고, 그 의미가 당신을 설득한다면 기꺼이 창업을 독려할 것이다.
카페의 ‘의미’에 ‘재미’를 둔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올해 마흔세 살이 되었다. 내 마흔셋의 인생 동안 카페는 울트라 빅재미를 주었다. 의미면에서 나는 성공했다. 카페는 정말이지 너무너무 재미있었다. 카페에서 하고 싶은 모든 일을 다 해봤다. 심지어(!) 카페 손님과 결혼하고 싶다는 어처구니없는 소원도 이루어버렸다. 인정해주길 바란다. 하고 싶은 거 다 했다.
카페가 바빠서 여행을 못했을 거라는 생각도 버리기 바란다. 나는 의미를 ‘재미’에 두었다고 이미 밝혔다. 카페를 하는 동안 국내는 물론이고, 이탈리아, 싱가포르, 홍콩, 일본, 네팔의 안나푸르나에도 올랐다. 시간이 많아서, 돈을 많이 벌어서라고 지레짐작하지도 말기 바란다. 나는 시간과 돈을 단골손님들에게 빌렸다.
서두에 말했다. 지구인의 귀여운 꿈, 카페라는 로망. 나의 단골손님들은 내가 없는 사이 나 대신 1일 카페 사장이 되어 꿈을 잠시 이룰 수 있었다.
자고로 성공신화라 하면 잠 못 이루고, 레시피를 연구하고, 여행 한 번 가보지 못했다는 스토리가 줄줄이 이어진다. 나는 그 성공신화의 발끝도 가지 못한다. 맞다. 나는 금전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면 프랜차이즈 사업으로, 사기꾼에게 된통 당해 빚을 엄청 떠안았다. 그때 가맹점 시공을 한 시공 소장님이 가맹점 사장이 돈을 안 준다며 내게 자꾸 전화를 했고, 나는 그 전화를 피했다. 그랬더니 소장님이 함께 일했던 아저씨들 무서운 사람들이라며 그 아저씨들 데리고 카페에 오겠다고 겁을 주었다. 나는 기가 막히고도 무서웠지만 나의 아름다운 카페에 행여 흠집이라도 날까 두려웠다. 나는 카페를 하며 돈을 버는 족족 다시 카페에 투자하고, 심지어 없는 돈을 당겨서 여행도 다녔다. 그러니 나는 아무것도 없었다. 통 큰 딸을 둔 엄마는 내게 적금통장을 내주셨다. 시공 소장님과 만나는 날, 엄마가 준 통장의 돈을 다 빼고, 내가 융통할 수 있는 모든 돈을 다 빼내서 봉투에 담았다. 나는 그 돈이 너무 아까워서 주고 싶지 않았는데 소장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나는 그 공사 서애 씨 믿고 했지, 가맹점 사장 보고한 거 아니에요.”
나를 믿고 했다는 말에, 나는 우리 엄마의 통 큰 딸이 되어 그 큰돈을 은행 이체도 안 하고, 현금으로 소장님께 전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소장님과 참 친했는데 그 소장님 참 좋아했는데 그 이후 소장님과의 관계가 정리되었다는 점이다. 가맹점 사장은 내게 돈만 뺏어 간 게 아니라 나의 사람들도 뺏어 갔다. 소장님이랑 시시껄렁한 얘기 하는 거 되게 좋았는데, 그게 제일 아쉽다.
이렇게 흘러가긴 했지만, 나는 카페를 하는 동안 나의 모든 역량을 다 써봤다. 나는 카페를 하기 전 방송 작가로 일했다. 방송 작가가 되고 싶어서 오래 준비해 된 것이 아니었다. 정말 어쩌다 방송 작가가 되어버렸는데, 이게 문제다. 어쩌다 된 방송작가가 도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무엇보다 내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걸 8년이나 해버렸다. 멍청하게도 너무 바빠서 ‘의미’를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방송 작가의 월급은 너무 작아서, 한 방송사 일로는 부족했다. 나는 8년 간 평균 세 개 방송사의 일을 했고, 텔레비전, 라디오를 가리지 않고, 주중, 주말도 가리지 않고 일했다.
그러다 나는 행복하지 않은 나를 발견하고, 내가 하는 일에 의미가 없다는 걸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언제고 하리라 다짐했던 ‘인지심리’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곳에만 가면 갑자기 ‘의미’라는 게 생길 줄 알았다. 인지심리학은 내가 감당하기에 너무 어려운 학문이었다. 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너는 내가 쿠사리를 주는데도 왜 나를 미워하지 않니?”
교수님이 내게 쿠사리 주는 이유를 내가 너무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분수다. 나는 인지심리를 공부할 분수가 되지 않았다. 인지심리는 심리학의 다른 분야, 이를테면 상담이나, 임상처럼 핫하지 않다. 그러다 보니 인지심리 대학원생은 거의 없거나 아주 소수다. 교수님은 인지심리에 대한 엄청난 자신감을 가지고 가지신 분인데, 오래간만에 들어온 인지심리 대학원생인 내가 교수님의 자신감에 자꾸 스크래치를 내는 거다. 그래서 쿠사리를 주시는 거다. 나는 학부 시절부터 오만할 정도로 자신감에 찬 교수님을 좋아했다. 그런 교수님 밑에서 머저리 같은 대학원생이 되어서도 교수님을 좋아했다. 때론 도를 넘게 인신공격을 하기도 하셨다. 그런데 교수님은 내가 석사 4학기를 마치고, 논문은 쓰지 않고, 카페를 열자 카페의 단골손님이 되어주셨다. 카페에서 대학원생들 세미나를 열기도 하시고, 교수님들을 데려오기도 하셨다. 나는 그런 교수님을 십분 활용해 카페 1주년을 기념하는 파티에 교수님을 강연자로 모시기도 했다 물론, 강연료는 내가 그동안 열심히 먹은 쿠사리로 대신했다. 내가 카페를 마지막으로 연 날, 교수님은 나의 마지막 손님이 되어주시기도 하셨다. 나는 비록 똑똑한 교수님의 똑똑한 제자는 되지 못했지만, 언제 만나도 쿠사리를 주어도 미워하지 않는 제자는 두셨다.
인지심리는 지금도 취미 생활로 공부 중이다. 인지심리 학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카페 1주년 기념행사로 지도 교수님께 '공부의 심리'에 대한 강연을 요청드렸다.)
카페를 열고, 나는 더 이상 ‘의미’ 없는 인생, 쿠사리 맞는 대학원생이 아니었다. 방송에서 만나고 배운 모든 인프라를 카페에 써먹었다. 방송에서도, 인지심리에서도 쓸모없었던 혼자만 생각하며 아껴두었던 모든 일들을 카페에서 풀어냈다. 이를테면 나는 스무 살 때 이런 삶을 꿈꾸었다. 때로는 몸을 쓰며 정신이 수양되는 삶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카페에서 싱크대에 가득 쌓인 커피 잔을 씻으며 이해인 수녀님이 말 한 몸을 쓸 때 느끼는 맑은 기쁨을 맛보았다. ‘아, 이 느낌이었어.’ 명절을 맞아 선물 세트를 엄청 공들여 준비했는데 팔리지 않을 때, 손님이 오지 않을 때, 매출이 바닥일 때, 이벤트를 했는데 예상외로 손님들 반응이 너무 좋을 때, 손님이 너무 많아서 카페가 터져 나갈 것 같을 때, 옆집 잘 나가는 학원 원장님이 내가 이 동네 돈은 다 긁어모은다고 말했을 때, 그때의 기분, 친했던 직원이 내 전화를 받지 않고, 나를 피하고, 내게 거짓말을 하고 나를 모함할 때의 기분, 인생이 찬란했다가 폭풍우가 쳤다가 정신 못 차릴 때의 기분……. 그 모든 것들이 다 의미가 있었다. 무엇보다 실패를 통해 많이 배웠다. 인생의 의미, 재미라는 것은 다만 행복, 기쁨에만 있지 않다.
카페를 해서 무엇이 남았으냐고 묻는다면, 역시나 ‘의미’라고 말하겠다. 내 삶에서 가장 의미 있었던 순간이었다.
카페를 그만두고, 수년간 카페에 가서 청소를 하는 꿈을 꾸었고, 꿈속에서 나는 많이 슬펐다. 꿈속에서 나는 한 번도 다시 카페의 사장인 적이 없었다. 나의 전 카페엔 카페를 인수한 다른 사장님이 있었다. 나는 사장님 몰래 카페를 청소하며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몰래 훔쳐 보는 사람처럼 아팠다. 그런데 그 카페를 없애고, 다른 곳으로 옮겼다는 얘길 듣고 난 후론 더 이상 그 카페에 가서 청소하며 아파하는 나를 마주하지 않아도 되었다. 고마울 지경이었다. 나의 카페였던 그곳이 끝이 나서. 아픈 꿈을 꾸지 않아서.
나는 이제 전직 카페 사장이고, 다시금 지구인들의 카페라는 꿈을 가끔씩 꾸고 있다. 설렌다. 이미 경험한 실패한 미래를 다시금 맞고 싶을 만큼.
그러니 지구인들이여, 카페라는 귀여운 꿈을 꾸시라고, 그 안에 빅뱅의 ‘의미’가 있다고 귀엽게 말해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