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를 선택하다

드디어 퇴사.

by 하늘물

각종 서류와 막상 다닐 때에는 쓰지 않았던 사원증까지 찾아서 올려놓고 나니 드디어 퇴사가 실감이 났다.

5년간의 짐은 생각보다 간단하게 정리가 끝났다. 신나는 발걸음으로 남은자들에게 모니터 받침대, 발 받침대 등등 나눠주고 나니 챙겨가야할 짐은 팬 선풍기와 영양제뿐이었다. 팬 선풍기까지 가져다놓을 정도로 이 회사에 평생 살림을 차리고 눌러앉을 것만 같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들고 갈 짐은 그 생각이 담겨있던 팬 선풍기뿐이었다.


점심식사 멤버들과 마지막 식사와 함께 눈물 글썽이는 헤어짐의 인사를 나누고 평생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이들과도 웃으며 인사를 한 후 어색한 오후에 길을 나섰다. 나오고나니 회사 메신저를 탈퇴하기 전 후배 꼬꼬마들에게 어떻게 일을 처리해야하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등의 관리자가 할 법한 말을 내뱉고 온게 낯간지러워져서 조금은 후회가 되었다. 말단 사원인 주제에.


누군가는 퇴사를 하면 시원섭섭하다는데 섭섭은 없고 시원만 남아있다. 이 회사가 나에게 남겨준 건 무엇일까. 택시를 기다리며 잠시 생각해본다. 20kg의 살이 찐 몸뚱이,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아져버린 정신력. 두 가지는 분명했다.


택시에 몸을 싣고 잎새에게 연락을 했다. 맛있는 음식과 술 한잔을 곁들인 퇴사파티를 하자고.


메신저를 보낸 후 남은 자들에게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까 하고 회상해본다. 퇴사하기 직전의 나에 대해 투표를 할 수 있다면 '가장 같이 일하기 싫은 사람' 1위로 뽑히지 않았을까. 잦은 반차와 연차, 유연근무로 치기에도 민망한 제멋대로인 출근시간, 힘 없는 걸음걸이, 음울한 얼굴. 무기력을 사람으로 만든다면 당시의 나였을 것이다. 어쩔 수 없었다고 살아갈 기력은 단 한톨도 남아있지 않아서 그랬다고 항변해보지만 무책임 그 자체였다는 데에는 내 안에서도 여지가 없다.


그럼 퇴사를 선택하고 나에게 남겨진 것과 남겨질 것은 무엇일까.

연산군 시절 만들어졌다는 흥청망청이라는 말을 이럴때 쓰라고 있는 것인지 내게 남은 건 마지막 월급 한 달치와 영혼과 뼈를 갈아넣었다고 자부하는 5년에 대한 작고 소중한 퇴직금, 불분명한 실업급여 수령여부 뿐이었다. 그럼에도 나에게는 희망이 남았다. 적어도 지금보다는 나아질거라는 희망, 잃은 것을 되찾겠다는 욕망, '시간이 있다면....'하고 미뤄뒀던 운동 등 퇴사가 나에게 남겨준 건 차고 넘쳤다. 이거면 됐다. 어디든 길은 있을테고 걸으면 되겠지. 결정하고 나니 오히려 생각만했을 때 막막했던 시야가 분명해진 느낌이다.


원없이 사랑하고 돌아선 상대와 같이 한 치의 미련도 없이 떠나가며 다음을 기약하는 내가 무정하게까지 느껴진다. 한 때는 전부였다. 나의 모든 시간과 노력,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퍼부어가며 쏟아부었던 존재가 일 그리고 그 일을 하게 해주는 회사였다. 감히 말해보자면 난 회사를 사랑했었나보다. 창 밖을 바라보며 회상하는 드라마의 캔디형 주인공 코스프레를 하며 갖은 생각을 하다보니 도착했다.


에라 모르겠다. 오늘은 그토록 바라던 퇴사를 드디어 하게된 날이고 일단은 파티를 해야지.


앞 날을 꿈꿀 수 있다니. 내일을 기대하며 잠들 수 있다니. 얼마만에 느껴보는 감정이란 말인가. 감격하는 마음으로 집으로 향한다.


내일. 새로운 시간이 다가온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