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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물 Jun 23. 2023

퇴직금을 어디에 쓸까

작고 소중한 퇴직금


목돈이 생겼다. 여유가 되었다면 미래를 위한 퇴직연금으로 두었겠지만 장기 백수가 목표인 자에게 여유란 없다. 입금되자마자 해지 신청을 했다. 간만에 목돈을 앞에 두니(흥청망청 과거의 나여, 반성하라) 잔고만 보고 있어도 행복해졌다. 이 돈은 온전히 한 푼도 남기지 않고 백수자금으로 쓰기로 했다. 




우선은 고정비를 줄이기 위해 신용카드를 없애기로 했다. 번만큼 쓴 결과는 신용카드 한도로 이어졌고 이는 소비증가로 이어졌다. 미래의 나를 담보로 잡고 쓴 대가는 퇴직금의 삼분의 일을 카드대금으로 갚아야하는 사태로 이어졌다. 내가 이미 쓴 돈이고 앞으로도 갚아야할 돈인데 막상 한꺼번에 갚으려니 그냥 앞으로 나눠서 갚으면 안될까, 수중에 돈이 얼마 없는데 급한 일이 생기면 어쩌지 등등 갖은 핑계를 스스로 대며 망설였다. 그래도 신용카드가 있으면 있는대로 또 미래의 나를 담보로 잡고 써댈 것 같아 과감하게 카드대금을 정리하고 없애버렸다. 빚이 줄어들고 앞으로 다달이 나가는 돈이 줄어든다고 생각하니 홀가분해졌다.




두번째로 전세값 인상으로 인한 동생에게 개인적으로 진 채무의 일부분을 상환했다.(욜로 아닌 골로 가는 삶을 살았던 나여, 반성하라) 빚쟁이 주제에 에헤라디야 하고 살았던 과거를 깊이 반성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뜻밖의 호구인증. 지인에게 4백만원 가량 돈을 빌려줬다. 퇴사 후 한 달 정도 지났을 때 빌려줬는데 글을 쓰는 지금까지 잔금이 남아있다. 보통 가까운 사이에는 돈 거래를 하지 말라고 한다. 그런데 이 말이 그동안은 조금 가슴 아팠다. 서울로 학교를 가기 위해 단돈 15만원을 수중에 들고 야반도주하듯이 집에서 나왔던 나는 이십대 초반을 친구집을 전전하거나, 흔히 달방이라고 불리는 월셋방에 살며 아르바이트로 버티며 살았다. 심지어 교통비가 없어 아르바이트를 못간 적도 있었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단 돈 만원 혹은 많게는 십만원도 빌린 적이 많았다. 아르바이트 월급이 들어오면 갚고 다시 빌리고 하는 반복이었다. 그래서 친구에게 돈을 빌리는 심정이 어떤건지 누구보다 잘 안다. 오죽하면 빌려달라고 했겠나- 과거의 나를 떠올리며 선뜻 빌려줬다.(자세한 이야기는 따로 풀어볼 예정이다.)




이렇게 정리하고 빌려주고나니 생각보다 수중에 돈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럼에도 매일매일이 퇴사파티였다. 마트에서 장을 봐서 정성스레 차리고 즐거운 저녁시간을 보냈다.(이때만해도 실업급여에 대한 확신이 있어서 최대한 아껴서 오래버티면 되겠거니 하고 크게 개의치않았었다. - 자세한 이야기는 '이럴수가' 참고)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명품백이라도 하나 샀어야 싶긴하다. 정성스레 차린 밥상과 함께 빠르게 잔고도 줄어갔다. 명품백을 샀으면 지금와서 조금 덜 아쉬웠을까- 하고 자문해보지만 대답은 아니다. 퇴사 후 두 달의 시간이었지만 근래 들어 가장 최상의 만족도를 자랑하는 일상이었다. 행복하다 라는 말이 입에 후렴구처럼 붙는 나날들이었다. 인생의 한 번쯤은 이런 순간도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지금도 여전히 후회하지 않는다.


p.s -  이 시간 이후로 다음부터는 돈을 열심히 모아겠아야겠다는 다짐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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