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식주의자가 생각하는 채식 열풍
숯불에 지글지글 고기가 구워진다. 고기에서 떨어진 기름이 불과 만나 그을음이 올라오고 고기에 거뭇한 것이 묻는다. 그을음이 발암물질이라지만 숯불에 살이 타는 냄새를 어찌 참을 수 있을까. 다른 것의 살이 타는 냄새는 향기롭다. 우리의 식욕을 자극하고 주린 배를 더욱 부여잡게 한다. 나는 고기가 좋다. 평생 고기나 채소 둘 중의 하나만 먹어야 한다고 누군가 목에 칼을 들이민다면 주저 없이 고기를 택할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고기 말고 채소를 택하는 사람도 종종 보인다. 몇 해 전부터 채식이라는 키워드가 외식시장에 혜성처럼 등장했고 금방 식을 줄 알았던 열기는 여전했다. 물론 나 같은 육식주의자에게는 다소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일이었지만.
한국에서 채식은 굉장히 소수 문화였다. 불교라는 종교가 나라 전체에 큰 영향을 끼쳐왔음에도 2,000년 동안 축적되어온 육식 문화는 고기를 먹기에 너무나도 안성맞춤이었다. 정육 문화도 발전해왔고 고기를 먹는 방식도 방대했다. 삶고, 굽고, 지지고, 볶고, 끓이고... 오만가지 방법으로 뼈부터 내장까지 모조리 먹어치웠다. 애초에 삼겹살이 국민 음식인 나라에서 채식은 다소 어울리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채식 인구 250만, 소수의 사람만 즐긴다고 하기에는 이제 무리가 있는 숫자다. 삼겹살을 그렇게 좋아하는 한국에서 채식문화는 어떻게 그 꽃봉오리를 틔우고 있을까. 잡식동물이자 육식을 사랑하는 우리를 어떻게 설득했을까. 왜 외식시장은 채식을 조명하기 시작했는가.
동아시아의 불교에서는 육식을 엄격히 금하고 있다. 모든 생명의 삶은 수레바퀴처럼 순환한다는 윤회 사상에 입거하여 불교는 살생을 저지르지 않는다. 살생을 하지 않는다는 규율 덕분에 자연스럽게 육식을 금하게 되었고 채식 문화가 발달했다. 그렇다고 하루 온종일 풀을 맛없게 뜯을 수는 없지 않은가. 미(味)를 탐구하는 인간은 어떻게 하면 채소를 맛있게 먹을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 결과 사찰음식은 궁중음식과 함께 한식에서 중요한 분과를 도맡게 되었다. 일본의 채식 문화가 발달한 것도 불교의 영향을 받아 메이지 유신 전까지 전국적으로 육식을 엄격히 금했던 덕분이다. 이렇듯 종교는 인류가 채식을 시작한 중대한 이유였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자 인간의 욕망인 식욕의 한 부분을 포기한 것이다. 불교뿐만 아니라 각국의 여러 종교에서 육식을 완벽히, 혹은 부분적으로 제한했다. 그리고 그런 빈자리를 채식이 메웠다.
체질과 기호도 채식을 시작한 연유에 당연히 포함된다. 태생적으로 고기를 받아들일 수 없는 특이 체질들이 등장했다. 알러지나 알 수 없는 원인 등으로 고기를 못 먹으니 당연히 채식을 해야 했다. 고기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실제로 우리 엄마는 꽤 오랜 시간을 고기 먹는 것에 재미를 가지지 못했다. 지금이야 고기를 곧잘 먹지만 내가 초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고기를 썩 좋아하지 않았다. 고기보다는 밥을 좋아했다. 우리 엄마와 같은 사람들은 굳이 고기를 찾지 않았다. 고기보다는 채소가 좋아 채식을 하기 시작했다.
인류는 여전히 위와 같은 이유들로 인해 채식을 한다. 하지만 21세기, 한국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선진국에서 급부상한 채식문화를 전부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경제 위기가 닥치고, 성장률에 제동이 걸려도 우리는 여전히 이전 세대보다 발전한 세상에서 더 '잘' 살고 있다. 당장 한국에서만 해도 서민이 고기를 부담 없이 즐기게 된 기간은 반세기가 채 되지 않는다. 당장 우리의 부모만 해도 고기를 마음껏 먹을 수 없는 유년기를 보냈다. 그러나 우리는 없어서 못 먹었던 고기를 이제 스스로가 거부하고 있다. 단순히 우리의 소비가 우리의 욕구 충족에만 쓰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과 눈앞의 쾌락을 위해 자신을 갉아먹는 것을 방지하고자 우리는 채식을 하기 시작했다. 과거의 인류가 보기에는 지극히 사치스러운 일이었겠지만 시대는 변했다.
우리는 교과서에만 보아왔던 지구온난화를 피부로 체감하는 첫 번째 세대가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가축을 키워서 먹는 것은 지구온난화의 주범인 탄소를 마구 내뿜는 일이었다. 그리고 동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던 사람들은 되려 동물의 권리를 주창했다. 동물의 복지를 신경 쓴 축산업이 인기를 끌었고 더 나아가 아예 도축이라는 것을 야만적이라 여기는 동물보호가들이 등장했다. 결국 가축에 대한 환경적, 인도적인 이유에서 채식을 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리고 열렬한 운동가들이 아니어도 여러 이유들로 채식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또 하나의 정당성을 부여해준 것이다.
지금껏 지구에 발을 디뎠던 어떤 인류보다 풍족한 먹거리를 주변에 둔 우리는 새로운 문제에 당면했다. 먹을 것이 늘 부족해 생존을 걱정해온 인류의 몸에 내장되어 있던 지방을 축적하는 DNA는 비만이라는 만악의 근원으로 다가왔다. 온갖 성인병의 원인이었고 무엇보다 아름답지가 않았다. 미에 대한 기준은 시대상에 맞게 변해왔지만 최근 미에 대한 기준은 몸무게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의 모습을 대중에게 쉽고 빠르게 공유할 수 있다는 것과 아름다운 몸매에 대한 동경은 건강에 관심이 없던 젊은 세대를 헬스장으로 이끌었다. 헬스장은 이제 운동 마니아들이 우락부락한 근육을 키우기 위해 드나드는 부담스러운 장소가 아니다. 아름다운 몸과 건강을 위한 모든 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헬스장을 찾았다.
식단 없는 운동은 노동이라고 했던가. 그런 아름다운 몸을 만들기 위해서는 운동과 함께 식단 조절이 반드시 따라와야 했다. 어쩌면 운동보다 더 중요한 것이 식단일지도 모르겠다. 영양학적인 접근을 통해 지방을 줄였고 동시에 골격근량을 늘렸다. 필수적인 단백질을 제외하고는 식탁의 많은 부분이 야채와 과일로 채워졌다. 그렇게 현세대는 종교, 문화, 신체적인 이유를 제외하고 오롯이 건강과 미(美)를 위해 자발적으로 육식을 제한하는 최초의 집단이 되었다. 분명 과거와는 채식의 이유가 달랐다. 종교적 신념, 문화, 신체를 지키기 위해 고기의 섭취를 제한했던 과거와 달리 먹히는 동물과 우리 모두, 그리고 내 미래의 신체와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해 고기를 자발적으로 끊었다.
대부분 비건과 채식을 동의어로 사용하지만 비건은 엄연히 채식의 단계 중 하나이다. 비건은 단순한 채식이 아니라 동물에서 나오는 그 어떤 것도 섭취하지 않는 심오한 단계의 채식주의이다. 250만의 채식 인구 중, 철저하게 채식만 하는 비건 인구는 그에 비해 적은 편이다. 많은 채식 인구가 비건보다는 덜 엄격한 채식 단계에 머무르고 있다. 유제품은 먹는 채식, 생선은 먹는 채식, 달걀은 먹는 채식, 일부 고기 종류만 먹지 않는 채식, 때때로 육식을 하는 채식 등등 다양한 유형의 채식이 존재한다. 만약 현재 통용되는 채식이라는 단어가 완전 채식인 비건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면 외식업계의 뜨거운 감자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채식은 극단적인 식습관 취급을 받았다. 일절 고기를 입에 대지 않고 도를 닦는 사람의 이미지였다. 하지만 해외에서 단계별로 구분한 채식의 개념이 도입되기 시작했다. 채식하면 종교인처럼 평생을 절제와 인내해야 할 것 같은 이미지에서 스스로가 그 정도를 조절하여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범위 내에서 유연하게 하는 채식으로 변모했다. 어느 정도의 육식을 허용함에도 스스로를 채식 인구라 부르는 사람이 늘어난 것이다. 채식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지고 채식에 대한 개념이 확장되면서 외식시장에서도 이것이 심상치 않음을 감지했다. 채식주의자가 채소만 먹는 사람이 아니라 채소를 즐기는 사람쯤으로 차츰 바뀌기 시작했다. 그런 의미에서 채소를 좋아하는 우리는 모두 채식주의자라고 할 수 있겠다.
채식의 허들이 낮아지고 많은 소비자들이 유입되었다. 결과적으로 육류를 사용하지 않고 만들어진 비건 식제품들과 육류를 사용하지 않는 비건 레스토랑들이 늘어났다. 이런 제품과 매장은 극단적인 채식주의자들만 이용하지 않았다. 비건 음식이 하나의 기호식품처럼 인식되었다. 건강과, 환경, 동물을 모두 생각하는 착한 기호식품으로 인지되면서 육식을 즐기는 사람들도 몸과 지구에 휴식을 부여하는 차원에서 비건 식품을 접했다. 이것이 비건 시장이 커진 이유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부담 없이 접근할 수 있는 소비자에게, 우리 모두에게 배려심 깊은 채식. 이 슬로건을 통해 채식은 외식 시장에서 수익을 낼 수 있는 키워드로 인식되었다. 육식주의자조차 비건 제품을 사 먹을 수 있다는 가정 하에 시장은 성장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인프라는 부족하다. 채식에 대한 인식도, 환경도 처참했던 10년 전 한국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을 이룬 셈이지만 육식 인프라에 비하면 턱도 없다. 채식을 도전해보고 싶은 사람은 많지만 아직은 걸음마 단계인 국내 비건 시장에서 소비자들은 명확한 선택지를 정하지 못했다. 그래서 시장을 확보하고 브랜드를 굳히기 위해 대기업부터 스타트업까지 발 벗고 여러 아이템들을 출시했다. 기술 개발을 통해 육류를 사용하지 않고도 육류의 맛에 근접하거나 채식의 이질감을 줄인 제품들도 출시되었다. 그리고 허공에 떠다니는 20~30대 소비자들을 포획하기 위해 편리함을 어필하며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형태의 제품과 서비스들이 등장했다. 이미 진척이 이루어진 다른 외식분야들에 비해 여전히 부족하다. 그 뜻은 대부분이 레드오션인 외식 시장에서 드물게 보이는 블루오션이라는 것이다. 치열하게, 발 빠르게 성장 중인 시장이며 한 동안 가장 뜨겁게 달아오를 외식 트렌드라고 조심스럽게 예측해본다.
나는 샐러드를 생각보다 좋아하는 편이다. 뷔페에 가서도 다양한 샐러드를 먹어본다. 샐러드를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적극적으로 먹는 편이다. 하지만 이상하게 샐러드 전문점에서 샐러드를 사 먹는 것에는 돈이 아깝다고 생각했다. 왜 풀을 저렇게 비싸게 사 먹어야 할까. 원가가 고기보다 저렴할 텐데 비슷한 양의 고기보다 비싸게 파는 경우도 종종 보았다(물론 싱싱한 채소는 생각보다 굉장히 비싸다). 하지만 요즘은 내가 샐러드 구매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몸이 무거워지고 건강에 적신호가 켜지면서 진지하게 고민된다. 나도 살면서 처음으로 '식단'이라는 것을 해야 하나. 아마 얼마 안 가 나는 생에 처음으로 돈을 주고 샐러드를 사 먹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굳이 그런 샐러드가 아니더라도 비건 제품도 요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건강과 환경, 복지라는 아름다운 단어에 조금씩 이끌린 것이다.
채식을 강요하고, 멀쩡히 장사하는 정육점에서 동물보호를 실현한답시고 시위를 벌이는 사람들이 있다. 건강과 환경, 동물 복지를 인질 삼아 자신들의 신념을 강요한다. 이 단어들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맞다. 오염된 지구와 우리의 몸, 질 낮은 동물의 복지는 개선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들의 방식은 너무 극단적이다. 그들에게 육식을 강요할 수 없듯, 그들도 우리에게 채식을 강요할 수 없다. 지금의 비건 시장이 점차 넓어지고 유연해지면 은은하고 자연스럽게 그런 문화도 확산되고 인식도 개선이 되리라 믿는다. 당장 비건 시장이 핫한 이유도 소비력 있는 20~30대가 건강과 환경, 동물 복지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허세라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그런 행동과 구매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다.
나는 여전히 육식주의자다. 채소보다는 고기가 좋다. 하지만 나는 채소도 좋다. 한국은 산에서 나는 거의 모든 식물을 먹을 줄 안다. 해외에서는 잡초에 불과한 식물이 한국에서는 '나물'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된다. 육식문화가 잘 발달한 한국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채소를 사용한 음식 문화도 발달했다. 맨날 샐러드만 먹는 서양인에게 채소를 지지고, 볶고, 튀기고, 비벼서 먹는 조리법은 한국이 채식의 천국으로 보일 지경이다. 나는 이런 한식을 좋아한다. 야채 무침을 좋아하고 나물을 넣은 산채비빔밥을 좋아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육식주의자이면서 채식주의자가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잡식주의자가 아닐까. 육식과 채식을 둘 다 해서 잡식주의자가 아니라, 육식과 채식을 둘 다 '좋아해서' 잡식주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