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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식작가 Oct 10. 2022

자식에게 귀촌을 설득한 방법

귀촌 가정에서 나만 농사를 짓지 않는 이유 

  참 많이 말했지만 나는 시골로 이사 가는 것이 싫었다. 도시와 반대되는 시골이 싫었고, 너무 단호했던 엄마와 아빠가 싫었다. 하지만 엄마와 아빠는 이성적인 사람들이었다. 내게 단 하나의 조건을 내걸었다. 절대로 나에게 농사를 시키지 않을 것. 엄마와 아빠는 쿨하게 인정하고 시작했다. 시골로 내려갈 것이고, 귀촌을 할 것이라고. 가서 농사를 지을 것이라고. 우리가 하고 싶다고. 그러니 자식인 너는 따라와야 한다고.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가 좋아서 하는 것이니 가족인 만큼 이사는 어쩔 수 없지만 우리가 하고 싶었던 농사를 절대 너에게 강요하지 않겠다고.


  

  당신들이 하고 싶었던 농사였기에 자식인 나에게 농사의 의무를 지우지 않았다. 밭에 무엇을 심을지 같이 머리를 맞대지 않았다. 비가 많이 오는 날에 비옷을 챙겨 입고 급하게 밭으로 올라가지 않았다. 두더지와 해충이 작물을 망쳐도 속이 타들어가지 않았다. 같은 집에서 서로 다른 삶의 방식이 두 개가 공존했다. 돌이켜보면 이 결정은 생각보다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우리가 시골에 둥지를 틀고 독립을 한 지금까지도, 그 모든 것이 이 약속의 영향을 받았다. 내가 두 분의 농사를 돕길 원했다면 나는 지금까지도 시골로 내려간 것에 썩 좋은 마음을 품지 못했을 것이고 집에 내려가는 것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농사가 무엇인지 상관없이 내가 하고픈 의지는 크지 않았을 테니.  


 

  시골로 이사를 가고 첫해에 엄마와 아빠는 계획했던 농사를 시작했다. 집 뒤편에 널찍하게 펼쳐진 밭에 무엇을 심을지 계획했고 작물과 농사에 대해 공부했다. 당연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물론 초등학생인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냐마는 그래도 작은 일손 하나하나가 중요한 농사에서, 더군다나 초보 농부들에게 그런 일손은 중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주아주 초창기에 나에게 농사를 시키지 않겠다는 다짐을 깨고 부탁을 한 적이 있긴 했다. 나는 마지못해 도왔고 아마 엄마와 아빠는 내가 별로 할 마음이 없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사춘기에 막 접어든 청소년에게 하기 싫은 농사를 시키는 것은 두 분이 봐도 아니었나 보다.  



  그래서 첫 해가 지나고 나서는 내가 밭으로 나가는 일이 없었다 해도 무방하다. 물론 학교에 갔기 때문에 설령 돕는다 하더라도 그 일손은 미약했겠지만 나는 그마저도 하지 않았다. 하교하면 집에 콕 박혀 있었고, 주말에는 밭으로 올라가지 않았다. 그게 우리의 약속이었고 부모님과의 관계가 악화되지 않은 결정적인 이유였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엄마와 아빠가 하는 농사를 지지하기 시작했고 귀촌 생활에 물들어갔다. 시골에 사는 것이 불편하기는 했지만 그 불편함에 대한 대가로 서울에서는 할 수 없는 경험을 했으니까. 가령 집에서 닭이 갓 나은 달걀로 프라이를 해 먹거나, 뒷산에서 딴 나물로 비빔밥을 만들어 먹는 날 것 그대로의 경험들.



  물론 내가 농사를 지지한다고 해서 도운 것은 절대 아니다. 볼 때가 가장 좋은 것들이 있지 않은가. 나에게는 농사가 그런 것이었다. 가끔 할아버지를 비롯한 친척들과 전화를 하면 나에게 물어보시곤 한다. 요즘 너희 집 농사는 잘 되니? 뭐 키우고 있어? 나는 그러면 그냥 이것저것 많이 키워요. 농사는 그럭저럭 잘 되고 있고요.라고 한다. 사실 나는 별 다른 대답을 내놓을 수가 없다. 여전히 나는 우리 집 밭 어디에서 어떤 작물이 키워지고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워낙 많은 종류의 농작물을 키우기도 하고, 해마다 키우는 것들이 자주 바뀐다. 그리고 내가 그 정도로 자세하게 알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다. 엄마와 아빠가 나만 모르는 농사 이야기를 주고받는다고 해서 소외감을 느끼지 않았다. 한 해 농사의 전체적인 성패 유무 정도는 엄마가 가끔가다 말해주지만 무슨 작물이 풍작이고, 흉작인지 전부 알지 못한다.   



  가끔은 내가 너무한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엄마와 아빠가 가장 많은 시간을 쓰는 농사에 대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무심하고 관심이 없다는 것. 어렸을 때 농사를 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끝까지 밀고 나가 손 하나 까닥하지 않는 무정한 자식. 모두 맞는 말이다. 친척들과의 전화를 끊고, 내가 너무 매정한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해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다. 내가, 우리 가족이 밭에서 나는 농작물을 맛있게 먹는 것은 사실이지만 농사로 우리의 생계가 걸려있지는 않다. 엄마와 아빠의 거대한 취미 프로젝트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맞겠다. 그러니까 나는 두 분의 취미에 깊게 관여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그저 변명이라고 느끼겠지만 이것이 우리 가족 간에 골이 생기지 않은 이유다. 



  그리고 지금 와서 가끔 시골집에 가는 자식이 농사를 돕겠다고 하면 미덥지 못하게 볼 것이다.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내가 하는 밭일을 하나하나 챙겨 볼 것이다. 10년 차 농부가 보기에 20대 대학생이 하는 잡초 뽑기는 아무리 봐도 시원찮고 답답하겠지. 어떤 것을 뽑고, 어떤 것을 뽑지 말아야 할지를 하나 하나 캐물어가며 일을 해야 한다.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이 보기에는 초록색은 풀이요, 갈색은 흙이다. '익은' 작물을 구분해야 하고 수확하는 방식도 배워야 한다. 우리가 자라면서 자주 들어왔던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야'가 된다. 물론 엄마와 아빠가 이런 생각을 정말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껏 살면서 피부로 느껴온 엄마와 아빠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나는 우리 집이 시골에 있는 것이 좋다. 엄마와 아빠가 농부인 것도 싫지 않다. 시골로의 회귀를 택한 사람들이 직접 몸으로 경험하면서 농촌과 농사에 대해 가지고 있던 로망이 얼마나 허망한 것이었는지를 깨닫는데 비해 나는 그런 로망이 완전히 박살 나지 않았다. 농사가 얼마나 힘든 것이고, 농촌에서 사는 것이 도시와는 또 다른 고민거리를 안겨준다는 것을 옆에서 생생하게 지켜봤지만 적어도 그 고난을 온몸으로 겪은 것은 아니었기에 집에서 키운 농산물을 먹고 한적한 시골을 거니는 것을 좋아한다. 혹자는 고생을 하지 않았기에 머릿속이 꽃밭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건 엄연히 사실이다. 귀촌을 썩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자식에게 귀촌을 설득하려면 고생을 시키지 않아야 한다. 귀촌에 대한 인상을 긍정적으로 심어줘도 모자랄 판에, 원치 않는 농사라니. 그게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가끔 여름방학 때 집에 내려가 매미 소리를 들으며 거실에 누워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든다.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엄마와 아빠는 나에게 설득한 것은 아닐까. 귀촌을 하기 전, 그것에 대해 마땅히 설득할 방법이 없었다. 아무리 입에 침을 바르고 말해도 나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을 것이다. 게임과 친구가 좋던 초등학생에게 한가로운 시골과 맛있는 채소가 무슨 소용인가. 그래서 말로 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나를 시골로 데려가서 몸소 체험시켜주며 귀촌에 대해 설득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설득의 첫 단계는 호감을 사는 것이었다. 귀촌을 한다고 해서, 농사를 지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내게 납득 가능한 설명을 했다. 그리고 그 설득은 제법 잘 통했던 것 같다. 



  모르겠다. 내가 앞으로 농사를 어떻게 대할지 모르겠다. 결국 엄마와 아빠가 1년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장소는 밭이다. 더군다나 내가 서울로 떠나면서 엄마 아빠와 보내는 시간이 줄었다. 내가 엄마 아빠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으면 밭으로 올라가는 수밖에 없다. 엄마 아빠와 더 많은 대화를 하려면 농사와 밭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아무리 농사에 관심이 없다고 하지만 그것이 내 삶과 무관하지는 않으니까. 결국, 어떻게 되었든 농사는 내 삶에서 희미해질 수는 없다. 내가 가족과 보내는 시간에 위기감을 느끼면 그것을 위해서라도 밭에 올라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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