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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식작가 Oct 18. 2022

귀촌 가족이 김장을 하는 방법

결국 완전 자급에 성공한 우리 집 김장 

  우리 집은 김치를 정말 많이 먹는다. 구성원이 고작 셋인 가정에서 150포기 가깝게 김장을 한다. 거기에 총각김치, 파김치, 동치미, 깍두기, 갓김치 등등 온갖 종류의 김치들을 추가적으로 담근다. 이중 일부분은 묵은 김치로 여러 해 동안 냉장고에 묻혀있지만 대부분의 김치는 1년 안에 모두 소비된다. 생김치, 김치찌개, 김치찜, 김치볶음, 김치볶음밥... 등등 전부 나열하지도 못할 수많은 김치 요리들로 우리 가족은 한 해를 먹고 산다. 이런 모든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무지막지한 양의 김치가 필요하고, 결국 직접 담가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공장 김치가 맛있어지고, 김장이 수고스러운 행사라는 인식이 생기면서 직접 김장을 하는 집은 점차 줄었다. 김치를 사 먹는 것이 대세가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 집에서 파는 김치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외식과 중식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는 생각을 가진 나조차도 집 김치가 아닌 파는 김치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김치를 가리지 않고 잘 먹었고, 심지어 좋아했기 때문에 그랬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김장이 보기 드문 행사가 아니었다. 김장철이 되면 집에서 김장을 한다는 친구들을 더러 볼 수 있었다. 아파트에 살던 도시인 시절에도 김장을 하는 집들은 꽤 있었다. 집 베란다에서 빨간 고무 다라이를 빽빽이 놓고 직접 김치를 담가먹었다. 수고스러운 일이기는 했지만 대단히 특별한 일 또한 아니었다. 한 가지 특별하다면 그 양이 방대했다는 점이었다. 많아야 40~50포기를 하는 다른 집들에 비해 100~150포기를 담그는 우리 집은 확실히 특별한 가정이었다. 이미 그 당시에도 배추를 절이는 과정을 생략시켜주는 절인 배추가 시중에 흔하게 돌아다녔지만 엄마와 아빠는 생배추를 사서 소금에 절이는 것으로 김장의 시작을 알렸다. 많은 포기 수와 절인 배추를 쓰지 않는다는 것이 특별한 요소였다. 



  그래서 아파트에 살던 우리 집 김장은 좋은 배추를 구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귀촌을 하고 나서 엄마 와 아빠는 모든 김장재료를 자급자족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고 몇 해 지나지 않아 젓갈과 액젓을 제외한 모든 재료를 집 뒤편에 있는 밭에서 수급했다. 배추는 당연하고 무, 마늘, 쪽파, 고춧가루, 생강 등등 재료 하나하나가 한 해 동안 밭에서 나고자란 것들이었다. 배추김치 말고도 다른 김치들의 재료도 속속 채워졌다. 총각무와 깍두기 무, 동치미 무와 갓 등등의 재료들도 밭에서 자라났다. 우리 집이 진짜 귀촌을 했다는 것을 가장 크게 실감한 사건이었다. 엄마와 아빠도 가장 뿌듯하고 벅찬 순간이지 않았을까. 



  김장 장소가 베란다에서 마당과 비닐하우스로 바뀌었을 뿐, 재료를 구매하는 것에서 재배하는 것으로 바뀌었을 뿐 김장은 바뀐 것이 없었다. 배추를 절이는 밤이면 엄마 아빠는 밤잠을 설쳤고 온 가족이 달라붙어 김치를 생산했다. 양은 여전히 방대했고 김장이 끝나면 보쌈을 먹는 것도 여전했다. 다만 내가 자라고 커가면서 김장을 도울 시간이 줄었고 서울로 훌쩍 가버리면서 행사에 참여하지 못했다. 우리 집 김장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큰 변곡점이 되는 것은 내가 성인이 되었다는 것. 내가 더 이상 시골집에 상주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입 하나가 줄었다. 나는 보기보다 김치를 정말 많이 먹어서 내가 집에서 이탈했다는 것은 김치를 소비하는 사람 하나가 나갔다는 소리가 된다. 자취 첫 해, 엄마 아빠가 김치를 보내주는 것이 수고스러울까 파는 김치를 사 먹었지만 영 아니었다. 결국 두 번째 해가 되어 엄마가 나에게 김치 보내줄까?라고 물었고, 나는 그것을 덥석 물었다. 1년도 안돼서 다시 집 김치로 회귀했지만 시골에 살 때처럼 매일매일 집에 있는 것이 아니었고 그만큼 소비할 수가 없었다. 많아야 한, 두 달에 한 번 택배로 김치를 받았으니 먹을 수 있는 양이 한정적이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우리 집 김장의 포기 수가 줄었다. 입이 줄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가끔 술자리에서 별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다가 정말 아주아주 사소한 것에 대해 얘기할 때가 있지 않은가. 그중에 김장도 포함된다. 도대체 어떻게 김장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각자 서로가 가진 김장에 대한 썰을 푼 적이 있었다. 그 술자리에서 결국 지금까지 김장을 하는 집은 우리 집 밖에 없었는데 다들 어렸을 때는 집에서 김장을 했지만 시간이 흐르고 가족 구성원들이 하나, 둘 집을 떠나면서 김치를 사 먹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사람들 사이에서 집에서 농사짓는 농산물로 김치를 담그고, 무려 100포기를 여즉 한다고 말하면 다들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는 이것저것 묻기에 바쁘다. 


 

  그 술자리가 지나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우리 집이 귀촌하지 않았다면 아직도 김장을 하고 있었을까? 그 대답은 여전히 그렇다이다. 하지만 그 모습은 조금 달랐을지도 모른다. 늘 생배추를 직접 절이는 것으로 시작했던 우리 집 김장이 절인 배추를 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결국 시대의 흐름에 맞춰, 줄어든 입에 맞춰 편리함을 택했을 것 같다. 김치를 사 먹지는 않아도 김장이 많이 간소화되었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베란다에서 배추를 절이는 것은 무지막지하게 힘들다. 내가 나서서라도 절인 배추를 사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하지 않았을까.



  우리 집이 수작업을 고수하면서 김장을 담그는 것은 결국 배추부터 밭에서 기르기 때문인 것 같다. 대부분의 재료를 밭에서 공수한다는 자부심과 뿌듯함이 우리 집 김치를 지켜온 것은 아닐까. 솔직히 내가 김장을 도울 수 있었을 때, 김장철이 다가오면 괜히 피곤해졌다. 내가 직접 김치를 담그지는 않았어도 고무장갑을 끼지 않은 유일한 손으로써 각종 보조를 하고 절인 배추를 날라야 했다. 코가 시린 겨울날, 분주하게 치러지는 김장은 중노동이었다. 물론 김장이 끝나고, 일 년에 딱 한번, 그때만 먹을 수 있는 김장김치 + 보쌈은 어떤 음식보다도 맛있었지만 1~2일 고생하는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그래도 그때는 뿌듯함이 있었다. 밭에서 나는 재료로 내가 직접 김치를 담가 먹는다는 뿌듯함. 벅참. 보람. 이 모든 것을 고작 김치 한 조각 먹으면서 느끼기도 했다.  



  스무 살이 되어 독립을 하고 처음으로 김치를 사 먹었다. 김치 한 포기가 만원이 넘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고 내가 평소에 먹는 것처럼 김치를 소비하면 한 달에 김치값이 부담스럽게 다가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도 김치는 포기할 수 없었기에 사 먹었던 것인데 나는 그 기간 동안 우리 집 김치를 꽤나 그리워했다. 생전 집에서 멀리 떨어져 생활할 때 사무치게 그립지는 않았던 집이 유독 그리워졌다. 집밥 한가운데 큼지막한 접시에 한가득 놓여있는 김치가 그리웠던 모양이다. 처음 시작한 독립의 외로움도, 김치 한 포기에 만원이나 한다는 충격도, 집 김장김치를 반년 가까이 먹지 못했다는 아쉬움도 모두 그리움으로 귀결되었다. 사는 곳이 달라졌고, 삶의 방식이 달라졌지만 나는 여전히 우리 집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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