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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식작가 Sep 28. 2022

다들 달걀 나오는 닭장 하나쯤 있지 않나

집에서 직접 키운 닭과 그 닭이 낳은 달걀 이야기

  분명 난 엄마와 아빠의 자식이 맞는데 가끔 보면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엄마와 아빠는 둘 다 꼼꼼하고 계획적인 성격이다. 아마 MBTI 검사를 해보면 두 분 다 무조건 S, T, J가 나올 것이다. 나는 N, F, P인데 말이지. 덕분에 물건을 고장 내지 않고 오래 쓴다. 우리 집 전자레인지는 20년이 훌쩍 넘었고 소파는 15년, 티비는 10년 차의 연식을 자랑한다. 아빠는 차 한 대를 15년이 넘도록 사용했고 최근에서야 차를 바꿨다. 그마저도 정부의 노후 자동차 폐차 정책과 자동차 부품 수급의 문제가 아니었다면 차가 더 이상 굴러가지 않을 때까지 사용했을 것이다. 엄마와 아빠는 이런 사람이다.

 


  '물건을 고장 내지 않고 오래 쓰는 것'에서 물건에는 동물도 포함된다. 이건 특히 아빠의 주특기였다. 나는 12년을 아파트에 살면서 줄기차게 강아지를 키우고 싶다고 말했던 것 같다. 하지만 털이 날리는 강아지는 아파트에서 키울 수 없는 동물이라고 끈질기게 내 가슴에 못을 박은 엄마와 아빠 덕분에 우리 집에서 포유류는 학명이 '호모 사피엔스'인 것을 제외하고 존재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빠의 재능을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아빠가 동물을 키우는 것을 본 적이 없으니까. 물론 내가 기억도 흐릿한 시절 여행 갔던 곳 계곡에서 주운 다슬기를 몇 세대에 걸쳐, 자그마치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키운 것을 보며 아빠가 범상치 않은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갑각류에 한정되어 있었으니 크게 와닿지는 않았다.



  시골에 처음 이사 와서 얻은 동물은 단연 강아지였다. 시골집에 시그니처와도 같은 흰색 진돗개를 얻어 왔다. 데려올 때는 강아지였지만 이제는 개가 되었다. 잘생긴 암컷 진돗개로 광견병 주사를 놔주는 의사가 탐냈을 정도로 빼어난 외모를 자랑한다. 물론 시골 진돗개 특성상 집 밖에서 키웠지만 아빠는 정말 열과 성을 다해 강아지를 돌보았다. 밖에서 키우는 강아지에게 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주었다. 강아지가 아프면 몇 날 며칠을 걱정하며 잠을 뒤척였고 상태가 호전되면 그제야 한결 편안한 모습을 보였다. 최대한 산책을 시켜주려고 애썼고 조금이라도 놀아주려 했다. 꽤 오랜 시간을 강아지에게 쏟았다.


  

  다음 우리 집에 입성한 동물은 닭이었다. 한가롭게 티비를 보던 주말에 엄마와 아빠가 나를 밖으로 부른 적이 있었다. 목재로 만든 구조물이 집 뒤편에 세워지고 있었다. 나는 그 구조물을 붙잡고 그것이 완성되기를 지켜봤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병아리와 닭 중간의 영계가 닭장에 차례로 입주했다. 아빠는 재능을 십분 발휘해 닭들을 키워냈다. 일반적인 양계장에서 주는 사료보다는 갖은 영양식품들을 주었다. 이쯤 해서 내가 하나 알게 된 지식이 있는데 닭들이 세상에서 먹을 수 없는 것은 없다. 나물과 고기부터 생선뼈까지 모든 것을 먹어치웠다. 닭이 먹지 못하는 것은 곧, 사람이 먹으면 죽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사정 덕분에 닭들은 모든 영양분을 섭취했다. 집에서 먹지 못하는 음식과 밭에서 난 잉여 농산물을 모두 흡수했다. 정말로 잘 먹고, 잘 자랐다.



  그러던 어느 날, 아마 더위가 몰려오는 늦봄이었던 것 같다. 하교하여 집에 돌아온 나를 유독 반기며 계란 프라이 하나를 내밀었다. 나는 처음에는 이게 무슨 일인가 했지만 내 앞에 놓인 프라이를 보고 깨달았다. 이게, 우리 집 닭이 낳은 첫 번째 달걀이구나. 어린 닭이 낳은 첫 알이었으므로 크기는 작았지만 속은 옹골찼다. 오직 식용유에만 부치, 아무 간도 하지 않은 달걀을 먹었는데 이건 무언가 달랐다. 계란에도 맛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계란 비린맛이 없었고 굉장히 고소했다. 물론 우리 집에 처음으로 키운 닭이 낳은 첫 번째 달걀이라는 스토리텔링도 한 몫했지만 다른 것은 사실이었다. 한 마디로 맛있었다.


  

  그 뒤로 달걀은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우리 가족이 기한 내에 다 소비하지 못할 정도로 무수히 많은 양의 달걀이 생산되었다. 친척들부터 마을 사람들에게까지 잔뜩 퍼줘도 충분했다. 그 덕분에 몇 해전 달걀값이 끔찍하게 비싸졌던 달걀 파동 때 우리 집은 평온했다. 달걀 완전 자급에 성공했기 때문에 달걀값이 치솟은 것은 다른 세상 이야기였다. 달걀값이 한 개에 500원을 넘어 1,000원이 될 때까지도 우리는 계란말이, 계란찜, 프라이 등등 갖은 계란 요리를 해 먹었다. 그래서 그 당시 마트에 갈 때 달걀값을 보면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닭의 숫자가 줄어 그 당시에 비하면 생산되는 달걀의 양이 적지만 여전히 냉장고 한편에는 달걀이 그득히 차 있다.



  달걀 다음은 닭이었다. 닭은 생각보다 수명이 길다. 알 역시 늙어서까지 낳을 수 있다. 하지만 1살이 넘어간 닭들을 우리는 노계라고 부른다. 그 시점부터 닭고기가 질겨지고 맛이 없어진다. 그래서 우리도 닭들의 세대교체를 해주어야 했다. 닭들을 죽을 때까지 키울 순 없었다. 잔인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애완 닭을 키우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차례차례 닭들은 유명을 달리했다. 성격이 억세고 드세 키우기 어려운 닭부터 사라졌다.  첫 해, 키운 닭은 집에서 직접 잡았다. 닭의 숨통을 끊고, 털을 뽑아 우리가 아는 생닭이 되는 과정을 저부 집에서 집도했다. 나는 그 과정을 모두 지켜보지 못했지만 엄마의 증언에 따르면 닭을, 하나의 생명을 잡는다는 것은 굉장히 고역스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직접 키웠던 생명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아무리 애완용이 아니었다지만 밥을 주고 키우는 생물에는 당연히 정이 들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정은 아빠가 가장 깊게 들었다.  



  물론 닭고기는 맛있었다. 시중 닭에 비해 크기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고 기름기가 적어 깔끔하고 시원한 맛의 국물을 먹을 수 있었다. 우리 가족 모두 맛있게 닭을 먹었지만 아빠는 마음이 계속 쓰였던 모양이다. 닭을 키운 것도, 잡은 것도 모두 아빠였으니 그것은 당연했다. 결국 집에서 직접 닭을 잡는 것은 얼마 안 가 중단되었다. 아빠의 마음을 보호해주기 위하여. 그리고 너무 번잡스럽기도 했으므로. 그리하여 닭은 읍내의 시장에 있는 닭집(닭을 도축해주고 적당량의 수고비를 받는 곳, 일반 닭고기도 판매한다.)까지 가져가서 잡았다. 숨통을 끊는 일이 다른 사람 손에 맡겨지자 아빠는 한결 편해 보였다.



  아빠는 나에게 강하고 웬만해서는 틈을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슬픔을 잘 내색하지 않았고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그 흔한 감기도 잘 걸리지 않았다. 그랬던 아빠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여린 부분을 조금이나마 볼 수 있었다. 지금도 아빠는 닭들에게 정성을 쏟는다. 그리고 때가 되면 닭들을 한 마리씩 잡는다. 아무리 익숙해졌다지만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는 불편함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정은 붙을 때보다 떨어질 때 훨씬 지독한 법이니까.   



  다시 달걀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내가 우리 집 닭이 낳은 첫 달걀을 먹은 그 순간. 바로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엄마와 아빠가 하는 농사와 그에 관련된 모든 것을 탐탁지 않게 바라보았던 내가 그 심술을 조금씩 풀었던 것이. 달걀프라이가 내 혀에 닿자, 내 안에 있는 많은 것을 차례차례 깨운 것 같았다. 내 또래가 흔히 할 수 없는 경험을 하고 있음을, 그 경험이 소중해지리라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때까지도 나는 시골에 잠시 사는 도시인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고 주변 모든 것과 거리를 두었었다. 그렇지만 달걀 덕분에 시골을 비로소 '우리'집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나의 시골 생활, 귀촌 생활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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