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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식작가 Oct 19. 2022

도시학생의 시골학교 적응기   

학생이 적은 학교로 전학을 떠난 나의 이야기 

  초등학생 시절의 대부분의 시간을 남양주의 신도시 학교에서 다닌 나는 한 반에 30명씩 8개의 반이 6개의 학년으로 구성된 초등학교가 익숙했다. 아침 조회 때, 전교생이 전부 모이면 운동장이 꽉 들어찼다. 전교생은 고사하고 같은 학년에 정확히 누가 있는지도 잘 알지 못했다. 지금에야 학령인구가 많이 줄어 도시의 학교라도 눈에 띄게 학생의 수가 줄었지만 나는 학령인구가 풍족했던 세대의 마지막에 위치했기 때문에 미어터지는 교실을 경험해왔다. 아이들이 와글와글 모여 있는 학교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그것에 대한 적응을 완벽히 끝마쳤을 즈음에 그렇게 덜컥 시골로 내려갔다.


  

  시골 학교였지만 다행히 걸어갈 수 있는 거리였다. 조금 과한 오르막을 타면 됐지만 그래도 걸어서 15분 이내에 학교가 있었다. 게다가 통학 버스도 있어서 통학에 크게 곤란함은 없었다. 엄마와 아빠가 귀촌할 적당한 집터를 물색하면서 우선순위에 둔 것 중 하나가 학교였다. 그냥 무지막지한 시골로 내려간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통학할만한 거리에 학교가 있는 곳들로 둘러봤기에 나는 시골로 이사하고도 통학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다녀왔던 학교와는 사뭇 다른 시골 학교에 적응해야 했다. 



  우리가 가끔 다큐멘터리에서 볼 수 있는 아주아주 작은 분교까지는 아니었다. 모든 학년이 한 반에서 수업을 받는 독특한 경험은 없었다. 6개 학년이 독자적으로 운영될 만큼의 학생수는 있었다. 대신 모든 학년에 반은 오로지 한 개. 한 반에 30명은 고사하고 10명도 채 없었다. 다행히 나는 아이가 많이 태어난 년도에 출생하여 우리 반은 10명이 조금 넘는 숫자였지만 다른 학년은 처참했다. 5명, 6명이 평균이었고 정말 심각한 학년은 3명이었다. 나는 전학을 간 첫날, 한 반에 '고작' 10명이 조금 넘는 것을 보고, 내가 진짜 시골로 전학 왔구나 하는 것을 체감했지만 그 후에 다른 학년을 둘러보면서 '고작'이라는 표현을 쓴 것을 반성했다. 간간이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그 당시 우리 학년은 내가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학교에서 이례적으로 학생수가 많은 반이었다. 시골학교에서 한 반에 10명이 넘는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기록을 쓸 수 있는 숫자였던 것이다.  



  초등학교 전교생이 30명이 겨우 넘었다. 전교생 이름을 전부 외우는 것이 가능했다. 다른 학년은 신경 쓸 겨를도 없었던 도시의 학교 생활과 달리 다른 학년과 필연적으로 교류해야 했다. 누구의 아들, 누구의 동생, 누구의 사촌 등등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관계 속에서 당연히 서로가 서로를 알아야만 했다. 나름 초등학교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6학년이었지만 1학년과 알고 지내야 했을 만큼 좁은 사회였다. 서로 말을 트고, 어색한 시간이 지나 나는 금방 적응할 수 있었다. 모든 행사 때 전 학년이 단체로 움직인다는 것은 참 적응하기 어려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냥 한 반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워낙 학년 간 얼굴 볼 일이 많아서 그랬을까. 



  또 한 가지 독특한 점이 있다면 우리 학교는 초/중/고등학교가 붙어 있었다. 단순히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울타리 안에 초/중/고등학교가 모두 있다. 한 명의 교장선생님이 세 학교를 모두 돌보았다. 운동회처럼 대형 행사는 초/중/고등학생 모두가 함께 참여했다. 그래서 운동회를 하면 초등학교 4학년과 고등학교 3학년이 같은 팀이 되어 축구 경기를 하는 진귀한 광경을 볼 수 있다. 내 모교는 전국적으로도 찾아보기 힘든 초/중/고 통합형 학교였고 학생 수가 줄어들 것을 우려해서 만든 독특한 형태의 학교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 모두가 같은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초등학교를 나온 학생들은 별다른 이유가 없다면 같은 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나온다. 학생 수를 보존하기에 알맞은 방식이었고 학생 수 부족으로 인한 폐교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내놓은 방안이었다. 


  

  덕분에 그 지역에서 나고자란 아이들은 거의 12년 가까이 같은 학교에서 같은 친구들을 보며 자란다. 병설유치원마저 같이 다니면 15년 동안 같은 사람들과 유년기부터 청소년기 전부를 보낸다. 나는 그런 과정 중간에 온 아이였고 그래서 처음에는 아이들이 왜 그렇게 끈끈하고 같은 반뿐만 아니라 다른 학년과도 스스럼없이 교류할 수 있는지 몰랐다. 그래서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 문득문득 소외감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외로움을 느꼈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10년이 넘는 긴 시간에 잠시 스쳐간 외부인이었으니까. 물론 이것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나는 그 긴 시간에 당연스럽게 파고들 수 없었다. 친구들도 그것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고. 완연한 사춘기를 모두 시골학교에서 보낸 것도 그 외로움에 일조했으리라 생각한다. 갑자기 바뀐 환경과 관계에 그 당시 나조차도 눈치채지 못하게 힘겨워했던 모양이다.  



  물론 이렇게 말해서 내 시골학교 생활이 불행했던 것은 당연히 아니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진학과 더 많은 인간관계를 위해 시내의 조금 더 큰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결론적으로 내가 시골학교에서 보낸 시간은 4년 남짓한 시간이다. 그 4년의 시간 동안 나는 정말 걱정과 고민 없이 노는 것에 집중했다. 공부 비슷한 것을 하긴 했지만 공부보다는 실없이 웃으며 놀았다. 실컷 뛰어놀았고 땀 흘리며 운동했다. 여름에는 계곡으로 물놀이를 갔고 겨울에는 지독하게 쌓인 눈밭에서 뒹굴며 놀았다. 게다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금 내가 인간관계에서 내가 취하는 말과 행동의 대부분이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대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확장해 본 경험은 이때가 처음이었으니까. 그것은 나에게 소중한 경험이다.



  지금이야 내 요긴한 술자리 썰이 되었다. 대부분 도시에서 살아온 대학교 동기들과 선배들은 내 학교 생활을 신기하게 생각한다. 초/중/고등학교가 붙어있다는 것부터 해서 한 반에 10명이 그곳에서는 기록적으로 많은 숫자라는 것은 도시인들에게 다른 세상 이야기였다. 그래서 나는 내 중학교 시절이 좋다. 그때는 만감이 교차했지만 기억을 미화되어 추억이 된다고 했던가. 그때 품었던 외로움이 참 별 것 아니었다는 생각도 든다. 그냥 내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하는 바람에, 그리고 나와 비슷한 사춘기였던 친구들 사이에 있어서 유독 그런 감정을 느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집으로 가는 길에는 어김없이 내 모교를 지나친다. 여전히 아기자기하고 정겹다. 작은 리모델링을 몇 번 거쳤지만 내가 기억하는 그 모습 그대로이다. 가끔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갈 때면 학교를 통과해 가기도 한다. 고개를 돌려 교실이 드문드문 보이는 창문과 익숙하게 다녔던 복도를 보면 내가 정말 시골로 귀촌했음을 피부로 깨달았던 그때로 돌아간다.  가장 행복했던 학교 생활은 고등학생 때였지만 가장 재미있었던 학교 생활은 단연코 시골학교 시절이다. 오히려 밭과 산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냈던 학교는 그 시절 내 귀촌 생활의 대부분이었다. 달라진 삶에 부랴부랴 적응하던 내 소년기의 시작. 다사다난했던 도시학생의 시골학교 적응기는 무탈하고 즐거웠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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