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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식작가 Jul 26. 2023

리단길의 미래

경리단길과 그 형제들에 대한 이야기

  모든 길의 어머니


  얼마 전, 경주를 다녀왔다. 오랜만에 간 경주는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수학여행과 역사관광의 메카였던 경주는 이제 없었다. 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첨성대 주면의 황남동이 황리단길이라는 이름으로 재편되어 수많은 관광객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작고 아기자기한 카페와 맛집들이 즐비했고 각종 소품샵과 편집샵이 군데군데 박혀있었다. 가히 ○리단길의 칭호가 아깝지 않았다.


  지금은 그 유행이 한풀 꺾였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모든 길에 ○리단길을 붙이는 것이 유행이었다. 같은 서울에만 해도 송리단길, 망리단길, 용리단길 등이 생겨났고 황리단길과 같이 전국 어느 길에나 이런 이름이 붙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시작은 경리단길이다.


  1년 전이던가 오랜만에 이태원과 경리단길 부근을 간 적이 있었다. 원래 그 근처를 자주 다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서 그런가 거리의 변화는 더욱 피부로 와닿았다. 내 기억 속 이태원과 경리단길은 이러지 않았다. 모든 길의 원조인 경리단길이 이렇게 초라할 리 없었다. 언제부터 경리단길은 쓸쓸한 퇴장을 준비하고 있었을까.



  경리단길의 첫 기억


  경리단길이 한창이던 때는 가지 않았다. 못 갔다는 표현이 더 맞으려나. 그 인기가 절정에서 벗어나고서야 나는 경리단길에 첫 발을 내디뎠다. 절정에서 벗어났었음에도 경리단길의 첫인상은 좋았다. 명동과 가로수길처럼 기존의 번화가처럼 크고 웅장하다기보다는 작고 소박했으며 아기자기했다. 사람이 많이 찾는 번화가가 꼭 큰 규모일 필요가 없다고 몸소 알려주는 것 같았다.


  길 초입에 딱 들어서면 우선 층고가 낮은 건물이 우릴 반겨준다. 고층의 건물에 익숙해진 눈을 한결 편안하게 해 준다. 너무 직선도, 너무 곡선도 아닌 적당히 구불구불한 길의 끝에는 야트막한 남산이 보인다. 내가 처음 갔던 그날은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한 날이었는데 내리쬐는 태양 아래의 좁은 도로, 낮은 건물, 뒤에 걸린 남산은 한데 어우러져 상당히 이국적인 풍경을 연출했다.


  이런 공간적인 장점을 발판 삼아 거리 곳곳에는 식당과 카페가 자리를 잡고 있었으며 그들 사이사이에는 매력적인 상점들이 함께 있었다. 구도심 중 하나인 용산의 이태원동, 그중에서도 경리단길은 그렇게 사람들을 붙잡았고 나도 그렇게 붙잡힌 사람 중 하나였다.   



 소박하고 내실 있게

  

  하지만 경리단길은 거리의 미관과 공간적인 장점만으로 성공한 것이 아니다. 경리단길의 가장 큰 강점은 거리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에 있었다. 보통 번화가란 널찍한 거리에 큼지막한 음식점들과 카페들이 들어서 있다. 세련되었거나 긴 역사와 전통으로 각자의 영역을 구축한 매장들이었다. 하지만 경리단길은 달랐다. 새로웠지만 거대하지 않았고 산뜻했지만 너무 가볍지는 않았다.


  경리단길과 불과 한 두 개의 골목만을 사이에 두고 맞닿아 있는 이태원은 익히 알다시피 독특한 상권을 가지고 있었다. 넘쳐나는 외국인들 덕분에 세계 각국의 식문화가 거리 곳곳에 흩뿌려져 있었다. 경리단길은 그런 이태원의 독특한 식문화를 나름의 변형을 통해 우리의 것으로 만든 식당들이 많았다. 이태원이 가지고 있던 날 것 그대로의 것을 잘 변형시켰다.


  그리고 이태원이 그랬던 것처럼 경리단길 역시 인근 동네인 해방촌에 자신들의 유산을 남겼다. 이태원과 경리단길, 그리고 해방촌은 그렇게 비슷한 듯 다른 분위기를 공유하면서 성장했다. 남산 이남이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최고의 상권이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물리적으로든, 시기적으로든 이태원과 해방촌 사이에 위치한 경리단길은 최근 인기 있는 거리들의 모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리단길은 요즘 말로 '힙하다'라고 하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그런 분위기를 잘 연출해 냈다. 때 묻은 건물들, 대중적이지만 개성이 있는 매장들, 소소하면서도 묘한 에너지를 가진 분위기가 낮에서 밤까지 이어지는 것. 이상적인 도심 속 골목상권 모델이었다.        



  몰락마저도 선구자


  하지만 위에서 말한 경리단길은 이제 찾아보기 힘들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경리단길은 젠트리피케이션의 완벽한 예시로 남아버렸다. 폭증한 방문객과 그것을 상회할 만큼 올라가 버린 임대료.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기존의 매장들은 거리를 떠났고 경리단길 그 자체로 기능하던 매장들이 빠지면서 자연스럽게 방문객의 발길도 줄었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경리단길의 매력은 반의 반으로 떨어졌다.


  게다가 서울은 넓다. 경리단길은 단 한 곳이지만 그와 비슷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거리는 곳곳에 있었다. 많은 거리들이 경리단길의 '리단길'을 차용했고 마케팅부터 거리의 구성까지도 닮아갔다. 늘어나는 경쟁 거리, 임대료에 밀려 사라지는 매장들 그렇게 잃어가는 경리단길의 특색. 진행 중이던 경리단길의 퇴장은 가속화되었다.   


  그리고 손을 쓸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인기 있고 유명한 매장은 여전히 경리단길에 있지만 몇몇 매장들 만으로 경리단길의 분위기를 끌어올릴 수는 없었다. 심지어 그 와중에 터져버린 코로나19는 경리단길 쇠퇴를 여기서 더욱 밀어붙였다. 마지막으로 이태원에서 발생한 참사는 경리단길을 비롯한 남산 이남의 모든 상권에 타격을 주었고 그렇게 경리단길은 번화가로써의 종지부를 찍었다.   



  길의 미래


  이태원과 경리단길에 비해 해방촌은 아직 그 명맥을 잇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나는 가끔 해방촌 특유의 분위기가 좋아 방문을 하곤 하는데 남산을 따라 내려오면 자꾸만 경리단길을 지나친다. 이제 경리단길은 일부러 의식하지 않으면 몰라볼 정도로 변했다. 그저 이태원 옆에 위치한 평범한 골목길이 되어버렸다.


  경리단길의 최전성기를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봤던 경리단길도 충분히 매력 있는 거리였다. 그런 매력 넘치는 거리가 한순간 바스러졌다는 사실이, 몰라보게 변해서 어색한 느낌까지 줄 정도로 변했다는 사실이 아쉬울 뿐이다. 소박하고 아기자기하지만 넘치는 매력으로 무장한 매장이 뿜어내는 기운은 그 어떤 거리도 감히 따라 할 수 없다.


  사실 주목받고 있는 길들은 모두 앓고 있는 병이다. 경리단길만큼 빠르지는 않더라도 필연적으로 터져 나오는 문제들이다.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지만 이것이 길의 운명을 뒤바꿔놓는다면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라지기에 너무 아쉬운 거리들이 많다. 경리단길은 성공뿐 아니라 몰락에서도 선구자였다. 그리고 남아 있는 길들에게 스스로를 불태우면서 경고를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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