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희동 남쪽, 연남동에 대하여
연남동에서 첫 약속이 잡혔을 때 궁금한 것이 참 많았다. 나는 연남동을 가고 싶은데 왜 홍대입구역에서 내려야 할까, 왜 연남동에서 놀다 홍대로 넘어가자 그러는 걸까. 홍대입구역 3번 출구에서 내려서 나는 그 궁금증을 해결함과 동시에 여러모로 놀랐다. 오분거리에 있는 홍대, 대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판이한 분위기, 쭉 뻗은 산책로, 그리고 미친듯한 인파.
연남동은 왜 연남동일까. 연희동 남쪽에 있어서 연남동이란다. 참 간단하면서도 단순한 네이밍이지만 연남동과 찰떡이다. 연남동은 발음 그 자체에서 동네의 분위기가 묻어있는 것 같다. 정갈하지만 딱딱하지는 않다. 적당히 부드럽고 크리미하다. 왜인지 우중충한 날보다, 따사로운 햇살 가득한 봄과 여름에 잘 어울린다. 이것이 연남의 첫인상이었다.
서울의 대부분의 핫플이 그러하듯 아기자기하고 사진 찍기에 좋은 맛집과 카페들이 즐비해 있다. 누군가는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인스타를 채우기 위한 가게들로 그득그득 들어찬 서울의 여느 핫한 동네라고 여길 수 있다. 그래도 연남은 조금 다르다. 연남만의 개성으로 거리가 채워져 있다.
홍대역 3번 출구를 나오면 바로 정면에 경의선숲길이 있다. 꽉 막힌 지하의 벽들을 보다가 탁 트인 숲길을 보면 없던 설렘도 생긴다. 만약 계절이 봄이라면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와 봄이 왔음을 체감할 수 있다. 우리가 연남하면 느끼는 분위기는 대부분이 이 숲길에서 나온다. 가히 연남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서울 한복판에서 아름드리 가로수가 쭉 뻗은 보행로를 가진 상업지구는 생각보다 드물다. 풋풋한 풀들과 풀 옆에 세워진 낮은 층고의 상가들. 상가를 빼곡히 채운 식당과 카페. 이것이 우리가 연남에 가는 이유다. 이른바 숲세권. 녹지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서울에서 녹색 할당량을 채우기 좋다.
풀들을 보기 위해 늘어난 보행자를 잡아채기 위한 가게들이 연남에는 참 많다. 대부분 가정집을 개조한 것들로 숲길의 나무들과 어우러져 이국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런 가게에 앉아 숲길을 바라본 사람들은 그 맛을 잊지 못한다. 꽉 채워진 도시와는 또 다른 생기를 느낄 수 있다. 이를테면 싱그러움이랄까.
그렇다고 연남동이 숲길과 그 주변의 가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인식하는 연남의 이미지가 경의선숲길일뿐, 연남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가게들은 숲길을 따라서 나뭇가지처럼 꼬불꼬불하게 뻗어있다. 지도가 없으면 길을 잃기 십상이고 지도를 보더라도 왔던 길을 또 가기 마련이다. 그것이 구도심의 매력이자 가고자 하는 이유다.
한강 북쪽에서 사람이 북적이는 동네를 살펴보면 백이면 구십은 낮은 층고의 가정집을 개조한 가게들로 빼곡히 들어차 있다. 그리고 오래된 가정집에 현대적인 가게가 입점해 있는 모순을 우리는 요즘 퍽 좋아하기에 뉴트로라 이름 붙이고 애정한다.
연남 역시 이 공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디저트를 앞세운 카페와 양식, 일식을 내놓는 가게들로 연남의 골목길은 빈틈이 없다. 게다가 연남을 찾는 방문객의 연령대에 맞춰 격식을 차린 다이닝보다는 편안하고 따듯한 분위기로 감싸 안는 가게들이 많다. 그래서 이러한 따듯한 가게, 골목, 숲길이 만나 연남을 구성하고 있다.
나도 그랬지만, 연남동을 처음 찾는 이는 다들 놀랐을 것이다. 홍대랑 이렇게 가깝다고? 그런데 이렇게 분위기가 다르다고? 연남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는 데는 홍대도 큰 몫을 했다. 홍대와 연남은 상호보완한다.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고 세트메뉴처럼 사람들의 발길을 이끈다.
홍대는 원래부터 유흥과 젊음의 상징으로 군림하면서 서울에서 손꼽히는 메가상권이었다. 반면 연남동은 경의선숲길에 의해 비로소 완성된, 신생 상권이다. 하지만 후발주자였던 연남은 홍대 상권의 영향력을 등에 업었다. 홍대의 유동인구를 그대로는 아닐지라도 일부 물려받았다. 비록 일부라지만 홍대의 일부였기에 실로 엄청났을 것이다.
그런 홍대의 영향력이 다소 저물었다. 제왕으로 군림하던 과거에 못 미친다. 그러나 이제 연남이 있다. 홍대와 연남은 엄연히 다른 상권이지만 너무나 가까운 거리 때문에 큰 의미가 없다. 대부분의 상권 관련 통계에서 연남과 홍대는 같이 집계된다. 연남 유동인구가 곧 홍대의 유동인구다. 연남과 홍대는 떨어질 수 없다. 어쩌면 연남동이 떠오른 순간, 홍대도 함께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연남을 나설 때면 늘 밤이었다. 취기가 오른 탓인지, 어둠이 초록을 삼킨 탓인지 한낮의 그것보다는 항상 덜 했다. 물론 밤의 숲길도 나름의 매력이 있지만 낮이 더 빛나는 연남이다. 낮이 더 연남스럽다고 할까나. 밤에 더 북적거리고 흥에 겨운 곳이 되지만 그 온전한 분위기는 낮에만 느낄 수 있다. 서울에 이런 곳이 얼마나 될까. 낮이 더 빛나는 번화가. 연남이 좋은 이유다.
서울의 많은 거리가 그러하듯 연남도 로컬 맛집들과 독특한 거리의 분위기 때문에 방문객들이 몰렸다. 그리고 어디서나 볼법한 가게들도 함께 거리에 몰려들었다. 거리의 특색은 과거에 비해 옅어지고 대중의 입맛을 사로잡는다는 명목 하에 묽게 희석됐다.
그래도 연남은 아직까지 중심을 잘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중심이 흔들려 맥없이 스러진 거리들에 비하면 양반이다. 여전히 건재한 숲길과 주변의 가게들, 미로처럼 얽힌 건물 반지하와 저층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소규모의 식당. 인스타 감성으로 도배되었다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그것이 연남이다.
더 많은 대중을 만족시키며, 유흥의 놀이동산인 홍대가 있어서 그런지 연남의 분위기를 망칠 정도로 거리가 획일화되지 않는 덕도 크다고 생각한다. 덕분에 연남과의 작별인사를 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제법 필요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