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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식작가 Aug 24. 2022

눈(설)


눈이 오면 괜스레 뿌듯해진다
좁쌀만 한 것들이 모든 것을 덮는다
아무도 모르게, 그 누구도 모르게
소리하나 없이 은밀히 덮는다

무쇠의 톱날로 잘린 나무 밑동을 덮는다
북국에서 불어온 바람에 꺾인 풀가지를 덮는다
세월에 인력을 잃은 뜯겨나간 바윗덩이를 덮는다

뿌듯하게 내린 눈은 구별 없이 모두를 덮는다
그러면 이제 은밀한 것들은 나도 덮어 주겠지
무쇠 톱날에, 북국의 바람에, 기나긴 세월에
잘리고, 꺾이고, 뜯긴 나를 포근히 덮어주겠지

밞지 마라, 쓸지 마라, 녹이지 마라
모든 것을 덮은 이 눈을 해하지 마라
무엇인가를 파괴해본 적이 있는 누구든
파괴당한 이를 덮은 이 눈을 해할 자격이 없다



2018.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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