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ampunyee Mar 29. 2021

아버지 없는 상견례(공황장애와 결혼#24)

그저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평범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

난 골프를 좋아한다. 잘 치지는 못한다. 잘 치고 싶다는 생각도 별로 들지 않는다. 개인 레슨을 받거나 시간을 할애하여 연습장에 가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골프를 치러 가자는 제안은 거의 받아들이는 편이다. 골프장에서 사람들과 대화하며 그저 푸른색의 잔디 위를 걷다 보면 내가 공황장애를 앓고 있다는 사실을 잊게 되기 때문이다. 약을 먹으며 공황장애 증상을 잊는 것보다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자연스레 잊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된다. 정확히 말하면 골프장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시간과 돈이 더 필요하다. 하지만 아깝다는 생각은 없다. 나의 이런 증상을 약 없이도 해결해 줄 수 있다면 돈을 더 지불할 의사도 있다. 그만큼 증상을 겪는 약 30분 정도의 시간과 그 이후의 무력감은 돈에 비할 바가 아니다.



  

지난 7월에 미국 서부 패키지여행의 같은 버스 안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 8월 중순부터 본격적인 연애가 시작됐다. 그러던 중 9월 초에 그녀의 부모님께 인사를 드렸고 우리 엄마께는 9월 중순에 인사를 드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10월 15일에 상견례를 하기로 한 것이다. 그간의 맘고생으로 미뤄보면 꽤 오랜 기간 만났던 것 같이 느껴지지만 사정이야 어찌 됐든 실질적으로는 그녀와 만남을 시작한 지 두 달 만에 서로의 부모님이 만나는 상견례를 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정에 대해 내 주변의 지인들에게 말을 꺼내면 대부분은 속도위반을 한 것이 아니냐는 반응이 나올 정도다. 하기야 나 스스로도 이렇게 빨라도 되는 건지 반문할 정도이니 그들의 반응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엄마께서 상견례에 아버지를 부를 것인지에 대해 물은 것에 대해 생각이 많아진다. 20년 넘게 따로 살며 서로 연락을 하고 있지 않은 지금의 상황에 아버지를 부르는 것이 맞는지 나도 헷갈린다. 하지만 내심 상견례와 결혼식장에는 아빠가 앉아 있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난 그저 내가 그녀와 그녀의 부모님께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으로 보이고 싶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아버지는 경제적인 능력이 없는 것을 제외하면 크게 나쁘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나만의 생각이다. 누나나 여동생, 그리고 엄마가 생각하는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해서 가끔 들어보면 여전히 무능하고 책임감 없는 그저 생물학적 아버지로 여기고 있는 것 같다. 나도 솔직히 현재로서는 아버지에 대한 애정이나 친밀감은 없다. 내 20대 시절에는 아버지에 대해 꽤 원망도 많이 했다. 경제적으로 고생을 하다 보니 남들은 여기저기 여행도 다니고 좋은 직장을 구하기 위해 공부할 때 나는 일을 해야 했다. 직장을 구하기 위해서도 일을 하면서 공부를 해야 했기 때문에 당연히 그들과의 경쟁에서 뒤처졌고 결과도 좋지 않았다. 그런 경험들을 한 두 번씩 하다 보면 왜 나만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반문하게 됐고 그 원망의 끝은 결국 아버지로 향했기 때문이다. 이후 시간이 흘러 남들보다는 조금 늦었지만 직장을 얻고 생활도 꽤 안정적으로 바뀌면서 자연스레 그런 원망은 서서히 사라졌고 아버지의 존재 자체에 대해 거의 생각을 하지 않게 됐다. 오히려 가끔 생각이 날 때면 늦은 나이에 제대로 된 수입은 있는지, 밖에서 굶고 다니지는 않을지 걱정이 됐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전화를 했고 어느 지역에서 살고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정도만 확인하고 끊었다. 그런 아버지이지만 난 상견례에 부르기로 결정했다.




상견례를 하니 참석을 하면 좋겠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 나 혼자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군대를 갓 제대한 내 나이 20대 초반에 누나의 결혼식 소식을 알리기 위해 아버지를 찾아 간 이후 처음이다. 당시 아버지의 “난 누나 결혼식에 가지 않을 거다.”라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왜 그랬을까? 오래 떨어져 살면서 이제는 남이라는 생각으로 그랬을까? 아니면 자신의 부인과 딸이 어렵게 준비한 결혼식이라는 잔칫상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 못난 아비가 그 잔치에 단지 숟가락만 얹을 수 없다는 생각에 면목이 없어 그랬을까? 하지만 이유야 어찌 됐든 아버지가 딸의 결혼식에 참석을 하지 않겠다는 그 말에 나는 정이 떨어졌다. 그리고 두 번 다시는 아버지를 만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런 아버지를 정말 오랜만에 만나러 간다. 그것도 상견례에 참석을 권유하려는 이유로 말이다.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는 행색이 초라하기 그지없다. 삐쩍 말라 왜소한 몸에 머리카락은 듬성듬성 빠져 있었고 그나마 남은 머리카락마저 백발로 변해버렸다. 그런 모습이 실망스러웠다. 좋은 차를 타고 멋진 양복을 입은 말끔한 모습을 상상한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이런 초라한 행색을 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나를 보자 아빠는 멋쩍게 웃으신다. 오랜만에 봐서 반갑다는 당신만의 표현 방식일 것이다. 근황을 들어 보니 이 근처 한 아파트에서 경비로 근무하고 있단다. 그리고 여전히 20년 간 혼자 원룸에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어제 철야 근무로 인해 오늘은 밤늦게 출근을 하니 시간 여유가 있어 나를 만날 수 있었다고 한다. 과거 우리와 같이 살았던 시절에는 일이라 고는 하지 않았던 당신이 지금 이렇게 일을 하고 있다. 왜 우리와 살 때는 지금처럼 일을 하지 않았는지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말하는 내내 아버지의 발음이 약간 이상함을 느꼈다. 이유를 들어보니 치아를 제때 치료하지 못해 지금 꽤나 고생을 하고 있다고 한다. 안쓰럽다는 생각은 잠시 만약 아빠가 예전부터 지금과 같이 경비 일을 하면서 우리와 같이 살았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내가 저 치아를 모두 치료를 받게 했을 것이다. 물론 얼마가 들더라도 그 비용은 내가 부담을 했을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 스스로에게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그저 상견례에 앉아 머릿수를 맞춰 줄 대상을 찾아왔다고 되뇌며 혹시라도 이성을 비집고 나오려고 하는 동정심을 애초에 경계했다.

 

상견례 얘기를 꺼내자 아버지는 흔쾌히 참석을 하신다고 한다. 나는 다소 비꼬는 듯한 말투로 “누나 때는 결혼식장에도 오지 않았으면서 내 상견례에는 오네?”라고 되물었다. 그러자 그때는 사정이 있었고 지금은 다르다고 한다. 참 편한 계산법이다. 순간 이런 마음가짐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면 최소한 나처럼 공황장애로 고생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공황장애의 원인이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나의 경우, 스스로가 느끼기에 작은 스트레스를 계속해서 받았고 이것들이 보이지 않는 부담으로 작용하여 실제로 공황장애로 이어진 것이라고 나름 결론을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동안 내가 고생한 내용에 대해 아버지에게 퍼붓고 싶었다. 그래야 조금이나마 마음이 풀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초라한 행색을 보자 그럴 마음이 사라졌다. 차라리 우리를 떠나 잘 살고 있다면 그동안의 원망을 시원하게 퍼부어 마음이나마 편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 아버지에게 그렇게 하긴 싫었다. 오히려 이번 일을 계기로 보살펴야 할 짐이 하나 더 생기지 않을까 부담스럽기까지 하다. ‘이제라도 없었던 것으로 할까?’ 마음속으로 한 번 생각해 본다. 이런 아버지가 상견례에 입고 올 양복이나 제대로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한 나는 다음 주 상견례에 올 때 갖춰 입고 올 수 있도록 양복 값을 건넸다. 그렇게 짧은 대화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돌아가는 길, 다른 사람이 보면 이런 나의 상황이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나는 왠지 이런 모든 내 환경이 맘에 들지 않는다. 심지어 억울하다는 생각까지 들기 시작한다. 아버지께 양복 값을 쥐어 준 것이 아까운 것이 아니다. 축하를 받아도 모자랄 이런 좋은 일을 앞두고 왜 나는 남들은 신경 쓰지 않는 것들을 하나하나 신경을 쓰며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해야 하는지 억울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상견례 날이 됐다. 상견례라는 행사는 당사자의 부모님이 서로 처음으로 만나는 날이지만 우리 엄마는 여기에 더해 오랜만에 아버지까지 만나게 되는 날이다. 법률상으로는 부부 관계지만 20년 넘도록 만나지 않고 지냈던 터라 내가 느끼는 어색함 보다 엄마가 느끼는 어색함은 더 클 것이다. 예비 며느리의 부모님과 인사를 해야 하는 다소 어려운 자리에 수 십 년 만에 만나는 과거 남편의 존재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 엄마를 생각하니 괜히 아버지를 불렀나 하는 생각도 든다. 어머니와 나는 같이 이동하여 약속 장소에 도착했고 아버지는 나중에 따로 합류했다. 아버지는 지난번 만났을 때와는 달리 최대한 격식을 갖춰 차려입고 오신 모습이다. 다소 어색하기는 했지만 아들의 상견례 자리에 맞게 최대한 노력한 모습이다. 고맙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측은한 생각이 드는 지금이다. 경제적 능력의 유무와 관계없이 만약 아버지가 우리 식구들과 기쁨, 슬픔, 고생 등을 함께 해 여기까지 왔더라면 적어도 장성한 아들과 딸들이 있는 지금의 당신을 저렇게 밖에서 홀아비 생활을 하도록 그냥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지금 당신의 어색한 양복차림이라고 할지 언정 최소한 삐뚤어진 넥타이의 매듭이라도 살갑게 고쳐줬을 텐데 말이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아버지의 넥타이 매듭을 고쳐주면서도 이런 나의 이런 행동으로 인해 혹시라도 아버지가 당신이 지금껏 잘못한 모든 행동들이 용서받고 있다고 오해하는 것은 아닌지 괜히 신경이 쓰인다. 혹시라도 그렇게 오해할까 싶어 적당히 매듭을 고쳐주고 서둘러 마무리한다. 아직 나는 용서를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과거의 미움이 시간이 너무 오래 흘러 묻힌 상태다.




그녀와 그녀 부모님이 오셨다. 여기에 미국 여행에서 함께 했던 그녀의 동생도 함께 왔다. 다소 어색한 상견례가 시작됐다. 그녀 아버지가 먼저 운을 띄워 대화는 시작됐고 대화는 이내 순조롭게 이어져갔다. 가장 걱정했던 그녀 어머니가 생각하는 우리 엄마에 대한 이미지도 오해가 풀리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서로의 대화 속에 섞인 우리 어머니의 모습이나 화법을 눈 앞에서 실제로 겪어 보면 내가 자식으로 느끼고 있던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 모양이다. 더구나 나이 때가 비슷하다면 더 쉽게 와 닿을 수 있을 것이다. 전형적인 시골 할머니들의 화법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 어머니의 마음도 금세 열리고 있는 것 같다.

상견례 자리라는 것을 눈치챈 종업원이 조심스레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제안을 한다. 이 식당에서 워낙 상견례를 많이 하니 금세 눈치를 채는 모양이다. 자연스레 여러 장의 사진을 함께 찍으면서 분위기가 더욱 화기애애해진다. 대화의 막바지에 이르자 그녀 어머니께서 결혼 날짜에 대한 이야기를 하신다. 조금 놀랐다. 결혼에 대한 얘기가 나올 수 있다고 생각은 했으나 적어도 그녀의 어머니가 먼저 꺼내실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앉아 있었다. 결혼 시기와 날짜에 대한 부분은 부모님들의 몫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우리 엄마는 결혼 날짜는 신부 측에서 결정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 암묵적인 룰이 있는지 몰랐다. 우리 엄마의 대답에 그녀 어머니께서는 이미 정한 세 개의 날짜를 제안하신다. 그렇다. 이미 상견례 전에 괜찮은 날짜를 정해 온 것이다. 우리 엄마도 날짜를 보시더니 언제라도 좋다고 하신다. 상견례에서 바로 결혼 날짜를 정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우리가 사귀기 시작한 지 한 달여 만에 그녀의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가면서도 너무 빨라 정신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일이 있고 불과 한 달 후에 상견례를 했고 결혼 날짜에 대해서 얘기가 오가고 있다. 지금의 이 속도는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빠르게 느껴진다. 하지만 나도 몰래 얼굴에 미소가 지어지면서 ‘내가 진짜 결혼을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결혼 날짜 세 개의 후보를 정하고 상견례는 마무리가 됐다.




결혼 날짜 후보가 정해진 이상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이날 이후로 그녀와 나는 바로 결혼식 준비를 시작했다. 우선 예식장을 예약하는 것이 우선이다. 상견례가 있던 바로 그다음 주의 주말에 서울시내 이곳저곳의 예식장을 돌며 알아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결혼을 하는 사람이 많다. 희망하는 날짜의 최소 6개월 전에 예약을 해야 원하는 날짜에 식을 치를 수 있는 모양이다. 몹시 난감하던 찰나, 오전에 방문했다가 우리가 원하는 날짜에 자리가 없었던 식장에서 연락이 왔다. 웬일인지 원하는 날짜에 가능하다는 연락이다. 기존에 예약되어 있던 결혼식이 사정상 취소가 됐다는 것이다. 보통 결혼식장을 예약하고 취소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한다. 괜찮은 식장을 원하는 날짜에 잡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예약 시에는 예식장 대여료의 상당 금액을 계약금으로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예약 취소는 거의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취소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보통 ‘파혼’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유가 어찌 됐든 우리는 취소된 그 날짜에 식을 올리기로 했다. 오히려 파혼한 그 커플이 막연히 걱정될 뿐이다. 그렇게 우리의 결혼식은 2016년 2월 28일, 2월의 마지막 날로 결정됐다.


남자 나이 38세, 하지만 아직까지 스스로를 어리다고 생각하는 내가 진짜 결혼을 하다니.


결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본격적으로 한 시기가 정확히 기억난다. 공황장애로 고생하기 전인 내 나이 36세 어느 토요일 아침에 나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전날 팀원들과 새벽 늦게까지 술자리가 있었다. 아마도 새벽 서너 시에 집에 들어온 것 같다. 다음날은 토요일이니 여느 때와 다름없이 늦잠을 자고 있던 중이다. 아침 9시 즈음에 후배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그 후배도 어제 술자리에 같이 있었다. 후배는 결혼이 빨랐고 이미 두 아이의 아빠다. 어제저녁에 같이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들어와 오늘은 토요일이니 좀 늦잠을 자려고 했으나 아직 어린아이들이 아침 7시에 일어났고 어제 늦게 들어온 아빠의 피곤함은 관계없이 자고 있는 아빠 위로 올라가 놀아달라며 떼를 쓰는 바람이 어쩔 수 없이 일어나 지금 아이들을 데리고 산책을 나간다고 했다. 그러자 내가 생각이 났다고 한다. 나는 미혼이니 어제와 같이 늦게 술을 마시고 들어와도 지금쯤 푹 자고 있을 생각을 하니 부러웠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자 잠이 확 깼다. '분명히 같이 새벽까지 술을 마셨고 같이 헤어져 들어갔는데 나는 지금 누워서 빈둥대고 있는 반면에 후배는 힘이야 들겠지만 나름 착실하게 아빠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지 않은가?' 즉, 같은 조건에서 동일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나의 시간은 무의미하게 빈둥대며 흘러가는 시간이고 후배는 그 사이에 지친 몸을 이끌고 아이와 놀러 나가는 유익한 시간이라고 느껴졌다. 후배의 말은 단지 자신은 숙취가 남은 몸을 이끌고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데 아직 누워서 유유자적 숙취를 다스리고 있을 내가 부럽다는 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별 뜻 없는 말이 나에게는 큰 깨달음으로 다가왔다. 부끄럽지만 이때부터 왠지 결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다음에 계속...

작가의 이전글 그래도 일은 해야 한다(공황장애와 결혼#2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