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심비 있는 하루
투자 대비 효능, 효율성이 좋으면 가성비가 좋다고 한다. 그렇게 따지면 우리 부부는 가성비 없는 주말을 보냈다.
해마다 추수철이 되면 우리 부부는 왕복 8시간 넘게 걸리는 시골로 향한다. 논을 빌려주고 '도지'로 받은 벼를 도정 하러 가는 것이다.
어머님이 농사를 못 지으시면서 시작했으니 족히 15년 가까이 된 것 같다.
아빠 고생한다며 아들이 따라온다고 했으나, 남편은 차에 하중이 초과된다는 이유로 도움을 거절했다. 쌀을 더 싣기 위해 결국 우리 부부만 갔다.
시골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정미소에서 용달차를 빌려 시골집으로 향했다. 시골집 마당 한쪽에 벼가 담긴 쌀포대가 차곡차곡 쌓여있다. 벼포대를 하나하나 둘이 차에 옮겨 싣고, 다시 정미소로 돌아왔다.
정미소에 도착하니 도정하는 사람과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우리는 3시간 넘게 대기한 후 도정을 시작했다.
도정기계에 벼포대를 하나씩 내려 옮기고, 벼를 꺼내 넣는 일까지 모두 우리 몫이다.
도정이 끝나면 벼가 쌀이 되어 나온다. 나온 쌀을 20킬로씩 담아 묶어 주시면 남편이 차에 쌀자루를 차곡차곡 싣는다. 한 포대 한 포대 남편의 정성이 담기는 것이다.
남편이 들어 올려 실은 쌀포대로 트렁크가 꽉 찼다.
나는 감기로 몸이 컨디션이 안 좋고 허리까지 불편하여 살짝 거들기만 하여 남편 혼자 내리고 싣고를 다했다.
도정비와 찹쌀 20킬로짜리 두 개를 현금으로 구입했다. 예전에는 도정비를 쌀로 받았는데 요즘은 쌀이 잘 팔리지 않는다고 하시며 현금으로만 받는다.
찹쌀은 우리가 먹을 것과 찹쌀을 유독 좋아하시는 시누이 선물용이다. 이것도 매해 루틴이다.
쌀을 차에 싣고는 남편 쪽 다섯 남매 집과 내 동생들 그리고 친정 엄마께도 가져다 드린다.
보통 밤늦게까지 바쁘게 움직이면 하루에 다 돌기도 하는데, 이번에 도정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려 주말 이틀을 온전히 다 보내야 한다.
넉넉히 나누고 남은 쌀은 보통 지인들에게 시중가보다 약 30% 정도 저렴하게 팔기도 하는데 올해는 딸 집과 아들을 통해 예비 사돈댁에도 전했기에 몇개 팔지는 못했다.
30개가 넘는 20킬로짜리 벼와 쌀 포대를 내렸다 올렸다 하는 것도 힘든데 왕복 8시간 외 중간중간 형제들 집에 들러 배달하게 되어 10시간 넘게 운전하는 남편이 힘들어 보였다.
그리고 나도 힘들기에 해마다 나는 내년부터 도지를 벼말고 돈으로 받아 형제들과 나누자고 얘기한다.
왕복 차 기름값, 고속도로 톨비에 쌀 도정비 그리고 우리 둘. 특히 남편이 주말 내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고생하는 거 따지면 그게 훨씬 가성비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남편은 매년 어김없이 도지로 벼를 받고, 우리는 도정하러 내려오는 것이다.
남편이 이렇게 하는 가장 강력한 이유는 갓 도정한 우리 쌀이 밥맛이 좋기 때문이고, 돌아가신 어머님이 자식들과 손주들에게 주는 선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형님들 댁에 드린 쌀은 형님네뿐만 아니라 결혼한 조카들에게도 전해진다.
조카에서 손주들까지 우리 쌀로 밥을 해 먹는 것이다. 그들의 건강을 챙겨주기 위한 뜻도 담겨 있는 것이다.
쌀을 받는 형님들과 동생들, 지인들은 많이 고마워하며 쌀이 좋아 밥이 맛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쌀을 옮기는 과정이 힘들어 살짝 투덜거렸던 나도 막상 쌀을 나누고 좋아하시는 모습을 뵈면 잘했다는 생각이 들기에 강력하게 돈으로 받자는 주장을 못하게 되는 것이다.
피곤한 주말을 보냈지만 마음은 그 어느 주말보다 보람되다.
어머님 마음을 담은 시골쌀로 밥을 지어주니 윤기가 쫘르르 난다.
오랜만에 흰쌀밥, 고향의 밥을 맛나게 먹는 남편과 아들을 보니 뿌듯하다.
행동에 가치가 부여되면 계산적인 삶이 아닌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삶이 되는 것이다.
오늘 나를 살아가게 해주는 힘은 ' 계산으로 닿을 수 없는 가치'이다.
형님이 동치미와 깍뚜기등을 나눠 주셨다
화가 나는 이유를 잘 살펴보면
'내가 옳다'는 생각이 마음 깊이 있기 때문입니다.(중략)
그런데 잘 살펴보면
화를 낼만한 상황이라는 기준 자체가
지극히 자기중심적입니다.
각자 살아온 환경과 그 안에서 축적된 경험,
그리고 그 과정에서 형성된 가치관에 따른 것이니까요.
말로는 객관적이고 공정하다 하지만
실제로는 내 생각이고, 내 취향이고,
내 기준에 불과합니다.(주 1)
남편이 힘들어 보인다는 게 내 기준일 수 있고,
내가 힘들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 수 있다.
내 컨디션이 안 좋았기에 올해 더 힘들었던 시간이었지만
남편에게 화를 내지 않고 잘 끝내서 참 다행이다.
나에게 그냥 쌀이지만 남편에게는 고향의 맛이고, 어머님에 대한 추억이기에
내년에도 그냥 벼로 받아야겠다.......
주 1) 지금 이대로 좋다. 법륜. 정토출판
사진. ko_cho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