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에 실린 의미는?
반말 vs 존댓말
친근함 vs 예의
의미 vs 형식
" 내가 나이가 많으니 말을 놓아도 되지?"
운동을 좋아하는 회사 동료가 최근 동호회 신입 회원에게 들었다는 말이다.
신입 회원이 어떤 사람인지 지켜보고 있었는데 운동 끝나고 함께 식사를 한 자리에서 듣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동료는 " 보통 말을 놓게 될 때는 나이가 적은 사람이 이제 말을 편하게 놓으세요 할 때, 그때부터 놓는 겁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일주일에 한두 번 봤기에 낯설었는데 갑자기 친한 듯이 다가오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한다.
문득 예비 며느리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처음에는 존댓말을 했다가 어딘지 어색해서 " 말 놓아도 되지?" 묻고 반말을 썼던 기억이 난 것이다.
예비 며느리가 "편하게 말씀하세요"라고 할 때까지 기다렸어야 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은 우리에게 존댓말로 얘기하고 딸은 존대와 반말을 섞어서 말한다.
나는 아들이 어렸을 때 예의 있게 키우고 싶어서 존댓말을 가르치고 싶었다.
그래서 아들이 말을 배우고 시작하는 시기에 나는 아들에게 존댓말로 말을 했다.
남편에게도 신경 써서 더 존댓말을 썼다.
동생도 있기에 아들을 잘 가르치고 싶었던 욕심이 컸던 것이다.
교육 덕분에 아들은 말을 하기 시작하며 우리에게 존댓말을 했다.
어린애가 존댓말을 하니 사람들이 기특하다고 칭찬을 하기도 했지만 어떤 사람은 내게 " 아이를 엄청 잡으시나 봐요, 어떻게 어린애가 존댓말을 해요?"라고 묻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오빠에게 영향을 받은 딸도 우리에게 존댓말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딸이 " 존댓말 안 할래요, 엄마와 거리감이 느껴져서 싫어"라고 하면서 반말을 시작한 것이다.
어려운 얘기할 때는 극존댓말을, 편하게 얘기하거나 애교스럽게 하는 말은 편하게 놓기 시작한 것이다.
늘 우리에게 존댓말을 하는 아들과 대화를 하게 되면 우리도 아들을 존중하게 되어 아들이 사춘기 시절 잘못하는 게 있더라도 크게 야단을 칠 수 없었고, 미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많은 걸 잘하는 딸이 사춘기 시절 반말로 얘기할 때 가끔 딸의 의도와는 다르게 나에게 거슬리게 들리는 말이 있었다. 그럴 때 말투보다 말에 들어있는 의미를 찾으려 애쓰면서 불편함을 참았다.
두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존댓말의 힘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어른이 된 아이들과 대화할 때나 카톡으로 문자를 나눌 때도 대놓고 반말을 하지 않는다.
'그랬구나, ~ 해주렴!, ~ 하면 좋겠다'라는 식으로 말을 하고 사위에게도 '고맙네, ~ 해주게나' 이렇게 말한다.
반말과 존댓말이 중요하기보다 그 말에 담긴 의미, 뉘앙스가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딸의 반말이 괜찮았는데 딸이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게 되면서 조금씩 거슬리기 시작한다.
만약 딸이 자녀를 낳아 키우게 된다면 ' 존댓말, 엄마가 사용할 어휘 '에 대해 얘기할 시간을 가져봐야겠다
' 어른의 어른으로 산다는 게 참으로 어렵다!'
' 엄마의 어휘는 영혼의 모유입니다. '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간 엄마들의 어휘는
내 품에 처음 아이를 품었던 깊고 투명한 영혼의 모유이자,
즐겁고 슬프고 아팠던 지난 경험에서 추출된 정신의 즙이자,
직면한 삶의 심연에서 길어 올린 응축되고 숙성된 골수였습니다.(주 1)
작가는 언어를 그의 식탁 위에 놓는다.
그리고 그의 친한 이웃들이 함께 착석해 주기를 원한다.
빵과 술이 되는 그 언어는 그 자신의 육체요, 피인 것이다.
함께 먹고 함께 마시는 그리고 주고 또 받아먹는 그 만찬의 관계야말로
언어의 커뮤니케이션이다.
희열이다.
말은 혼자 말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너와 나를 이루는 통로이며 내가 타인으로 확대되어 가는 파문이다.(주 2)
나는 나의 어휘와 언어를 아이들의 식탁에 놓아 보려 한다.
우리 아이들과, 손주들, 그리고 그의 이웃들이 더 건강해지는 삶을 위해 노력해 보련다.
주 1) 엄마의 유산, 지담, 브런치
주 2) 이어령의 말, 이어령, 세계사
사진. ko_cho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