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다룬 <아이의 뇌, 청소년의 뇌, 성인의 뇌>를 통해 나이에 따른 행동차이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정리하자면 아동기에는 파충류처럼 생존 본능에 따라 행동하고 생존에 유리한 경험을 쌓는다. 이때는 생존욕구 충족 여부에 따라 만족과 불만족을 표현하는 수준에 머무르기 때문에 부모로서 아이들을 키우기가 비교적 쉽다. 청소년기에는 포유류처럼 파충류에 비해 더 복잡하고 다양한 감정이 발생하는데 청소년기의 여러 경험에 기인한 감정은 생존에 유리한 기억을 저장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자신의 경험에 따라 기준을 정하는 기간이기도 해서 경험이 다른 부모와 마찰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러한 시기를 거쳐 마침내 성인이 되면 자신을 지켜줄 단단한 이성을 통해 합리적 판단을 하고 한 사람으로서 안정된 삶을 완성하게 된다. 이성이라는 인간 고유의 시스템으로 인해 안정적 삶을 추구하는데 효율성이 높아지지만 이성의 힘이 커짐에 따라 부작용도 발생한다. 이성이 감정(또는 감성)을 억제함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들여다볼 기회를 막아 우리가 감정을 쉽사리 수용하기 힘들어질 때가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이 반복되면 감정보다는 이성에 더 의지하게 되는 경향이 커진다. 작게는 지금 당장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이 공존할 때의 결정이나 크게는 내가 원하는 삶과 내게 필요한 삶 중 무엇을 선택할 지에 대한 고민이 이에 해당한다. 또한 우리가 철석같이 믿는 이성의 힘이 항상 효용적이지만도 않다는 문제도 있다. 예를 들어 삶에 직면한 위기나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성은 매우 큰 힘을 발휘한다. 하지만 위기나 문제가 해결되고 난 후 평화로운 시기에도 이성 중심적 사고를 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평화로운 시기의 이성적 판단은 쓰이는 에너지(감정을 억제하는 일이 주를 이룬다.)에 비해 효용성이 떨어진다 느끼기 때문이다.
내 고등학교시절과 대학시절이 그랬다. 이성적 판단에 따라 더 나은 삶을 위해 좋은 학교를 가기 위해 감정을 따르는 당장의 즐거움보다 조금 더 참고 노력하는데 힘을 쏟는데 나 스스로 합의를 본 것이다. 그 결과 어느 정도 만족할 수준에 도달할 때 감정과 합의된 이성의 힘이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대학 입학 후 더 이상 내가 풀어야 할 인생의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 뒤로는 이성은 마치 족쇄와 같이 느껴질 뿐이었다. 그 덕에 '멋대로 살되 함부로 살지 말자.'라는 좌우명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대학에 진학하고 당면한 문제가 없으니 더 이상의 고민도 없었다. 막연하게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으로 무의미한 쾌락을 만끽하는데 시간을 써도 당장의 탈은 없었다. 집을 떠나 부모의 관리에서 벗어난 데다 부모님 덕에 충분히 풍족한 생활을 하다 보니 내 눈앞의 문제가 보이지 않아 미래를 위한 더 나은 방향을 찾지 않았다. 미래를 생각하면 대학을 졸업하고 약사가 되어 남보다 잘 살게 될 테니 더 이상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바보 같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적어도 지금 내가 갖고 있는 환경을 잘 쓰고 삶을 원하는 방향으로 끌어가기 위한 이성을 찾아야 했지만 편안함만 찾는 동물 수준의 감정만 따른 것이다. 나는 그렇게 '내가 진정 원하는 삶'을 완전히 잊은 사람이 되었다. 그 결과는 내가 원하지도 않는 삶을 원하는 삶이라 착각하고 사는 벌이었다.
반대로 이성적으로 열심히 사는 게 당연히 옳다는 판단도 문제가 될 수 있다. 가정을 꾸리고 아빠가 된 후 '당연하게' 열심히 일을 하는 사람이 되고자 앞만 보고 달렸다. 내가 진정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 묻기보다는 남보다 더 나은 삶이거나 남보다 더 빠른 삶이면 만족했다. 내가 더 노력할수록 더 나은 삶이 오는 것이 좋다고 믿었다. 그렇게 감정을 무시하는 시간을 보내다 어느 순간 몸과 마음이 망가진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이성과 감정의 사용법을 깨달았다 생각한 후에도 위기의 순간이 왔다. 나는 내 마음에 솔직하지 못했기에 큰 투자에 실패하기도 했다. 잘 안다고 생각했고 잘 이해했다 생각했으며 내가 진정 원한다 여겼지만 결국 이성과 감정의 균형을 깨뜨리고 나서야 잘못된 최선임을 깨달았다. 사실 지나 보니 나는 나름 언제나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 최선이 잘못된 최선이었던 것이 문제였을 뿐. 그 덕에 이렇게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행복실천법을 얻었을 수도 있다.
20대를 미성숙한 이성의 잣대와 자유로운 감성의 행동 덕분에 후회와 반성할 일들만 가득한 나날로 채운 나는 31살의 어느 날 스스로에게 물었다. '너 어떻게 살아야겠어?' 이 즈음 깨달은 것은 내가 20대의 나에게 어떻게 살고 싶은지 진지하게 물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약대에 갔으니 약사가 되고 대학원에 가서 전문연구원이 되어 국방의 의무를 마치면 내 삶의 의무가 끝난다 착각했다. 자유로운 사람으로 집에 가겠다는 생각 말고는 내 삶에 대해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물어보지 않은 것이다. 여행을 좋아하지만 군대 문제로 못 간다고 노력도 안 했고 외국어를 좋아하지만 여행을 갈 일이 없으니 필요 없다는 핑계만 댔다. 운동을 좋아했지만 근처에 내가 하던 종목의 도장이 없다는 이유로, 주변 친구들과 같이 운동할 일이 없다는 핑계로 하지 않았다. 하물며 그렇게 좋아하던 책 읽기마저 당구장과 PC방, 그리고 술자리에 밀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인생을 해결해야 할 숙제로만 여기는 동안 나는 나답지 못한 삶을 살았다. 그래도 다행히 오랜 시간 다짐한 덕에 고향이자 집인 제주에 돌아온 31살부터 이성의 힘을 빌어 예전의 나를 찾았고 행복한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마음을 잊지 않은 덕에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방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좋은 사람을 만나 가정을 이루고 좋은 약사가 되고 싶어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이 일마저도 숙제라 생각했다면 내 삶은 여전했겠지만 내가 원하는 삶에 대한 간절함은 내 이성과 감정을 합심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나는 앞으로 다시는 흔들리지 않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30대를 열심히 살면서 가정을 이루고 남들보다 더 열심히 살았다 자부했지만 이 또한 잘못된 생각이었다. 남들보다 열심히 일하면서 돈을 더 벌면 더 빨리 행복해질 것이란 착각 덕에 무리하게 일을 늘리기도 했고 재밌게 시작했던 일들조차 나중에는 즐거움이 없는 고통으로 쌓이기 시작했다. 결국 30대의 마지막 해에 다시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너 어떻게 살고 싶어?' 아이들이 커가면서 더 많은 돈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도 남들보다 열심히 노력해서 빠른 성공을 꿈꾸던 시간도 결국 나의 행복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나니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1년의 시간을 '내가 원하는 진짜 삶'을 위해 멈춰 섰고 깨달음을 얻었다. 그때 얻은 좌우명이 '두 손을 펴고 마음껏 살다'이다. 15년이 지난 후 지금의 동료약사인 약사님이 나를 찾아왔을 때 '열심히 노력해서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과 '내가 원하는 삶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내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수업을 해줬다. 이는 내가 정작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던 시절의 방황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하다.
40대에 이르러 안정적이면서도 편안한 삶을 살다가 느닷없이 찾아온 코로나는 다시 나에게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노력을 강요했다. 약국이 폐업할 지경에 이를 때까지 어떻게든 돈을 벌고자 하는 노력은 운이 좋아 투자 수익으로 연결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불안감과 운이 맞닿아 욕심이란 괴물이 되어 무리한 투자와 실패를 남겼다. 두 손을 펴기로 한 내 결심을 스스로 어그러뜨린 덕에 맞이한 결과였지만 수용하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다행이라면 가족을 포기할 수 없었기에 가족을 위험에 빠뜨릴 무리한 투자를 하지 않은 것이랄까? 그런데 아무것도 할 수 없이 수용할 수밖에 없던 이 시간 또한 '너는 과연 어떠한 삶을 살고 싶어?'라는 질문으로 해결되었다. 가족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고통은 삼 대가 함께 사는 행복한 집이라는 소원을 이뤘기에 퇴근 후에 온 가족이 함께 하는 행복한 저녁식사 시간에 치유되었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행복한 가족을 지키며 좋은 약사로서 사는 것임을 다시 한번 깨닫고 그렇게 지금은 내가 원하는 행복한 삶을 넘어 내가 경험한 행복실천후기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첫 번째 습관, 내 마음에 솔직하기(Heart)>는 인생의 나침반과도 같다. 길을 잃고 헤매다가도 나침반을 통해 원래 가려던 방향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 마음에 솔직하기를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한결 같이 '그게 정말 어려운 일인데....'라고 말한다. 이는 내 마음에 솔직하기를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 마음에 솔직하기는 마음 내키는 대로 살기가 아니다. 오히려 철저히 이성적인 사고를 하고 나서야 가능하다. 결정이 이성적 판단 영역이 아님을 확인하거나, 이성적 사고를 통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맞닥뜨릴 때 쓸 수 있는 방법이다. 내 삶을 결정할 때 이성적 판단을 넘어서는 내 마음속의 외침을 듣거나 이성적 판단을 통해 최선의 길을 가다가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을 때나 엄청난 벽을 맞닥뜨릴 때 그 길을 돌아갈 힘을 주는 것이 이 방법이다. '멋대로 살되 함부로 살지 말자.'라는 좌우명을 잘못 사용하여 20대의 아무 생각 없이 살던 무책임한 삶을 벗어날 때도, '하고 싶은 일은 반드시 한다.'는 좌우명으로 내 감정을 속이며 이성의 채찍질을 하던 30대 때도, '두 손을 펴고 마음껏 살다'라는 말을 스스로 지키지 못해 40대의 무모한 욕심으로 스스로를 힘든 시간에 빠뜨렸을 때도 나를 구해준 것은 <첫 번째 습관, 내 마음에 솔직하기(Heart)>였다.
단 내 마음에 솔직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다. 바로 결과를 책임질 용기다. 내 삶이 Best one이 아닌 Only one이 되기 위해서 아무도 가지 않은 나만의 길을 갈 용기가 필요하다. 미래를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이성은 멈추라고 말한다. 하지만 결국 갈 길을 결정하는 것은 마음이기에 솔직하게 마음의 소리를 들어야만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다. 물론 원하는 방향이 결과적으로 옳은 방향이기만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원하지 않은 길로 가는 것을 후회할 일은 사라진다. 이 습관을 연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쉬운 것부터 하나씩 시도해 보는 것이다. 나는 매일 아침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한다. 그게 떠오르지 않는다면 '점심에 무엇을 먹고 싶지?'를 물어본다. 사실 점심메뉴를 고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 일을 자주 하다 보면 내가 진짜 먹고 싶은 게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이게 <내 마음에게 솔직하기>를 익히는 좋은 방법이다. 반대로 평소에 이런 훈련을 하지 않는다면 정작 중요한 상황에서 자신의 감정을 수용하는 게 어색하고 어려워서 중요한 결정에 내 마음을 택하기 어렵다. 너무 힘이 들고 막막한 상태에서 '어떻게 해야 하지?'를 물어보는 것보다 내 마음이 편안한 상태에서 원하는 것을 물어보는 훈련을 하는 것이 좋다. 이를 통해 삶의 갈래길에서 이성적인 판단과 함께 내 마음에 솔직한 결론을 낼 수 있어 후회하지 않을 준비를 마칠 수 있다. 나는 이런 훈련을 통해 내 마음이 어떤지 언제든 잘 물어보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행복실천법 강사로 활동하며 내 마음에 솔직하기를 실천하고 있다. "잘은 못하지만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라는 말보다 "좋아하는 만큼 열심히 즐겨보겠습니다."라는 표현을 쓴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니 그만큼 잘하고 싶은 까닭이다. 그리고 속도보다 방향, 성공보다 성장을 쫓기에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좋아하고 잘하는 일'만 찾아 하려고 애쓴다. 지금까지 살아온 결과 나를 행복하게 하고 나를 바로 세운 일은 대부분 좋아하고 잘하는 일임을 깨달은 덕이다. 사람들 앞에서 말하기를 좋아하고 다른 사람들이 행복해하는 표정을 보는 것을 좋아하기에 행복실천법 강사는 내가 가장 좋아하면서 잘하는 일이 되었다. 완벽한 강사가 되는 날이 오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내 마음에 솔직하게 내가 좋아하는 만큼 더 잘할 수 있을 거라 믿으며 내 마음에 솔직하게 사는 요즘의 나를 응원하고 좋아하느라 바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