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습관, 가족과 함께 하기(Attachment)
행복실천습관(HAPPITS)은 내 경험을 토대로 한 주관적인 결과물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두 번째 습관, 가족과 함께하기(Attachment)> 을 설명하고 싶기 때문이다. 부? 명예? 성공? 행복의 맛이 가득 차 있을 듯한 이 멋진 목표보다 가족과 함께하기의 중요성이 내게는 절대적으로 우선하기 때문이다. 나는 고독(Solitude)을 깨닫기 전까지 혼자 있는 시간을 너무나 두려워했다. 혼자만의 시간은 외로움이었고 괴로움이었다. 온전한 나로 성장하는 고독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한 탓에 언제나 사람들과 함께 있기를 원했고 인정욕구까지 더해져 항상 칭찬받기를 바랐다. 지나친 인정욕구는 나를 밉상으로, 외톨이로 만들기도 했다. 타고난 기질이 그런지라 지금도 혼자 있기를 싫어한다. 다만 그때는 외로움을 피하고 싶기만 했다면 지금은 내가 원하는 고독정도는 즐길 수 있게 된 정도다. 가족과 함께 하기는 중의적 의미를 갖고 있다. 첫 번째는 물리적으로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과 공간이고 두 번째는 내 마음속에서 가족을 생각하는 태도다.
누군가에게는 화창했을, 하지만 내게는 암울했던 20대 시절에 내가 너무나 지우고 싶은 한 단어는 '외로움'이다. 대학 입시 후 1년 가까이 친누나와 함께 살았던 시간을 제외하면 나는 12년을 오롯이 홀로 보냈다. 처음엔 누군가와 함께 지내는 것이 어색하고 불편하다는 이유로 독방에서 하숙을 시작한 것이 직장생활을 할 때까지 이어져 홀로 자취생의 시간을 보냈다. 어릴 때도 집에서 혼자 있는 시간이 싫어 일하시는 어머니를 쫓아다니며 "엄마, 엄마, 엄마, 엄마"하며 따라다녔던 성격이다. 혼자 있는 시간이 싫었던 나는 대학생이 되어서도 홀로 집에 있는 시간이 싫었고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살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혼자 지내지 못하는 성격과 그로 인해 생긴 정 붙지 않은 공간은 나를 불안하게, 그리고 불행하게 만들었다. 다행히 이제는 삼 대가 함께 살고 있는 행복한 시간을 누리고 있어 이 이야기를 즐겁지는 않아도 괴롭지 않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절대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마음에 <세 번째 습관, 매사에 감사하기(aPpreciation)>보다 더 앞에 이 습관을 두었을 수도 있다.
가족이 함께 지낼 때 얻는 이점을 굳이 말할 필요가 있을까? 아니, 요즘 같은 핵가족 시대에는 잘 모를 수도 있으니 이야기해 보겠다. 나는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최소 열 번은 우리 가족을 안는다. 아버지 두 번, 어머니 두 번, 천사님 두 번, 큰 아이 두 번, 작은 아이 두 번. 이렇게 매일 가족과 포옹을 하면서 느끼는 행복감은 나를 평온하게 한다. 그리고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같이 밥을 먹는다. 아이들하고 먹을 수도 있고 부모님과 먹을 수도 있다. 천사님과 데이트를 하는 핑계로 둘만 먹을 때도 있다. 그렇게 함께 밥을 먹으면 행복해진다. 서은국 교수의 말이 맞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보다 쉽게 행복해지는 방법은 없을 것이다. 함께 살면서 제일 좋은 점은 가족의 얼굴을 매일 보는 것이다. 유전학자이자 진화생물학자인 애덤 윌킨스의 책 <얼굴은 인간을 어떻게 진화시켰는가>에서 인간의 얼굴은 다른 동물보다 훨씬 더 감정 상태를 잘 표현할 수 있는 정교하고 민감한 의사소통의 도구로 쓰인다 말한다. 더불어 무의식 중에 심리 상태를 드러냄과 동시에 타인의 감정을 '읽고' 이해할 수 있어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족의 상태를 이해할 수도 있다 말한다. 나는 아버지 어머니 건강 걱정이 되면 얼른 부모님께 가서 한 번씩 얼굴을 들여다보고, 손을 잡아보고, 꼭 안아본다. 그리고 "요즘 컨디션 어때요?"라고 눈을 보며 물어본다. 또한 아이들이 학교에 다녀올 때나 반대로 내가 직장에서 퇴근하고 나면 "오늘 어땠어?"라고 물어보며 표정을 살핀다. "그렇게 빤히 보면 부담스러워요."라고 말하는 사춘기 중3의 무뚝뚝한 표정에도, 아직은 아빠를 보면 두 팔을 벌려 아빠를 안는 초 6 아들의 표정에도 오늘 하루가 어땠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정보가 들어있다. 천사님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어떤 걱정을 하는지, 어떤 고민을 하는지가 보인다. 이렇게 나는 가족의 표정을 통해 안위를 확인할 수 있어 안심이다. 이게 가족과 함께 할 때의 가장 큰 기쁨이다.
사실 매일 가족과 함께 부딪히며 사는 삶은 때로는 불편할 수도 있다. 다른 사람으로 인해 내 시간 공간을 써야 할 일도 생기고 내가 원하는 나만의 시간을 갖기 어려울 수도 있다. 아침 운동을 하고 시원하게 샤워를 하고 싶을 때 어머니의 호출로 땀범벅이 되어 운전을 해야 할 수도 있고, 새벽에 일어나 책 읽기를 진득하게 하고 싶어도 아이들의 아침을 차릴 준비를 하거나 등교를 준비하느라 결국 별일 없는 일상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이 보다 더 한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가족과 함께 하는 것이 좋다. 나는 무리동물의 습성을 잘 물려받았기에 함께 있을 때 안정감을 느끼고 그로 인해 행복을 충전할 수 있다.
가족이 함께 하는 최고의 이점은 부모와 자식의 역할을 자연스럽게 대물림하는 교육이다. 나는 성인이 된 후 아버지와 관계가 매우 좋지 않았다. 아버지는 나를 평생 중학생처럼 다루셨다. 무엇을 해도 불안하고 무엇을 해도 감정적이라 판단하셨다. 내 나름 어른으로의 생각을 갖고 하는 행동에도 아버지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실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아버지한테 인정받고 싶었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불가능했고 그로 인해 오랜 시간을 힘들어했다. 이런 아버지와의 관계가 회복된 것은 하나의 깨달음이었다. 아버지는 여섯 살 때부터 고조할머니(아버지의 증조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린아이가 아빠도 엄마도 없이 둘만 지내셨는데 그마저도 고조할머니께서 돌아가신 이후로는 혈혈단신 고아가 되셨다. 중학교 무렵의 아빠는 그 누구에게도 가족으로서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고 그렇게 어른이 되어 자신의 아이를 가르칠 때 나이에 맞게 교육할 방법이 없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 아버지에게 인정받기를 바라는 일을 멈췄고 오히려 지금의 내 나이와 비슷한 시절의 아빠를 생각하고 친구로서 아버지를 위로하고 칭찬하기를 시작했다. 내가 아빠가 되고 나서 아빠는 어떻게 하면 좋은 응원이 되는 지를 배웠기에 반대로 내가 아빠가 되고 싶어 하신 멋진 아빠의 모습을 칭찬하고 숨기고 싶은 실수나 잘못을 감싸며 위로하니 충분해졌다. 이 경험은 나로 끝나지 않는다. 내 아이들이 이런 나를 보고 느끼고 깨닫고 배울 것이다.
나는 내 방황을 가족을 향한 마음 덕에 끝낼 수 있었다. 12년의 서울 생활이 외로웠음에도 내가 견딜 수 있었던 힘은 가족을 생각하고 가족에게 돌아갈 날에 대한 희망이었다. 남들에게 말하면 효자라고 오해받는 비밀이 있다. 나는 서울 생활 중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집에 전화를 했다.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고 하루를 견딜 힘을 얻었다. 부모의 안부를 물었지만 마음속은 엄마 목소리를 들으면서 다시 함께 할 날을 상상하며 외로움을 달랬다. 솔직히 일생을 살면서 물리적으로 가족과 함께 하는 것은 좋고 나쁜 수많은 이유로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속에서도 가족과 함께 하고 있지 못할 때가 많다. "out of sight, out of mind", 보이지 않으면 생각나지 않는다는 말은 맞다. 그게 자연스럽다면 왜 우리는 더 이상 볼 수 없는 가족을 그리워할까? 이는 마음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가족은 언제고 마음에 남을 것이고 내 마음을 들여다볼 때마다 보일 것이다. 내 마음에 남은 가족을 볼 때 후회할 것인가? 아니면 추억할 것인가? 적어도 단 한 가지 우리가 직접 볼 수 없다면 자주 생각이라도 하고 자주 생각할 수 있다면 단 한 번이라도 더 연락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버겁고 힘들 때마다 내 짐 위에 가족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받치고 있는 지붕 아래 나의 가족과 아이들이 나를 받치고 있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나는 언제나 가족을 생각하면 힘이 난다. 방황하던 인생의 끝자락에서도 내 마음속 가족이 나를 받쳐줬고 행복한 가정을 위해 한 발 한 발 내딛는 시간 속에서도 가족이 함께 하고 있다.
끈으로 가족의 일생을 표현한 그림을 보고 뭉클한 기억이 있다. 먼저 한 끈이 나타난다. 그리고 조금 있다 다른 한 끈이 나타난다. 그리고 한 끈은 먼저 끝이 나고 다른 한 끈은 이어진다. 그리고 다른 그림은 두 끈이 먼저 시작되지만 다른 한 끈이 먼저 끝나는 그림이다. 첫 번째 그림은 부모와 자식의 시간이고 다른 그림은 부부의 시간이다. 존재를 규정하는 것은 시간이다. 사실 우리는 다른 장소에 있다는 이유로 같은 시간에 있음을 망각하게 된다. 그리고 같은 시간에 있지 못할 때가 돼서야 현실을 깨닫고 슬퍼하게 된다. 만일 이때 후회하기 싫다면 매일 마음속에 가족을 새겨보는 것은 어떨까? 내가 힘든 일을 하고 있을 때에도 가족을 떠올리며 우리는 힘을 얻는다. 내가 기쁜 일이 생기거나 때로는 슬픈 일이 생길 때에도 가족을 생각하면 기쁨이 두 배가 되고 걱정은 절반이 되기도 한다. 김형석 교수는 그의 책<백 년을 살아보니>에서 '사랑이 있는 고생이 행복이다.'라고 하셨다. 가족이 같은 장소에 있고 없고 보다 중요한 것은 가족이 내 마음속에 있고 없고가 아닐까?
가족과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나처럼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경우가 가족이 없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다. 가족(家族)만큼이나 가까운 사람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식구(食口)라는 표현을 쓴다. 끼니를 같이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내게는 서울 생활시절 나를 지켜준 식구들이 있다. 대학시절 외롭지 않게 나를 챙겨주며 옆에서 응원하고 위로해 준 PC방 사장님은 지금도 형과 동생으로 잘 지내고 있다. 회사를 다닐 때 밥 한 끼 잘 챙겨 먹고 다니는지 물어보던 세탁소 사장님, 일식집 사장님과도 자주 만나지 못하지만 전화로 안부를 전하고 항상 서로를 챙긴다. "밥 먹었어?"라며 내가 잘 지내는지 안부를 물어보고 밥 한 끼 챙겨주시려 했던 이분들 덕에 나는 마음을 바로 잡을 수 있었고 내 삶을 지킬 수 있었다. 서로를 지지하고 위하는 사이가 식구다. 당신 주변에 진심으로 당신을 위하는 사람, 당신이 위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밥 한 끼를 함께 할 때 가족과 같은 마음이 든다면 이들이 당신의 식구다. 요즘의 나는 집에서는 가족과, 일터에서는 식구와 함께 하고 있어 외로울 틈이 없다. 내가 애착하는 가족과 식구들이 나를 굳게 지지해 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