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선물이다.
행복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선물이다. 단, 살아있는 동안에...
우리는 젊어서도 나이 들어서도 정신줄을 붙잡는데 여념이 없다. 어릴 때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 하고 나이가 들어서 인지능력이 떨어지고 치매라도 걸린다면 세상 무너진 걱정을 하고 살아야 할 의미를 잃어버린다. 그런데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 잡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삶을 사는 동안 잡아야 할 줄은 무엇인가? 나는 감히 마음줄이라 말하고 싶다. 나 역시 정신줄 똑바로 잡고 살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하지만 정신줄보다 마음줄을 붙잡는데 더 힘을 쓰는 사람이다. 내 정신줄은 옆에서 잡으라고 말이라도 해주지만 내 마음줄은 내가 붙잡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대신 잡아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일에 신경 쓸 정신이면 니 앞가림이나 제대로 하라'는 말을 하기 일쑤다. 물론 인생을 '효율적'으로 살기 위해서 내 삶에 이익이 되는 판단에 집중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이익이 내 마음을 해친다면? 내가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행복을 지워버린다면 과연 이것이 내 인생의 이익일까? 내가 괴로움을 견디고 이겨내기 위해 정신줄을 붙잡지만 내 괴로움을 달래주는 마음줄을 내 팽개쳐버린다면 어느샌가 나는 행복을 잊고 사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렇게 행복을 잊고 살던 어느 날 문득 우리는 흘러가버린 내 삶이 서글퍼질 것이다. 나는 그런 서글픈 삶을 사는 '이익'을 포기하고 오늘 하루의 행복을 만끽하고자 한다. 내 삶이 지금보다 나아지지 않는다면 어떤가? 내가 남보다 조금 더 부족하면 어떤가? 나는 나를 사랑하고 내 하루를 사랑하고 내 행복을 잘 쓰고 있다는 확신으로 살고 있다. 그게 마음줄을 붙잡은 나의 삶이고 내 마음줄은 내 영혼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마음 바구니가 되었다.
나는 46세부터 죽어가기로 결심했다. 죽음을 준비한다는 말은 너무나 거창하고 두려웠기에 죽음을 느리고 천천히 맞이한다 생각한 것이다. 운이 좋다면 90세까지 살아 있을 수도 있으니 인생의 정상에서 다시 내려오는 시간을 맞이하는 것이고 그보다 더 일찍 죽는다 하더라도 내 죽음을 수용하고 있으니 그나마 덜 두려울 것이라 여긴 까닭이다. 그냥 살아있는 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언제나 죽을 수 있는 사람이니 죽음을 기억하고, 내가 살고 있는 운명을 사랑하는 방법으로 오늘 하루의 행복을 만끽하고자 최선을 다할 뿐이다. 내 마음줄을 꼭 붙잡고 가끔은 정신줄을 놓더라도 오늘 하루 잠자리에 들 때 '이로서 내 삶은 충분히 행복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매일의 죽음을 맞이하려 애쓴다. 행복의 사용기한은 '바로 지금'이기 때문에. 행복의 사용기한을 잘 지킨 덕분일까? 나는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이 참 많다. 약사, 심리상담사, 커플카운슬러, 배민라이더는 물론 약국전용식품회사의 대표였고 (겸임) 교수였으며, 대한약사회의 임원이기도 했다. 특히나 말하기를 좋아하는 성격 덕에 요즘은 강의를 주로 하는데 의약품안전교육강사이자 중독예방교육강사이며 약국경영강사까지 하고 있으니 이 모든 일이 어지간히 원하지 않고서는 남들 생각에 ‘지쳐 쓰러지고 남을 일’ 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을 즐겁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단 한 가지다. 나는 행복한 삶을 원하고 행복할 일을 원한다는 사실이다. 그 결정체가 행복실천가이자 행복실천강사가 아닐까 싶다.
인간을 영단어로 표현하면 Human Being이다. Human도 인간이란 뜻을 갖고 있는데 왜 굳이 Being을 붙였나 싶었는데 얼마 전 그 궁금증을 풀었다. 인간이 삶을 사는 데는 단계별로 의식이 성장하는 경험을 한다. 그 의식의 성장은 소유(Having)로 시작된다. 내 삶을 풍요롭게 할 좋은 집이나 차, 그리고 남들이 부러워할 물건은 물론 좋은 친구, 연인, 동료 등이 이에 해당한다. 그렇게 우리를 채워줄 소유의 단계를 지나는 단계가 있으니 이는 남과의 비교를 통해 채워지지 못하는 공허함을 느낄 때다. 만일 이때 의식성숙이 소유의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결국 나라는 사람은 나를 채우는 소유는 나를 미성숙한 사람으로 머물게 한다. 그다음 단계가 성취(Doing)다. 나를 보여줄 수 있는 일을 하며 내가 이뤄낸 결과를 중요시 여기는 이 단계에는 내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 되는지, 그리고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자 하는 욕구가 가장 큰 시기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행위를 선택함에 있어 자기 자신의 의지보다는 남의 시선을 통해 자신을 평가하기 때문에 결국 자기 자신을 잃어버릴 수 있다. 마지막으로 존재(Being)의 단계에 이르게 된다. 소유나 행위가 아닌 존재가치에 중심을 두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에 대한 자각과 깨달음에 따라 행동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고 결코 소유나 성취를 저급하다고 하고 존재만이 고급이라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생존을 위한 소유나 나를 성장하게 할 성취를 충분히 경험하고 나서야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깊은 성찰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남보다 더 많은 물질을 갖고자 노력했으며 더 많은 일들을 통해 인정받기를 소망했으며 그러한 시간 속에 수많은 실패와 시행착오를 거듭했다. 그리고 나서야 ‘행복한 사람’이라는 존재가 내가 원하는 진정한 모습임을 깨닫고 나의 존재를 더욱 소중히 여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존재가 삶의 끝이 아니라 행복한 사람으로서 남의 시선이 아닌 내 마음을 따르며 ‘좋아하고 잘하는 일’에 집중하기 시작하니 내 행동(Doing)에 자유로워지기 시작했으며 그 행동으로 일어난 수많은 행복을 소유(Having)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Happy being으로서 삶을 자유롭게 살게 되었고 Human Being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이렇게 말을 하는 내가 완전하거나 내 삶이 언제나 만족스러울 것이란 생각은 큰 오산이다. 나는 자주 불안하고 그보다 더 자주 불행하며 행복을 느끼기 위해 수많은 고민과 시도를 해야 한다. 그렇게 남들과 똑같은 수준이 아닌 오히려 수많은 실패와 시련 사이에서 행복을 느끼기 위해 남들보다 더 치열한 삶을 살 뿐이라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실천가이자 행복실천강사가 된 것은 내가 제일 잘하는 W.A.N.T. 에 HAPPITS를 집어넣고 HAPPITS의 에너지로 W.A.N.T. 를 가동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행복한 삶을 생각할 때 불행이 함께 있으면 안 된다 착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전혀 그렇지 않다. 회복탄력성이나 안티프래질 같은 대단한 이론들이 결국 우리를 더욱 행복하고 강하게 이끌기 위해서 내 고통을 수용하는 단계를 요구하며 우리는 언제고 불행할 준비를 해야 하지만 행복을 만났을 때 더 자연스럽게 수용할 수 있음을 알려준다. 나는 불행하고 싶지는 않지만 불행할 준비가 되어 있고 그 불행 안에서도 꾸준히 행복을 찾을 수 있는 W.A.N.T. 를 가동하고 있다. 그리고 그 W.A.N.T. 를 가동하기 위해 아주 작은 행복 한 톨 한 톨도 잘 쓰고 만끽하고자 HAPPITS를 실천한다.
이 글을 쓰는 순간순간도 내 삶에는 수많은 불행과 행복이 교차하고 때로는 공존한다. 내가 할 일이라고는 내 시선을 행복으로 옮길 것인지 아니면 불행에 집중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이며 설령 불행을 선택한다 하더라도 그 뒤에 다가올 행복을 위해 기꺼이 불행의 시간을 짧게 통과하고자 행복을 잘 쓸 수 있게 행복태세를 갖추는 것뿐이다. 나는 원하는 일의 끝이 행복한 삶이라고 믿고 있으며 행복하게 사는 것을 원하기에 원하는 바를 이루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