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한글 학습 전, 운필력이 좋아져요!
영유아 몬테소리 교육을 공부하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이론 중 하나는 쓰기의 민감기에 대한 것이었어요.
만 3-4세에 쓰기의 민감기가 읽기의 민감기보다 선행한다.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던 저는 막연하게 읽기가 쓰기보다 쉽다고 생각했었고, 아마도 대부분의 어른들은 저와 비슷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몬테소리 이론에서는 읽기가 쓰기보다 쉬운 건, 초등학생 이상의 아이들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라는 거예요! 만 3-4세 아이들에게는 쓰기가 읽기보다 쉽다는 말이 얼마나 흥미롭던지요. 실제로 몬테소리 교육이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계기가 된 이론이기도 합니다. 몬테소리 여사와 조수 한 명이 50명이 넘는 만 3-6세 아이들을 한 교실에서 가르치는데, 그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읽기와 쓰기를 하게 된 사건이죠. 심지어 부모는 문맹이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궁금했어요. 정말 몬테소리 이론대로 만 3세 아이들이 쓰기를 좋아하고 쉽게 배울 수 있는지 말이죠. 그래서 야심차게 만 3세가 된 아들에게 이름 쓰기를 가르쳐주고 싶어서 ‘ㅊ’ 자를 알려주니, 전혀 따라쓰지를 못하고 지렁이만 그리더라고요. 처음엔 집중을 못해서인줄 알았다가 몇 일 지나니 확실히 알았어요. 아들 눈에는 모든 글자가 지렁이라는 사실을...
그 기분을 느껴보시고 싶다면 아래의 아랍어 문제를 보시면 됩니다. 수능 아랍어 문제 중 하나 입니다. 이 모양을 보고 기억해서 똑같이 쓸 수 있나요?
만 3-4세 아이들이 쓰기의 민감기이긴 하지만, 그것은 쓰기에 흥미를 느끼고 잘 배울 수 있다는 이야기이지 모양 인식을 어른처럼 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쓰기의 민감기
= 쓰기에 흥미를 가지고 있다.
= 쓰기를 체계적으로 가르치면 쉽게 배운다.
≠ 본 문자를 바로 따라 쓸 수 있다.
우리는 한글을 보고 따라 쓰는 것을 어렵다 생각하지 않지만, 그것이 가능하려면 아이들의 도형 인지 능력과 운필력이 충분히 발달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능력들 입니다.
한글을 쓰는 데 필요한 도형 인지 능력
- 직선과 동그라미를 인식한다.
- 직선의 방향(가로, 세로, 사선)을 인식한다.
- 한 도형을 기준으로 또 다른 도형이 어느 위치(오른쪽, 왼쪽, 위, 아래)에 있는지를 인지한다.
한글을 쓰는 데 필요한 운필력
- 원하는 위치에 도형을 그릴 수 있다.
- 원하는 크기로 도형을 그릴 수 있다.
- 직선을 원하는 방향으로 그릴 수 있다.
- 동그라미를 시계방향, 반시계방향으로 그릴 수 있다.
만 3세 아들을 키우면서 직선과 동그라미를 그리는 것조차 저절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아이가 방향을 인식하고 원하는 위치에 원하는 모양과 크기로 간단한 도형을 그려 내는 것이 얼마나 오래 걸리고 경이로운 일인지를 아이를 가르쳐보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이는 제가 만 3세 아들의 한글 쓰기 가르치기를 시도하자마자 가장 먼저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운필력을 먼저 길러주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한글을 배울 때에 한글의 모양도 배워야 하는데, 운필력이 부족하면 원하는대로 획이 그려지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한글의 모양에 대한 집중이 흐트러지는 모습이 상상되었기 때문입니다. 최소한 직선과 동그라미를 원하는 위치에 원하는 크기로 잘 그릴 수 있는 상태로 한글 교육에 들어가고 싶었어요.
문자 쓰기의 기초가 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연습이 먼저 되어야 합니다.
- 점에서 점으로 직선 잇기
- 점에서 점으로 산(반원) 그리기
- 한 점에서 다시 원점으로 동그라미 그리기
그리고 생각해낸 방법이 한글보다 숫자쓰기를 먼저 연습하는 것이었습니다. 숫자의 모양을 분석해보면, 직선(가로선, 세로선, 사선), 동그라미 등 한글 쓰기에 필요한 도형이 모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0-9의 숫자에는 한글 쓰기에 필요한 가로선, 세로선, 사선, 동그라미가 모두 들어있다.
숫자 쓰기를 한글 쓰기보다 먼저 가르치면서 운필력을 길러요.
만 3세 아이들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수 개념이 어느 정도 있고, 숫자도 읽을 수 있어요. 통문자 읽기가 가능한 시기이기 때문에 만약 아직 못 읽는다 해도 조금만 연습하면 금새 숫자의 모양을 인지하여 읽습니다. 0-9까지의 수는 개수도 10개 밖에 되지 않아 만 3세 아이들이라면 금새 익힐 거예요.
그러나 이미 알고 있는 모양임에도 만 3세 아이에게 막상 숫자를 써보라고 하면 잘 쓰지 못합니다. 자신이 원하는대로 모양을 그려내는 운필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아는 모양인 숫자를 쓰는 연습을 함으로써 운필력을 기르고 한글 쓰기의 기초를 다질 수 있어요.
만 3세 아이에게 숫자 쓰기가 한글 쓰기의 기초가 되는 이유
1. 이미 0-9까지의 수 개념을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가지고 있다.
2. 0-9까지의 숫자의 모양을 인지할 수 있다.(경험이 부족하여 못한다면 금새 인식하도록 가르칠 수 있다.)
3. 운필력이 부족하여 숫자의 모양을 인지하여 읽더라도 쓰기는 어렵다.
4. 숫자는 한글 쓰기에 필요한 도형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가로선, 세로선, 사선, 동그라미)
5. 개수가 0-9까지 10개 밖에 되지 않아 수개념이 있는 상태에서 연습하면 한글보다 더 빨리 숫자를 익힐 수 있다.
6. 숫자 쓰기 연습을 하면서 도형을 인지하는 능력과 운필력이 준비가 되어 한글이나 영어 알파벳의 모양을 더 쉽게 인지하고 쓰는 준비가 된다.
단,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숫자 쓰기는 수 개념이 생긴 이후에 하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이미 수개념이 있고, 0-9의 숫자를 눈으로 식별하여 읽을 수 있는 아이들에게는 0-9의 숫자 쓰기를 통해 운필력 기르기에 집중할 수 있으나, 수 개념이 없는 아이라면 운필력에만 집중하여 지도하기는 어렵습니다. 만 3세의 아이들은 촉각의 민감기에 있기 때문에 수개념이 생긴 후, 숫자쓰기를 하기 전에 0-9까지의 모래 숫자판에 손가락으로 숫자를 써보는 것도 좋습니다.
주의할 점 : 본 숫자 쓰기 활동은 수 개념과 관련이 없으므로, 0-9까지의 수 개념이 잡힌 아이들에게 추천한다. 사전활동으로 모래숫자도 추천한다.
보통 수 개념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은 만 2-3세 경부터이고, 쓰기의 민감기는 만 3-4세에 시작됩니다. 따라서 저희 아들처럼 수 개념은 있으나 숫자를 쓰지 못하는 만 3세 아이들이 정말 많을 것으로 예상이 됩니다. 시중에는 수 개념을 알려주면서 숫자쓰기를 연습할 수 있는 학습지가 이미 많습니다. 그런데 보통 수개념을 익히는 것에 집중하는 '수학' 학습지가 대부분입니다. 만 3.5세인 아들을 대상으로 숫자쓰기를 하고 싶어서 시중의 학습지들을 살펴보았을 때, 수 개념은 지나치게 쉽지만, 숫자 쓰기에 대한 안내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희 아들은 수 개념은 이미 있는 상태인데 운필력이 매우 부족한 상태라서 '쓰기'에 집중할 수 있는 숫자 쓰기 학습지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위해 '만 2-3세를 위한 숫자 쓰기 학습지'를 만들었습니다. 먼저 숫자를 디자인 하였습니다. 컴퓨터로 타이핑하는 숫자는 필기체와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1, 7, 9의 경우 우리가 손으로 쓰는 숫자의 모양과 조금 다릅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인식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모양(직선, 동그라미, 호)으로 분석해서 제시하고 싶었습니다.
그렇다면 운필력이 부족한 아이를 대상으로 숫자 쓰기 연습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대상 : 만 2.5세 이상, 0-9까지의 수 개념이 있고, 숫자를 식별할 수 있는 아이
목표 : 0-9까지의 숫자를 쓸 수 있다. 숫자 쓰기를 통해 가로선, 세로선, 동그라미, 호 그리기를 연습하여 한글 쓰기의 기초를 마련한다.
이미 수 개념이 있는 아이를 대상으로 숫자 쓰기를 통해 운필력을 기르는 것이 목적이라면, 0-9까지의 수를 차례대로 쓰기 보다는 비슷한 도형으로 묶어서 쓰게 하는 것이 더 효과적입니다.
조금 더 큰 연령의 아이이거나 운필력이 발달하여 숫자를 보고 바로 따라 쓸 수 있는 아이라면 숫자를 0부터 9까지 차례대로 쓰며 연습하는 것이 더 나을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보다 어린 연령의 운필력이 부족한 아이들은 아래에 소개하는 방법으로 숫자 쓰기를 하면 더 쉽게 쓸 수 있습니다.
참고로, 저희 아들은 이 활동을 처음 시작했을 때의 연령이 만 3.5세 였습니다. 점과 점을 연결하거나 직선이나 동그라미를 삐뚤빼뚤 커다랗게 그릴 수 있었어요. 작게 원하는 크기로 그리는 것은 어려웠고 손에 힘이 없어 글씨가 많이 흔들렸어요. 빈칸에 1과 0을 제외한 나머지 숫자를 쓰는 것은 힘들어 하였습니다. 수 개념은 있어서 10까지의 물건의 개수를 세고, 숫자를 읽을 수는 있었으나 쓰는 것은 불가능한 상태였지요. 이런 아이들에게 이 활동을 추천드립니다.
다음은 0-9까지의 숫자를 구성하고 있는 도형으로 분류한 것입니다.
직선으로 이루어진 숫자 : 1, 7, 4(쉬운 순서)
동그라미로 이루어진 숫자 : 0, 8
호로 이루어진 숫자 : 3
동그라미와 호로 이루어진 숫자 : 6
동그라미와 직선으로 이루어진 숫자 : 9
호와 직선으로 이루어진 숫자 : 2, 5
숫자 쓰기를 하는 순서에 정답은 없습니다만, 위 상자에 나열된 숫자의 순서로 쓰기 연습을 하면 운필력이 부족한 아이가 더 쉽게 숫자 쓰기를 배울 수 있습니다.
1은 누가 봐도 가장 쉬운 숫자이지요. 그러나 다음으로 오는 숫자 2는 쓰기 어려운 숫자에 속합니다. 곡선과 직선이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중간 즈음에 나오는 숫자 5는 더 어렵습니다. 운필력이 약한 아이가 결코한 번에 따라 쓸 수 없는 숫자 입니다. 만 3.5세에 저희 아들은 1을 제외한 모든 숫자 쓰기를 어려워했습니다. 0조차도, 커다란 원을 스케치북에 그릴 수는 있었지만, 작은 원을 빈칸에 그리는 것은 연습이 필요했어요. 하지만 전혀 못하던 것에 비해 배움의 속도는 생각보다 빨랐습니다. 쓰기의 민감기에 있기 때문에 조금만 연습하면 금새 배우더라고요!
만 2-3세 아이의 숫자 쓰기는 만 4-5세 아이의 숫자 쓰기와는 결이 다릅니다. 아이가 난생처음으로 도형을 조합하여 문자를 쓰는 법을 배운다는 것을 꼭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1. 아이가 그려야 하는 도형이 명확하고 쉬울 것
2. 시작점, 멈추어야 하는 점, 끝점을 알려줄 것
아들이 처음 숫자 쓰기(문자 자체가 처음!)를 할 때, 이 두 가지를 신경써서 5단계로 숫자 쓰기 연습을 하였습니다.
숫자 쓰기 연습의 4단계
1. 회색 선 위에 그대로 숫자를 따라 쓰는 단계
2. 점선을 연결하여 숫자를 쓰는 단계
3. 시작점, 멈추는 점, 끝점을 인식하고 연결하며 회색 선 위에 숫자를 쓰는 단계
4. 회색 선 없이 시작점, 멈추는 점, 끝점을 연결하여 숫자를 쓰는 단계
5. 빈칸에 시작점, 멈추는 점, 끝점을 생각하며 숫자를 쓰는 단계
숫자 '3'을 예로 들겠습니다. '3'은 모양을 분석하면 호 두개로 이루어져 있지요. 빨간 점은 시작점입니다. 1단계에서 아이는 빨간점에서 시작하여 회색 선을 따라 3을 써보게 됩니다. 2단계에서 아이는 빨간점에서 시작하여 점과 점을 연결하며 3의 모양을 인식하며 씁니다. 3단계는 2단계보다 점이 많이 생략되었습니다. 그래서 인도가 필요합니다. 따라서 빨간점에서 시작하여 회색선을 따라 멈추는 점인 까만점까지 호 1개를 그리고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호 1개를 더 그리며 끝점까지 이동합니다. 3단계와 1단계가 다른 점은 '멈추는 점'과 '끝점'을 인식하며 연습한다는 점입니다. 1단계에서는 회색선을 그냥 따라가며 숫자의 모양을 탐색했다면, 3단계에서는 그 숫자의 모양을 분석하여 두 개의 도형(호 2개)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파악하고, 1,2단계처럼 천천히 따라 그리는 것이 아니라 호 2개를 1번 멈추면서 단번에 그려내야 합니다. 4단계에서는 3단계의 회색선이 사라지고 기준점 3개만 남습니다. 이 기준점을 호 2개로 연결하며 3을 그립니다. 마지막 5단계는 빈칸입니다. 스스로 시작점, 멈추는 점, 끝점을 생각하며 '3'을 씁니다.
연습은 될 때까지! 학습지 1장으로는 부족합니다. 여러 장 프린트해서 익숙해질 때까지 연습하였습니다. 그리고 처음 1,2단계는 쉽기 때문에 3,4단계 위주로 더 뽑아서 연습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학습지를 구상하였습니다.
저의 글을 꾸준히 읽어주신 독자님들은 아시다시피, 저는 '자기주도학습'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학습지를 만들 때에도 항상 그것을 염두에 두고 있어요. 시작점, 멈추는 점, 끝점을 제시한 이유도 같은 맥락입니다. 학습지 한 장을 풀더라도 아이가 스스로 할 수 있도록 고심하였습니다. 스스로 하면서도 획순을 처음부터 정확하게 인식하고 쓰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지요.
이 방법으로 아들은 운필력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원하는 모양을 원하는 위치에 그리는 능력이 많이 발전했어요. 손 힘도 많이 길러졌지요. 신기한 것은, 숫자 쓰기를 열심히 했을 뿐인데 그림을 예전보다 잘 그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만 6세 이전의 영유아 교육의 신기한 점 중에 하나인 것 같아요. 하나의 영역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하나의 영역이 발달하면 다른 영역에 엄청난 영향을 미칩니다. 언어와 수학, 미술을 가르치다보면 연결된 부분이 많다고 느끼게 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