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I 보다 E로 보였던 까닭

인생은 자세에 관한 모든 것_J

by JMJ

골프 할 때 쓰나 보다 했던 K의 장갑이 늘 눈에 띄긴 했었다. 손바닥 면이 거뭇하게 변한 흰 양피장갑 한 짝이 책장 한편에 올려져 있곤 했고, 때때로 온라인으로 주문한 장갑이 택배로 도착했다. 하지만 눈에 띈 골프 장갑이 줄곧 왼쪽 하나였다는 거나, 꽤나 수시로 새 장갑을 사는 이유 등을 인지하게 된 건 내가 직접 골프 연습을 시작하고 나서였다. 골프채 그립에 닿는 장갑 바닥은 생각보다 금방 새카매지는 거더라.


골프를 시작하고 가장 먼저 갖게 된 골프 용품이 왼손 장갑이다. 7번 아이언도, 드라이버도 두 달 넘게 연습장에 비치된 레슨용을 사용했지만 장갑 한 짝만은 처음부터 내 것이 생겼다. 연습장 신규 등록을 하면서 사은품으로 받은 장갑 한 짝을 연습하러 갈 때마다 빠짐없이 가방에 쏙 챙겨 넣는다. 골프 장갑은 손에 꼭 맞게 낀다는 것과 기본적으로 왼손에만 착용하면 된다는 걸 처음 알게 됐다. 내 장갑 사이즈는 20호. 손목에서 가운데 손가락 끝까지 길이가 대략 17~17.5cm 정도 되는 크기다. 한겨울 추운 날씨에도 어지간해선 장갑을 끼지 않는 내게 골프 장갑은 그만큼 특이 용품인데, 연습에 앞서 왼손 딱 맞게 장갑을 낄 때마다 마치 작은 룰 하나를 수행하는 기분이다.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 당시 숙녀들이 외출할 때 반드시 양이나 송아지 가죽 장갑을 끼고 나갔다는 사실도 슬쩍 떠오르고 말이다.


장갑 착용도 그렇지만 골프 클럽을 쥐는 방법은 훨씬 새롭다. 흔히 사용하는 방식들인 '인터로킹'이나 '오버래핑' 그립법을 나도 배웠다. 오른손잡이는 먼저 왼손으로 클럽을 쥐고 그 위로 오른손을 감싸 쥔다. 예컨대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왼손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서 양손을 완전히 결속하는 방식(인터로킹)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으면 모를 거였다. 이처럼 골프채와 신체가 일체감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드는 안정적 그립을 위해 왼손에 장갑을 끼는 게 골퍼의 기본 룰이다. 연습 날이 차곡차곡 더해질수록 나의 흰 장갑은 검게 변해간다. 벤 호건 “좋은 골프는 올바른 그립에서 시작된다”고 말했는데, 오늘도 되새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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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를 하려 하니 모르는 것 투성이다. 아니, 알아야 할 게 많아졌다. 골프를 안 한다면 계속 몰라도 되지만 하고자 한다면 알아야 된다. 배워야 할 게 많아진 거다. 사실 용어부터 죄다 생소하다. 예컨대 티잉 구역(티잉 에어리어) 바닥에 티(tee)를 꽂은 뒤 그 위에 볼을 올려놓고 치는 걸 ‘티 샷’이라고 한다. 이건 기본 중에 기본이다. 연습장에서도 아이언과 드라이버에 따라 티 높이를 각각 다르게 조정하다 보니 어느새 익숙해진 용어 ‘티’는 알고 보니 K가 늘 필드에 나가면서 양껏 챙겨가던 골프 용품 이름이었다. 대못처럼 생겼는데, 쉽게 말해 볼 받침대다. 골퍼가 아니라면 일상에서 거론할 리 없는 단어라 몰랐을 수밖에. 역시 뭘 새로 배우면 새로 배우는 말도 생긴다. 쓰는 언어가 확장되면 세상이 더 넓어지고……요즘 나는 책장에서 골프책을 골라 읽고 유튜브에서도 골프 콘텐츠를 클릭한다. 박세리 감독의 유튜브가 그리 재밌을 줄이야. 뒤늦게 구독자가 됐다.


생경한 골프 용어들을 단어 공부하듯 외우다가 유독 골프 매너에 관련된 말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됐다. 엄밀히 말하자면 ‘비매너 플레이’를 지칭하는 관용어들이다. 하긴 골프가 태생적으로 신사의 품위와 교양을 드러내는 놀이였단 점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골프는 15세기 중엽 스코틀랜드에서 귀족 스포츠로 시작됐고, 영국에서 교양을 갖춘 중산층 이상의 신사들이 즐기는 주요 스포츠로 자리매김했다. 기본 룰과 예의를 지키지 않는 비신사적 행위는 품위와 거리가 멀어 경계의 대상이었을 것. 아직 필드 경험이 없지만 ‘알까기’‘풋 웨지’, ‘핸드 웨지’와 같은 반칙 사례들을 글로 접했다. 분실된 볼 대신 새 볼을 몰래 떨어뜨리거나 클럽이나 발, 또는 손으로 볼을 살짝 건드려서 치기 좋은 위치로 옮기는 속임수들이다. 아무리 가벼운 마음으로 임하는 친목 골프라도 동반자들 몰래 자신에게 유리한 얌체 짓을 일삼는다면 매너 좋은 플레이어가 되긴 글렀다. 막상 필드에 나가보면 이런 유혹을 물리치기 어려울까? 지금으로선 그런 꼼수로 점수를 얻어봐야 기분 좋을 것 같지가 않은데 말이다.


애초에 관심사에서 골프를 제쳐둔 데는 나름 이유가 있었다. 골프는 곧 사회생활의 연장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대부분 4명이 함께 필드로 향하는 게 골프였다. 기자 일에, 회사 생활에 치여 살 때는 휴일까지 사람들과 어울려 단체 운동을 한다는 게 생각만으로도 버겁게 느껴졌다. 사교나 일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 있는 날이 얼마나 소중했던가. 골프 자체의 매력을 생각하기도 전에 나는 그 형식부터 부담스러웠다. 물론 요즘은 하루빨리 기본기를 닦아 마음 맞는 사람들과 초록 잔디를 누빌 생각에 다소 들뜨기도 하지만. 아무튼 골프가 곧 일이나 의무처럼 여겨질 염려가 없어졌다는 사실이 나로 하여금 골프를 다시 보게 만든 측면이 있다, 분명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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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MBTI를 밝히자면 나는 INTJ이다. K와 똑같다. 내가 보는 나는 내향형(I) 기질이 더 강하다. 하지만 그간 주변에선 기자로서의 나를 외향형(E)에 훨씬 가깝게 보는 편이었다. 글쎄, 기자일을 하는 데 보다 유리한 성향을 최대한 개발하려고 노력했을 뿐이라고 설명하겠다. ‘숨은 나를 찾는 법’이라는 제목으로 관련 내용을 다룬 콘텐츠를 유튜브에 올리기도 했었는데 내 채널에선 상대적으로 좋은 반응을 얻은 영상이다. 일하면서 필요했던 나름의 룰과 자세, 그러니까 ‘애티튜드’를 배워 온 과정이 있었다. 때론 내게 없거나 부족한 성향조차 노력하다 보니 웬만큼 얻을 수 있었다. 취재원의 마음을 열고 얘기를 듣기 위해서 적절한 화제 찾기에 골몰하고 언제나 먼저 말 걸기를 시도했던 노력이 나를 ‘I’ 보다는 ‘E’로 보이게 했던 것 같다. 타고나기보다는 애쓴 결과였다. 대화를 자연스럽게 이어가기 위해 끊임없이 적절한 얘깃거리를 찾는 건 아주 적극적으로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가능해지는 일이다.


살면서 필요한 룰과 애티튜드는 배워가는 것이다. 타고나길 현명하고 좋은 사람인 경우도 있겠지만, 생각보다 개인은 그리 훌륭하지 않다. 서로가 서로의 힘으로 깎이고 다듬어지는 과정을 거쳐 더 좋은 사람, 더 매너 있는 존재로 거듭나게 된다. 오직 홀로 살아갈 순 없기에 노력할 수밖에 없는 일도 생긴다. 그렇게 애쓰다 보면 때로는 본연의 MBTI를 넘어서 또 다른 사람이 되기도 한다. 당연히 I도, E도 골프를 즐길 수 있다. 정적인 운동이라서 좋아할 수도 있고, 사교적인 운동이라서 좋아할 수도 있다. 역시 중요한 건 낯선 골프 룰과 에티켓을 배우려는 애티튜드가 아닐까 싶다. 하나 더 알게 되어 하나 더 행하는 기쁨은 생각보다 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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