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나타샤의 왈츠처럼

폼생폼사 인생_J

by JMJ

연습 시작 두 달여 만에 골프 클럽을 장만했다. 그동안은 연습장에 비치된 레슨용 아이언과 드라이버를 이용했는데 이제 오직 나만의 골프채가 생긴 거다. 골프 룰에 따라 필드에서 소지할 수 있는 클럽 수는 14개까지다. 나는 일단 드라이버, 유틸리티, 아이언, 퍼터 등을 종류별로 구성해 10개를 마련했다. 와인 톤 클럽들이다. 짙은 핏빛 빨강은 네일 컬러로도 유독 즐기는 색상인데, 손톱에 바르면 왠지 열정과 에너지가 샘솟는 느낌이다. 실제로 빨강은 심장박동 수를 높이고 혈액 순환을 자극해 몸 온도를 높이는 색상이라고 한다. 대회 마지막날 꼭 빨간색 셔츠를 입는 골프황제 타이거 우즈도 “힘을 주는 색깔이 빨강”이라고 했다. 태국 출신 어머니가 태국에서 기운을 북돋는 ‘파워 컬러’로 간주되는 빨간색이 행운을 준다고 믿은 데서 우즈의 ‘선데이 레드’ 전설이 비롯됐다는 얘기를 읽었다. 아무튼 내가 좋아하는 빨강은 다소 채도가 낮은 포도주 빛깔이지만 나에겐 분명 파워 컬러다. 내 소유의 클럽이 생기니 마치 나만의 무기를 얻은 기분이다. 정말 골퍼가 된 것 같다!


새로 산 드라이버를 깠다. 클럽 헤드와 샤프트를 감싸고 있는 비닐 포장을 조심조심 벗겼다. 살포시 두 손에 쥐고 어드레스를 취했다. 레슨용 공용채를 잡고 휘두를 때의 마음과 이렇게 다를 수가. 볼을 잘못 쳐서 행여 새 장비가 망가질 까봐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하지만 원래 노심초사하면 더 잘 안 되는 법. 뒤땅에, 탑볼에, 클럽을 망가뜨리고 말 것 같은 미스샷들이 이어진다. 한번 치고 혹시 헤드가 까진 건 아닌지를 살피는 내가 스스로도 어이없다. 거의 주객전도 꼴이다. 아무래도 골프채 값이 꽤 비싸다는 사실을 곱씹는 모양이다. 그래도 어쩌겠나……. 에라,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확확 휘두르기 시작했다. 헤드가 크고 샤프트가 긴 드라이버는 그야말로 휘두르는 맛이 있다. 아이언 샷보다 볼의 비거리도 커지기 때문에 한층 흥도 나고 말이다. 타격감과 타구음이 동시에 좋으면 골린이는 금방 자뻑 모드가 된다는 걸 아시는지? 캬...... 멋지다, 민진아! 말하자면, 언제 어디서나 ‘길은 멀어도 마음만은 프로답게’가 나의 모토다.


골프를 시작하고 의외로 심연의 욕구가 충족되고 있다. 만약 다시 태어나서 다른 삶을 선택할 수 있다면 댄서가 되고 싶다는 게 은밀한 소망인데, 골프 스윙을 하면서 마치 내가 무희가 된 듯한 순간을 맛보게 되는 거다. (오해 없기를, 나는 춤을 못 춘다. 그래서 다음 생 소망이다.) 예컨대 허리를 한껏 꺾으며 팔을 뻗어 올려 완성하는 피니시 동작은 마치 무희의 정지된 포즈에 비견할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허리를 꺾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 레슨 때마다 임팩트 후에도 머리를 고정하라는 주의를 받는데, 볼을 치고도 금방 고개를 들지 않고 멈춰서 중심 잡는 연습을 하다 보면 왠지 세련된 포즈 하나를 구현하는 예술가가 된 것만 같다. 이른바 골프 동작 7단계, ‘어드레스-테이크어웨이-백스윙톱-트랜지션-다운스윙-임팩트-팔로우스루’까지는 불과 몇 초에 불과하지만 나름대로는 아주 짧은 춤을 춘 느낌이라고 할까? 어쨌든 몸을 움직인 거니까 말이다. 기사를 쓰든, 글을 쓰든, 주로 머리를 쓰는 일을 하며 살아온 내게는 아무래도 몸으로 하는 일에 대한 동경이 있는 것 같다. 스윙할 때 코어 힘을 써 허리를 잘 돌리는 게 중요하다는 걸 염두에 두고 열심히 연습하다 보면 왠지 허리가 가늘어지는 착각(?)도 들어서 신난다. 언젠가 연습장에서 내 스윙을 지켜본 K가 “뭐, 폼은 좋아!”라며 대충 격려성 멘트를 날린 적이 있었다. 마치 춤 실력을 인정받은 듯한 착각에 빠져 흐뭇했던 사람이 나다.


waltz-7900890_1280.jpg


초심자로서, 혹시 나 말고도 골프 하면서 나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까 궁금했다. 아닌 게 아니라, 최근 본 골프 다큐에서 "골프는 춤을 추듯 해야 한다"는 대사가 나오는 게 아닌가. 세계 주니어 골프대회를 다룬 ‘더 쇼트 게임’을 보다가 골프가 “굉장히 부드럽고 리듬을 타는 스포츠, 왈츠와 같다”는 말을 듣는 순간 역시 내 감이 꽤 쓸 만하다는 자뻑 모드에 또 한 번 빠지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레슨 때도 마음속으로 ‘하나, 둘, 셋’하며 스윙해 보라는 조언을 받았었다. 어드레스 이후 백스윙톱을 거쳐 임팩트까지 이어질 때 너무 조급히 서두르다가 엎어 치지 말라는 취지였다. 멀리 치고 싶은 마음에 나도 모르게 백스윙이 빨라지거나 오버스윙 하게 되면서 되려 미스샷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3박자의 경쾌한 춤곡, 왈츠를 연상해 보자. 나비가 춤을 추듯 부드럽게 스윙, 스윙. 아, 그래서 연습장 백그라운드 뮤직(BGM)이 느린 발라드일 때 볼이 더 잘 맞았던 것인가. “그리움이 쫓아 사랑은 늘 도망가~잠시 쉬어 가면 좋을 텐데~”라며 임영웅이 부르는 ‘사랑은 늘 도망가’가 흘렀을 때 내 몸짓도, 타구감도 훨씬 부드럽고 청량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굿 샷과 왈츠 사이엔 교집합이 있었구나.


red-wine-8744058_1280.png


춤에 소질은 없지만 왈츠 곡을 좋아한다. 집에 있을 때 자주 틀어두는 BGM 중 하나도 쇼스타코비치 왈츠 2번이다. 레드 와인 한 잔 들고 이 음악을 듣노라면 혼자서도 폼생폼사가 따로 없다. 허세? 뭐, 어차피 이런 맛에 세상 사는 거 아닌가 싶다. 와인과 음악으로 적당히 기분이 고조되면 책 한 권 뽑아 들어도 좋다. 기왕이면 고전 문학 한 편에 심취해 보자. 그럼 극강의 폼생폼사다. 내가 고른 책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다 끝내려면 3천 쪽쯤 읽어야 하는 대장정이지만 폼생폼사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야심 차게 시작한다. ‘현대판 일리아스’라는 명성답게 전쟁과 사랑의 장대한 서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오, 2권 3부 17장에서 나타샤가 왈츠를 춘다! 옛 영화에서 오드리 헵번이 나타샤로 분해 춤췄던 명장면이 있다. 익숙한 왈츠 곡이 활자 사이로 넘쳐흐른다. 자, 와인 한 모금 머금고... 음악 플레이. 19세기 초 프랑스 황제였던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시기가 배경이다. 전장에 나갔다가 부상당하면서 허무주의에 빠진 러시아 귀족 청년 안드레이는 생명력 넘치는 나타샤에게 매혹된다. “나타샤가 춤 신청을 받고 생긋 웃으며 일어나 홀을 누비며 춤을 출 때면 안드레이 공작은 특히 그 수줍음 어린 우아함에 넋을 잃었다.” 나타샤도 난생처음 참석한 큰 무도회에서 안드레이와 왈츠를 추면서 미처 느껴보지 못한 행복에 젖는다. 수줍음을 극복하고 우아하고 행복한 스윙을 바라는 나, 지금부턴 왈츠 추는 나타샤를 떠올리기로 함.


인생과 춤을 연상케 하는 골프를 하면서 아름다움도 추구해보고 싶다. 예술 점수가 없다 해도 예술적으로 우아한 샷을 해보고 싶다. 때론 검을 휘두르는 여전사처럼, 때론 나비 같은 무희처럼 나만의 인생 샷을 뽐내고 싶은 꿈. 탁, 탁, 탁…… 연습장을 울리는 맑고 묵직한 타구음을 3박자 응원인양 여겨본다. 아직은 나비가 아니지만, 나비를 꿈꾸며, 이미 나비가 된 것처럼 생각하기. 오렌지 색 조명 아래서 와인과 실버로 물든 클럽 헤드가 영롱하게 빛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