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 전에 예감_J
대략 20년째 아침 루틴 중 하나가 체중계에 올라서는 것이다. 2~3킬로그램쯤 오르내렸지만 큰 변화 없이 일정한 체중을 유지하는 데 도움 되는 방법이 있다면 이것 같다. 어제보다 많이 늘었다면 오늘은 좀 덜 먹고 더 많이 움직이려고 노력한다. 그러면 내일은 그 격차가 줄거나 원상회복되기도 하니까. 오랜 습관은 감으로 이어진다. 사실 나는 이제 체중계에 올라서기도 전에 얼마쯤 늘고 줄었을지를 거의 비슷하게 알아챈다. 스스로 느끼는 가볍고 무거운 정도에 따라서 500그램 정도의 차이까지 구별해 낼 수 있다. 물론 전날 평소보다 열량 섭취가 많았다는 객관적 팩트에 기반하면 합리적 추론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컨디션과 무게에 대한 경험치로 수치를 짐작한다. 경험이 축적되면 예감이 발달한다. 결과를 보지 않고도 예리하게 예측할 수 있게 된다.
골프도 연습할수록 감이 온다. 연습장에서 몇 달 연습한 경험만으로 말한다는 게 다소 멋쩍지만, 볼을 치는 순간의 타구음으로도 볼이 어느 정도로 멀리, 얼마나 제대로 페어웨이에 안착할지 대충 알 것 같다. 그러니 앞으로 골프 하는 날들이 쌓여가면 나의 ‘골프 예감’ 또한 ‘체중 예감’에 필적할 만큼 일취월장하지 않을까 싶다. 음… 요즘 내가 좋아하는 감이 있다면, 임팩트 때 볼이 클럽 헤드 페이스에 착착 붙는 느낌! 쫀득쫀득 찰떡 한가운데를 정확하게 메로 치는 것 같다고 할까? 하긴 내가 정말 찰떡을 메로 쳐 본 적이 없는 것 같긴 하지만서도. 아무튼 볼을 치는 순간 “착” 하고 감기는 청량감이 느껴지면 지금 이 볼이 꽤 멀리, 곧게 날아가고 있다는 걸 예상할 수 있다. 물론 내 수준에서 그렇단 얘기다. 예감은 거의 틀리지 않는다. “엑설런트”나 “나이스 샷”을 외치는 AI 소리와 함께 볼은 페어웨이에 잘 안착한다. 오늘 연습 때도 89미터를 날리고 “엑설런트”를 받았다. 청량한 타구음, 찹쌀떡 느낌이 났다. 이런 걸 ‘정타’라고 그러겠지, 후훗.
반면 치는 순간, 그러니까 클럽 헤드가 볼에 닿는 순간 곧장 ‘미스샷’을 직감하기도 한다. 골프 용어로 토핑(Topping)이라던데, 볼 윗부분을 치는 경우다. 레슨 프로는 “미스샷을 해도 괜찮지만 왜 미스샷이 됐는지 이유를 아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하는데 토핑을 하면 그 느낌이 온다. 짧은 경험을 반추해 보자면, 몸과 볼 사이 거리가 적정 수준보다 짧거나 손과 팔에 힘이 과하게 들어갔을 때 볼 위를 치게 됐다. 물론 아예 바닥을 내리찍는 경우도 생긴다. 당연히 두 경우 모두 ‘감’이 안 좋다. 타격감이 안 좋으면 손이 아프다. 속 터지는 마음이 나도 모르게 “에잇!” 같은 감탄사로 새 나온다. 연습장에서 연습만 하다가 처음으로 정식 라운드에 나가면 ‘볼을 띄우기만 해도 성공’이라고들 한다. 골프 볼 무게는 약 45그램. 이토록 가벼운 볼을 제대로 뜨게 하는 것조차 어려울 거라니 초심자 처지에선 지레 주눅이 들고 만다. 어쨌든 토핑하지 말자. 토핑하면 볼이 못 뜬다. 볼이 클럽 페이스의 중심부, 스위트 스폿(Sweet Spot)에 ‘찰싹’ 부드럽게 맞는 느낌이 와야 된다. 이 느낌을 나는 ‘찹쌀떡 예감’이라고 명명한다!
체중을 예측하는 것과 굿 샷을 예감하는 건 모두 경험의 산물이다. 18세기 영국 경험론자 존 로크는 “우리가 아는 모든 건 경험에서 비롯한다”고 주장했다. ‘백지 이론’이다. 나는 백지요, 나의 지난 경험들은 데이터다. 백지 위에 데이터가 입력된다. 예측을 잘한다면 그간 쌓인 데이터가 풍부하기 때문이다. 경험이 축적될수록 예감의 질이 좋아진다. 데이터로서의 경험을 신뢰하기에 나는 축적된 경험에 의지한다. 문득 떠오르는 영화 한 편. 멋진 브래드 피트 주연의 야구 영화 ‘머니볼’(2011년)은 야구를 모르는 내게도 무척 인상적이었다. 브래드 피트가 연기한 빌리 빈 단장은 메이저리그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의 성공 신화를 이끈 실존 인물이다. 몸값 비싼 스타플레이어 대신 출루율 좋은 선수들을 모았다. 경기 데이터와 통계에만 의존해 팀을 꾸린 전략이었다. 결과는 2002년 메이저리그 20연승, 역대 최고 기록을 냈다. 풍부한 데이터는 결과 예측으로 이어진다. 많은 경험에 따른 예감은 단순한 예감이 아니다. 필연적 결과를 유추하는 일이다. 나는 경험의 총체인 나를 통해서 세상을 읽는다.
'머니볼'(2011) 영화 포스터
다만 짚고 넘어가야 할 것도 있다. 경험은 결국 과거의 것이란 것. 데이터는 그래봐야 지난 일에 대한 설명일 뿐이란 한계가 있다. 기왕 야구 영화 얘기를 꺼냈으니 야구 책 한 대목도 소개한다. 60여 년간 저명한 야구 기자로 일했던 20세기 미국 저널리스트 레너드 코페트는 ‘야구란 무엇인가’라는 저서에서 이렇게 썼다. “통계는 앞으로 해낼 일의 능률을 재는 잣대가 아니라 이미 지나간 일의 효능을 잰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야구 통계를 다룬 챕터에서 코페트는 통계의 맹점을 역설한다. 주변 환경에 따라 좌우되게 마련인 인간의 성취도를 단순한 숫자로 환산하는 건 불합리한 측면이 있다는 얘기다. 동의할 수 있다. 지난 경험에 미뤄 예감하고 예측하지만 언제나 맞아떨어지진 않음을 경험했다. 예상치 못했던 일도 생긴다. 변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예측에 실패한다. 불완전한 우리의 미래는 과거와 현재 이상일 수 있다. 미래는 지난 경험과 데이터와 통계 이상일 가능성이 언제나 있다.
가끔은 나의 예감이, 예측이 틀리기를 바랄 때가 있다. 공부를 덜했어도 운이 좋아서 시험을 잘 보게 되기를 바라고, 신데렐라에게 호박마차와 유리구두를 갖다 준 요정과 흡사한 귀인이 나타나 생각지도 못했던 도움을 주면 좋겠다는 얼빠진 몽상을 하면서 말이다. 기적 같은 행운을 꿈꾼다. 뜻밖의 기쁨 ‘세렌디피티’(serendipity)를 원한다. 충실한 경험론자인 나는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했던 행운을 갈구한다. 경험한 적 없는 기분 좋은 우연을 경험해보고 싶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을 나는 믿는 편이다. 가장 맘 편한 논리이기 때문이다. 설령 당장이 아닐지라도 언젠가 알맞은 보상이 있으리라 생각하면 힘들어도 불평을 덜 수 있다. 골프를 잘하고 싶은 나는 성실하게 연습할 것이다. 다만 변수도 희망한다. 노력 이상의 성과와 기대 이상의 행운을 두 팔 벌려 환영한다. 믿음과 별개로, 인생이 매사 합리적인 건 아니지 않던가. 예감할 순 있어도 확신할 순 없는 미래가 세렌디피티로 점철되면 좋겠다. 골프에서든, 어디에서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