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행선의 교점 # 92 (완)

by 청화

폭우를 뚫고 앞으로 나아간다. 빗방울이 쉴 새 없이 온몸에 부딪친다. 피부 곳곳에서 거친 자극이 어지러이 오른다. 끝없이 이어지는 감각을 따라 양팔을 들어 어께에서부터 손가락 끝까지 살핀다. 그 자리에 있던 상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나는 비로소 걸음을 멈추고 빗방울들이 그리는 궤적을 눈으로 좇는다. 비는 사선을 따라 내려 거세게 땅으로 떨어진다. 작은 흠집 하나 남지 않는다. 물방울은 그 자리에서 깨져 흩어질 뿐이다. 나는 마음을 다잡으며 멀리 응시한다. 장대비와 어둠에 가리어진 도심 위로, 순간 날카로운 섬광이 번쩍이며 하늘을 찢는다. 암흑 속에 숨어 있던 공원의 녹음이 빛을 띠고 잠시 모습을 드러낸다. 이내 어둠 속으로 숨는다. 뒤늦게 천둥소리가 멀거니 울린다. 힘없이 사라진다. 나는 다시 한 발자국을 내딛어보지만 결국 우두커니 서고 만다. 괴괴한 하늘 아래로 수많은 물방울이 자유롭게 추락한다. 도시는 어딘가로 향하는 길을 숨기고 있는 것처럼 비밀스레 어둡다. 땅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든 것을 품는다.


바로 앞에서 그녀가 비를 맞으며 눈물을 흘린다. 그녀는 분명 내가 우산을 들고 찾아오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우산이 없어 비를 막을 길이 없다. 내가 서 있을 여백조차 없다. 이토록 쉬운 문제인 줄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내게 우산이 없어도 괜찮다. 차라리 그녀의 곁에서 함께 비를 맞을 것이다. 함께 비를 올려다볼 것이다. 다시 한 번 그녀와 함께 빗속을 달릴 것이다. 굳게 다짐하며 주위를 둘러본다. 눈에 닿는 모든 곳이 한 점으로 모인다. 여전히 나는 주저한다. 무수히 많은 빗방울이 평행한 직선을 그리며 세상을 수도 없이 분할한다. 이번에도 그녀에게 다가가지 못하도록 나를 옭아맨다. 나는 온몸으로 고작 몇 개의 직선을 막아선다. 빗줄기가 내게 들이칠 때마다 조용히 읊조린다. 나는 강하다. 나는 단단하다. 똑같은 말을 몇 번이나 되뇌다가 겨우 한 곳을 응시한다. 저 멀리 붉은빛 십자가가 선명하다.


과거를 머금은 빗줄기가 피부를 두드린다. 온몸이 떨려온다. 기억이 되살아난다. 끊길 듯 말 듯 이어진다. 그녀와 약속한 적이 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기억을 바꿀 수는 없다. 기억은 서로 강하게 연결되어 나를 이끈다. 빗소리마저 나를 부추긴다. 나는 습기 가득한 숨을 가슴 터질 듯이 들이마신다. 힘겹게 한 발을 뗀다. 증명을 시작한다.


비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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