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점수와 예상 성적은 바로 공지됐다. 교수는 학생들을 한 명씩 불러내 시험지와 성적을 확인시켰다. 학생들은 차례로 강단 앞으로 나갔다가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강의실 안으로 탄식 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고등학교 3학년 9월 평가원 모의고사 가채점을 한 직후의 교실처럼 싸늘하고 겸허히 받아들이는 탄식이었다. 나는 예상보다 좋은 성적을 받았다. 다행이었다. 교수는 성적확인을 마치고 우리에게 추가로 공지사항을 알렸다. 이번 주부터 1학기 지도교수 면담이 있으니 학과사무실 앞 게시판에서 각자의 면담교수를 확인할 것을 권했다.
재준과 나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학과사무실 앞으로 갔다. 우리의 면담교수는 서로 달랐다. 나의 면담교수는 방금 들었던 강의에 교수였다. 이미 얼굴을 알고 있는 교수였으므로 내심 안도했다. 마침 교수가 면담 가능한 시간이었다. 나는 재준에게 인사를 하고 바로 서늘한 복도를 따라 들어갔다. 교수의 연구실 앞에 서서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네, 들어오세요.”
천천히 문을 열었다. 교수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나를 응대했다. 연구실은 생각보다 지저분했다. 창을 제외한 벽면은 모두 서가였고, 두꺼운 책들이 가득 꽂혀 있었다. 창 바로 앞에는 넓은 책상이 하나 있었는데, 책상 위에도 두터운 책들이 쌓여 있었다.
교수는 책상 바로 앞에 놓인 의자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 “앉으세요.”
나는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교수는 책상을 돌아 들어가 나를 마주 보고 앉았다. 그 옆으로 창가에서 엷은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교수는 책상 위의 책과 서류들을 한쪽으로 치우면서 말을 붙였다.
“어떻게 왔나요?”
“면담 때문에 왔습니다.”
“좋습니다. 잘 왔어요.” 교수가 내 얼굴을 빤히 살폈다. “제 수업을 듣는 학생인가요? 얼굴이 낯이 익네요. 아, 그래요 맨 뒤에 앉는 학생이죠?” 맨 뒤에 앉는 일이 큰 잘못도 아니지만, 나는 다소 겸연쩍어 시선을 아래로 피하며 그렇다고 답했다. “이름이 뭔가요?”
“한영수입니다.”
“한영수. 가만 보자.” 교수는 자신만 볼 수 있는 컴퓨터 모니터를 살피며 마우스를 몇 번 클릭했다. 무언가를 찾는 것 같았다. “제 과목 성적이 좋군요.”
“얼마나 좋은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음. 어디 보자……. 이 등이네요.” 나는 속으로 꽤나 놀라 교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정정기간이 있겠지만, 아마 바뀌지는 않을 것 같군요.”
“감사합니다.”
“감사하긴요. 학생이 제 강의를 듣고 시험을 잘 봤으니 내가 감사할 일이죠. 강의는 따라올 만 한가요?”
“어렵기는 하지만,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사실 쉽지는 않죠. 수학과에 처음 와서 학생들이 제일 힘들어하는 부분이 뭔지 아나요?” 나는 말없이 교수의 말을 기다렸다. “지금까지 했던 수학이랑 수학과에서 하는 수학이랑 많이 달라 혼란스러워하더군요. 모든 학문이 다 어렵지만, 어려운 방식은 다르죠. 제가 생각하기에 수학의 어려움은 엄격함에 있어요. 약속한 언어 안에서 논리적인 방식을 따라야 하니까요. 때로는 너무 차갑고, 때로는 너무 딱딱하죠. 한영수 학생도 알고 있듯이 수학은 정의에서 시작하죠. Definition. 혹시 Definite의 어원을 알고 있나요?”
나는 잠시 눈을 굴리며 고민하는 척을 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접두사 de가 붙었고, 그 뒤의 어원은 제한하다. 한계를 짓다. 경계를 만들다. 구분하다. 뭐, 그런 뜻이랍니다. 정의는 정확하게 구분하는 일이죠. 그렇게 하지 않고는 우리가 서로 명확하게 의사소통할 수 없어요.”
나는 어렵게 교수와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있나요? 이상한 표현일지 모르겠지만, 숫자는 인류에게 널리 쓰인 최초의 비유와 상징이기도 하죠. 어느 누구도 수를 직접 본 적이 없어요. 우리는 숫자를 볼 뿐입니다. 수는 관념의 세상에 있어요. 숫자뿐만 아니라 수학에서 다루는 모든 대상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수학의 정의와 증명은 논리적인 상징과 비유로 가득한 셈이죠. 때로는 논리적인 비약이 커서 이해하기 힘들 때도 있어요. 하지만 수학적인 표현을 자주 보고 익히면 수학의 방식을 자연스레 체득하게 되는 겁니다. 너무도 먼 비약을 혼자서도 채울 수 있고, 무언가를 이해하고 스스로 직접 증명할 수도 있는 것이죠.” 나에게는 교수의 말에 준하는 어떠한 말도 없었다. 교수는 엷게 웃으며 말을 붙였다. “무슨 제 말만 하고 있군요. 혹시 학교 생활에서 어려운 점은 없나요?”
딱히 어려운 점이 없기도 했지만, 교수가 그렇게 대놓고 물어보니 어떤 응답도 할 수 없었다.
“네. 없습니다.”
“좋습니다. 지금은 면담 기간이라 나를 찾아왔지만, 오피스아워에는 언제든 편하게 찾아오세요.”
“네. 감사합니다.”
“그럼 오늘은 이 정도로 마무리하죠.”
나는 가방을 메고 교수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연구실을 나오자 내부와는 정반대로 차가운 공기가 복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날은 꽤나 따뜻한데도 어떻게 된 일인지 단과대 건물은 언제나 서늘했다. 복도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강의 시간 중이기 때문인 것 같았다. 나는 학과 사무실을 지나면서 게시판에 붙은 학회 포스터를 뜻 없이 보았다. 그대로 모퉁이를 돌다가 누군가와 부딪히고 말았다. 상대와 내가 동시에 짧게 소리를 내었다. 갑작스러운 충돌에 놀란 단음이었다.
나는 얼른 고개를 내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나는 얼굴을 확인했다. 단발머리였고, 무겁고 선한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동갑인지 선배인지 모르지만, 확률 상 선배일 가능성이 높았다. 선배라 해도 한 학번 위 정도일 것 같았다. 그녀는 잠깐 눈을 맞추고 나를 지나쳤다. 모퉁이에서 뒤를 돌아보니 그녀는 학과 사무실을 지나 수학과 교수의 연구실 복도로 깊숙이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몸을 돌려 단과대 건물을 나왔다.
나는 학생식당에서 가장 저렴한 한식을 이르게 먹고 학생들이 건물에서 쏟아져 나오기 전에 도서관으로 피신하듯 들어갔다. 시험이 끝난 직후였고 딱히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가보지 못한 층과 열람실을 돌아다니며 구경했다. 도서관과 열람실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는데, 하나같이 심각하고 화가 나 있는 표정이었다. 대학생인가 믿기 힘들 정도로 나이가 들어 보이는 사람도 많았다. 얼굴만 봐서는 거의 삼촌뻘이었는데, 그들은 펑퍼짐한 츄리링 바지와 낡은 슬리퍼를 신고 있었고 상당히 두꺼운 책을 하나씩 책상에 올려두고 있었다. 교정만 나가도 대학생활에 설렘을 가진 앳된 신입생들이 절대로 혼자가 될 수 없다는 듯이 서로 팔짱을 끼고 다녔는데, 고작 도서관 정문 하나만 넘으면 다소 침울하고 무거운 분위기의 인간들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모여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겉으로만 봐서는 그들은 모두 같은 공부를 하는 듯했지만, 자세히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는 없었다. 나는 무거운 분위기에 눌려 걸음을 돌렸다.
문학서고 사이를 기웃거리다가 발급받은 학생증으로 책을 대출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고민하다가 카프카의 소설집을 도서 검색대에서 찾고 책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서가는 조용했다. 한 층을 모두 빌린 것처럼 아무도 없는 듯했다. 나는 발걸음 소리를 줄이고 서가로 들었다. 양 옆의 서고의 번호를 번갈아 보며 걸어갔다. 책장을 지나치고, 지나쳤다. 사이에는 아무도 없었다.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책장 몇 개를 더 넘었다. 그곳에서 갑자기 사람이 나타났다. 서고 사이에 누군가 서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책을 찾고 있었는데, 옆모습이 어딘가 낯이 익었다. 골똘히 무언가를 찾는 눈빛이었다. 신중하고 진중한 눈동자로 가장 높은 책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학과 사무실에서 맞부딪친 그녀였다. 너무 오랫동안 바라보다가 그녀가 나의 시선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돌리는 무안한 상황을 겪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서둘러 걸음을 떼고 책을 찾으러 갔다. 책을 빌려 자리를 잡아 읽었다. [변신]을 읽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