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차례로 골목으로 꺾어 들어갔다. 수빈은 곧 처마 아래로 들어가 빨간색 우산을 접었다. 그녀는 나와 눈을 마주치고는 먼저 가게로 들어갔다. 안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안쪽 자리로 들어가 앉았다. 우리가 마주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자 서로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어색하게 서로의 얼굴을 빗겨나갔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을 서둘러 분주하게 했다. 물티슈로 손을 닦았다. 수저를 각자의 앞에 놓고, 물을 따랐다. 그녀가 메뉴판을 들었다. 내가 잘 볼 수 있도록 각도를 적당히 기울였다. 종류가 많았다. 여기는 비빔밥이 맛있다는 수빈의 말에 우리는 비빔밥을 주문했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어색한 시간이 잠시 흘렀다.
내가 먼저 입을 뗐다. “저기, 저는 재준이 아니에요. 재준은 제 친구고요. 어쩌다보니 제가 대신 나왔어요.”
그녀가 당황한 기색 없이 맑은 눈으로 말했다. “사실 제 이름도 수빈이 아니에요.”
“네? 그럼 진짜 이름이……?”
그녀는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말을 이었다. “이름은 천천히 말할까요?”
“네?”
“이름을 몰라도 서로를 알아가는 데는 아무 상관없잖아요.”
“그렇기는 하죠.” 나는 의아하여 그녀를 빤히 보았다. “그럼 나이는요?”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태연하게 답했다. “나이도 천천히.”
다른 건 몰라도 그녀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확실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질문에 답하지 않는 점은 이해하기 어려웠고 도무지 어떤 질문을 해야 그녀의 대답을 들을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재준의 말을 떠올렸다.
“요즘 보는 드라마 있어요?”
“없어요. 드라마 재미없잖아요.”
하필 반례의 여자였다. 나는 좋아하는 음식과 자주 가는 맛집을 물었지만, 모두 짧은 답으로 돌아왔다. 어색한 분위기 가운데 반찬과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우리는 비빔밥을 비볐다.
그녀가 나를 보지도 않고 말했다. “그런 게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예요?”
나는 체념하고 솔직하게 답했다. “아니요. 궁금한 건 아니에요.”
“다행이네요. 그럼 진짜 궁금한 걸 얘기해요. 저도 그럴 생각이거든요.”
나는 질문을 고민하다가 입을 뗐다. “전공이 뭐예요?”
“그건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죠?”
“네. 이유가 무엇이든 어떤 전공을 선택했다는 건 꽤 중요하니까요.”
“으음. 저는 지구과학이랑 관련된 학과에요. 그 안에서 여러 가지를 배워요.”
“예를 들면요?”
“저는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가 궁금해서 전공을 선택했는데, 과에서는 물리, 화학, 대기, 해양, 그리고 우주에 대해서도 배워요.”
“정말 다 배우네요.” 그녀가 말을 마치고 궁금한 듯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 저는 수학과요.”
“수학과? 수학이 좋아요?”
“엄청 좋다기보다는, 굳이 말하자면, 다른 과목보다는 괜찮아서요. 게다가 혼자 하는 거고요. 팀플 같은 것도 없어서 편해요.”
“그럼,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대형 강의실에서 엄청 큰 칠판에다가 빽빽하게 문제를 풀기도 해요?”
“아니요. 저는 아직 그런 적은 없어요.”
“막 며칠을 밤 새워서 고민하다가 갑자기 미친 듯이 풀이를 써내려가기도 하고요?”
“아니요. 물론 문제를 풀기 위해서 고민은 하지만, 아마 상상하는 것처럼 그렇게 근사하지는 않을 거예요. 풀고 나면 진짜 별 문제가 아니거든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혹시 책 좋아해요? 마음에 들었던 책이나 요즘 읽는 책 있어요?”
“책은 이것저것 읽어요. 보통은 그냥 눈에 띠는 걸 잡아서 읽는데, 요즘은 [데미안]이라는 책을 다시 읽고 있어요.”
“저도 그 책 읽었어요, 좋아하는 책이에요. 그거 알아요? 그 책은 처음에 헤르만 헤세의 이름으로 나오지 않고, 주인공 이름인 싱클레어로 출판됐대요.”
“그건 몰랐어요.”
“사실은 헤르만 헤세가 썼는데, 싱클레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출판한 거죠. 편집자도 처음에는 몰랐대요. 헤르만 헤세는 싱클레어라는 작가의 대리인처럼 행세했고요. 근데 싱클레어라는 작가를 세상 사람들이 찾으니까 그제야 어쩔 수 없이 헤세가 자기가 썼다고 밝혔다는 거죠.”
“재밌는 얘기네요.”
“그죠?” 그녀는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이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우리 말 놓을까요?”
“네? 서로 나이도 모르잖아요.”
“그거랑 상관없이요. 나이를 떠나서 서로 편하게 말 놓자는 거죠. 그래야 대화도 편하게 하고 서로를 알아가기 쉬울 거예요.”
그녀는 동갑이거나 많아 봤자 한두 살 위일 것 같았다. “네. 그러면 말 놓을까요?”
“좋아. 그럼 이제부터 말 편하게 한다?”
나는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응. 그러자. 근데 말 놓는 건 천천히 안 하네?”
그녀는 환한 웃음을 짓고는 말을 이었다. 학교에서 들은 강의에 대해 말하는 것 같았는데,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었다. 처음에는 고등학교에서 배운 과학탐구 영역 정도의 수준이었지만, 점차 수준이 깊어졌다. 과학에 대한 전문지식처럼 들렸다. 나는 그녀가 자신의 전공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어색하게 입을 크게 벌려 비빔밥을 먹으며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꽤나 재미있는 눈치였는데, 갑자기 말을 뚝 끊더니 코끝을 슬쩍 긁적였다.
“미안. 사실 지금 긴장해서 아무 말이나 하는 중이야.”
갑작스러운 고백에 나 또한 겸연쩍었다. “그래서 그랬다면 미안해. 내가 말주변이 그다지 없어서…….” 우리는 서로의 눈을 마주쳤다. 나는 재준을 생각하며 조용히 말했다. “우리 긴장하지 말자. 그냥 오늘 친구랑 논다 생각하고 편하게 했으면 좋겠어. 그래서 일부러 말도 놓은 거잖아.”
“노력해볼게. 나도 진짜 궁금한 걸 물어봐야 하는데…….” 그녀는 눈을 위로 뜨고 무언가 고민하는 눈치였다. 곧 말을 이었다. “[데미안]에서 어느 부분을 좋아해?”
“지금 다시 읽는 중이라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아마 서문? 서문의 가장 마지막 문단 있잖아. 모든 사람의 삶이 자기 자신이 되려는 시도라는 말.”
“으음.” 그녀는 고민하는 눈치였다.
“너는?”
“나는, 그 부분 있지. 표적과 카인 이야기.”
“얼마 전에 읽었어. 그 부분이 왜……?”
“뭐랄까. 그렇게 생각하는 게 독특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카인에게 표적이 있다는 걸 모두가 알아볼 수 있다는 게 신기해서. 그게 어떤 형태였든 말이야. 표가 처음부터 있었다면 다른 사람과 구분되도록 하는 증거이고, 하나님이 주셨다면 카인을 죽이지 못하도록 하는 증표잖아. 과연 나도 카인을 직접 봤다면 그걸 알아볼 수 있었을지 궁금하거든. 너는 어때? 너도 알아볼 수 있었을 것 같아?”
생각해본 적 없었지만 흥미로운 질문이었다. 나는 얼굴도 모르는 카인을 떠올렸다. 평범한 인간의 모습이 그려졌다. “글쎄.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만들 정도의 표였으면, 당연히 알아볼 수 있겠지.”
“그러면 카인은? 카인 스스로는 자신의 표적이 어떤 건지 알고 있었을까?”
“그 표가 실제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일지도 모른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아. 카인도 그저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지 않는 것을 경험한 후에, 그 표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믿었을 것 같아. 물론, 뭐 아닐 수도 있고.”
“그는 정말 강한 사람일까?”
“동생을 쳐죽였잖아. 힘이 셌든, 비범했든, 어떤 의미에서든 약한 사람은 아니지.”
“그걸 꼭 사람을 죽여야만 아는 거야? 아니, 강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해쳐도 된다고 생각해?”
“그건 절대 아니야.”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또렷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강함은 자기 인식이야. 표적도 자기 인식이고, 절대로 다른 사람을 도구로 삼거나 개입시켜서는 안 돼. 오롯이 자기 자신만을 받아들이고 그것과 싸워야 해. 다른 사람을 통해서 그 투쟁을 대신해서는 안 된다는 거야. 그건 섣부르고 어리석은 일이야. 시간이 걸리더라도 혼자서 인내하고 저절로 드러날 때까지 기다려야만 해. 그게 진짜 강함이야. 어쩌면 하나님이 카인을 쫓아내고 아무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한 이유는, 그가 땅을 한없이 떠돌면서 진정 강한 사람들을 목격하도록 인도하기 위해 그런 걸지도 몰라. 무엇보다 시간이 걸리는 일이니까. 또 어쩌면 카인에게 진정 강한 게 무엇인지 알려주려고 했을 수도 있지. 카인은 아무리 노력해도 땅에서 수확을 걷을 수 없잖아. 죽을 때까지 말이야. 카인은 괴로워서 스스로 죽고 싶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죽을 수 없잖아. 어느 누구도 카인을 죽일 수 없으니까.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 그녀는 나의 시선을 피하더니 혀끝을 살짝 내밀고는 엷은 미소를 띠며 말을 붙였다. “나도 모르게 갑자기 심각해졌다.”
우리는 잠시 말을 잇지 않았다. 나는 그의 해석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물었다.
“너는 이런 생각을 자주 해?”
“꽤 자주. 왜? 싫어?”
“아니, 신기해서.”
그녀는 방긋 미소를 지었다. “그래? 다행이다.”
“여기에 내가 아니라 내 친구가 나왔어야 했잖아. 근데 그 친구가 좀 사정이 생겨서 내가 나오게 된 거야. 더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런 자리 되게 싫어하는데 마지못해 나왔거든. 아, 오해는 하지 마. 너를 모르고 있던 때라 절대로 너 때문에 싫었다는 건 아니니까.”
수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나도 사실 고백할 거 하나 있어. 나 미팅 처음 하는 거야.”
“그건 나도 그래.”
“너도? 우리 서로 처음인 거네? 그러니까 뭔가 마음이 좀 놓인다. 갑자기 훨씬 편해졌어.”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드문드문 살피며 식사를 했다. 가게 안에는 자리가 없었다. 모든 자리에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친한 친구 사이로 추정되는 네 사람도 있었고 우리처럼 처음 만나는 사이로 보이는 두 사람도 창가 쪽에 있었다. 그들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서로를 부담스럽게 마주하고 있었다. 남자는 무슨 말을 계속 했는데, 여자는 젓가락도 내려놓고 이야기를 들었다. 무표정이었다. 그들보다는 우리가 더 분위기가 괜찮은 것 같았다. 다행히도 우리는 제법 편안하게 식사를 했다. 많은 말이 오가지는 않았다. 음식이 맛있다는 둥, 올해 장마는 길다는 둥, 그런 얘기를 했다. 처음보다는 대화도 눈길도 편하게 교환했다. 서로의 학교에 대해서도 얘기했고, 자신의 학교만이 가지는 특색이나 장소 따위도 공유했다. 그런 이야기는 적당히 재미있었다. 예상치 못하게 그녀와 나눈 책과 표의 이야기가 대화를 나누면서도 드문드문 생각났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 이야기에 마음이 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