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행선의 교점 # 24

by 청화

우리는 나란히 빨간색 우산을 쓰고 길을 걸었다. 걷다가 불쑥 창피한 마음이 들어 그녀를 힐금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처음보다 더 편한 얼굴이었다. 우리는 곧장 어린이대공원으로 걸어 들어갔다. 사람은 드물었다. 공원 안으로 들어갈수록 비가 차츰 멎더니 하늘에는 잿빛 구름만이 남았다. 비가 내리지는 않았지만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하늘이었다. 우리는 우산을 접었고 처음보다 더 가까이 붙어서 걸었다. 카페에서 나온 후부터 그녀는 말을 하지 않기로 작정했는지, 묵묵히 걷기만 했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지 않을수록 여전히 나의 눈물과 깊이 관련된 시간 속에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어색하지 않게 대화를 시작하기 위해 질문을 골랐다.


“저기, 아까 네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무슨 이야기?”


“한 가지 사건.”


“맞다. 내 얘기는 안 했지? 음, 너도 솔직하게 말했으니까 나도 솔직하게 말해야겠지? 사실 다른 거 말하려고 했는데 너한테는 그러면 안 될 것 같아. 나도 가장 처음의 것을 말할게. 나는 사건이라기보다 어떤 상태에 가까워.” 우리는 잠시 침묵하며 걸었다. “지금은 완전히 나았지만, 어렸을 때 아토피를 앓았어. 아토피가 무서운 게 뭐냐면 피부가 너무 간지러워서 긁으면 또 다른 감염이 생긴다는 거야. 아토피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온갖 피부염을 불러오는 거지. 터지고 진물이 나고 뭐 그런 거. 그래서 간지럽더라도 절대 손을 대면 안 돼.”


“힘들었겠다.”


“엄청 힘들었지. 어린 나는 아무리 간지럽더라도 꾹 참는 거야. 나는 과거를 떠올리면 그 상태가 가장 먼저 기억나. 참고 견디는 그런 상태 말이야. 남들은 내가 얼마나 가렵고 힘든지 모르겠지만, 나는 너무 힘들었어. 그래도 가족들이 옆에 있으면 그나마 좀 참을 만했어. 근데 방에 혼자 있으면 참기가 너무 어려운 거야. 나를 아무도 안 보고 있으니까 몰래 긁고 덧나고 그러는 거지. 그래서 나름 방법을 찾았어.”


“무슨 방법?”


“내가 혼자 있어도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가족들이?”


“가족도 상관없고, 그 누구라도 상관없어.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고, 나를 감시하고 있다고 상상하는 거야.”


“효과가 있었어?”


“응, 엄청. 보이지 않는 시선 하나를 만들면 나는 그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해. 근데 그 시선 덕분에 나는 피부를 긁지 않을 수 있어. 아무리 가려워도 긁으면 안 되니까. 나 혼자서는 힘들지만, 누가 나를 보고 있으면 더 견딜 수 있었어. 그게 나를 사랑하는 눈이든 감시하는 눈이든 상관없이.” 나는 수빈의 말이 씁쓸하게 들려 말을 아꼈다. 그녀는 몸을 돌려 팔뚝을 쭉 펴서 보여주었다. 하얗고 말끔한 피부였다. “그 덕분에 지금은 멀쩡해.”


“다행이네.”


“정말 다행이야. 안 그랬으면 여기저기 흉이 졌을지 몰라. 그래서 지금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었을지도 모르지. 가끔 그런 생각을 하면 가슴이 서늘해. 그때 잘 참고 치료받고, 억지로 시선 하나를 만들고 견뎠기 때문에 내가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거잖아. 물론 어떤 모습이든 결국 다, 나이기는 하지만…….” 나는 그녀의 얼굴을 슬쩍 살폈다. 그녀는 산책로를 보고 있었다. 뒤늦게 나를 보며 말했다. “아까 책 얘기 했었잖아. 헤르만 헤세와 싱클레어 말이야. 생각해봤는데, 헤르만 헤세는 자신을 숨기고 싶지 않았을까? 그래서 싱클레어라는 가상의 작가를 만들어낸 게 아닐까?”


“그럴 수도 있겠다. 가끔 그럴 때가 있잖아. 나를 숨기고 싶을 때. 벗어나고 싶기도 하고.”


“그렇지? 너도 그럴 때가 있지?”


“가끔.”


“실화인지는 모르겠는데 어디서 들었거든, 싱클레어의 이름으로 [데미안]이 출판됐어도 그게 헤르만 헤세가 썼다는 걸 알아본 사람이 있었대. 엄청 유명한 심리학자라고 했는데…….”


“어떻게 글만 보고 알아볼 수가 있지?”


“그러니까. 그런 글을 쓰는 헤세도 대단하고 그걸 알아보는 사람도 대단한데, 좀 안타깝기도 해. 아무리 숨기고 싶어도 숨길 수 없는 거잖아, 자기 자신을.”


“아무리 자신을 숨겨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어딘가에 있다는 걸 알았잖아. 기분이 이상했을 것 같기는 해.”


“뭐 하나 물어봐도 돼?”


“물론.”


“너는 내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어도, 나를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아?”


“우리 오늘 처음 봤잖아. 지금 우리는 진짜 이름도 모르니까. 물어볼 수도 없을 테고.”


“그렇게 말고. 오늘처럼 서로를 마주하고 대화하고, 그런 식으로 말이야.”


“솔직히 아직은 좀 힘들지 않을까 싶어.”


“그럼 너는 나를 더 알고 싶어? 어떤 모습에 나라도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나를 더 알고 싶어?”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잿빛 구름은 저 멀리 떠나가고 있었다.


“너는 궁금한 사람이야. 솔직히 말하면 뭔가 수상쩍기도 해. 그런데 나는 네 앞에서 울기도 했고, 그 순간에는 정말 어떻게 해 볼 수도 없었어. 정말 이상했거든…….”


“우리 또 볼 수 있는 거지?”


“응.” 나는 기대 없이 물었다. “근데 정말로 이름 안 알려 줄 생각이야?”


“김수진. 수빈이 아니라 수진이야.”


나는 내심 놀랐다. “이제 이름 알려주는 거야?”


“이제 이름을 알든 모르든 상관이 없어졌어. 우리는 이름보다 서로를 더 잘 알게 됐잖아. 너도 이름 알려줄래?”


“나는 한영수.”


수진은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까딱거리더니 말했다. “근데 우리 되게 흔한 이름이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보고 엷게 웃었다. 어린이대공원을 크게 한 바퀴 함께 돌아 역으로 나왔다.


지하철 역 입구 앞에서 수진이 말했다. “우리 이제 그만 돌아가자. 너랑 얘기를 더 하고 싶은데, 우리 이제 좀 쉬는 게 좋을 것 같아. 오늘 힘들었잖아.”


나는 그녀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수진 앞에서 보인 눈물의 여운이 아직도 창피함으로 남아 있었다. 조금은 지친 것도 같았다. 그녀가 잠시 우물쭈물하다가 물었다.


“우리 다음 약속 지금 잡을래?”


“지금?”


“응. 싫어?”


“아니.”


“그럼. 음……. 다다음 주 다섯 시. 장소는 여기서 보자. 역 앞에서. 괜찮지?”


“괜찮아.”


“너랑 공원 걷는 게 좋았어. 다음에도 공원 걷자. 편하게 입고 와.”


“그래. 알았어.”


“잘 가. 다시 만날 때까지 잘 지내.”


“너도.”


수진은 생긋 웃어 보이고 몸을 돌렸다. 나는 잠시 그녀의 뒷모습을 보다가 역으로 들어갔다.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수진과 나눈 대화가 하루 종일 떠올라 [데미안]을 끝까지 읽었다. 여전히 서문의 마지막 문단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