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행선의 교점 # 26

by 청화

방학은 한참이나 남았고 장마는 끝나지 않았다. 잠깐 비가 멎은 틈을 타 장우산을 챙겨 동네를 산책했다. 언덕을 내려갔다. 비가 오지 않는데도 거듭 빗물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 위를 올려다보니 얽히고설킨 전깃줄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전깃줄은 서로 떨어진 빌라와 전봇대를 잇고 있었다. 나는 전깃줄을 피해 걸었지만 잠시라도 하늘을 보지 않으면 어느새 전깃줄 밑을 걷고 있었고, 물방울은 다시 머리 위로 떨어졌다. 어깨 위에 떨어지거나, 등 뒤로 들어가기도 했다. 나는 갑작스럽고도 차가운 감각을 피해 빠른 걸음으로 언덕을 내려갔다. 역 주변으로 가면 소음이 크기 때문에 골목 안을 거닐었다. 어딜 가나 전깃줄이 있었고, 맺힌 물방울이 떨어졌다. 나는 포기하고 우산을 썼다. 비가 오지 않았지만, 아예 우산을 쓰는 편이 더 나았다. 간혹 우산 위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홀로 골목길을 어슬렁거렸다.


휴대폰이 울려 전화를 받자마자 재준은 무슨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말했다.


“어떻게 된 거야. 끝나고 왜 연락 안 했어? 괜히 욕만 먹을까봐 참고 있다가 너무 궁금해서 연락했다.”


“내가 너한테 욕을 왜 해. 그냥 잘 만났어.”


“끝? 그대로?”


“아니. 내일 또 만나기로 했어.”


“뭐? 오, 한영수.” 재준은 나를 놀리듯 말했다. “뭐야. 괜히 걱정했잖아. 알아서 잘 하네.”


“근데 네 연애는? 지난번에 제대로 못 들었잖아.”


“그랬나?” 재준은 한숨을 내쉬고 말을 붙였다. “말도 마. 서로 사귀기로 시작한 후부터 완전히 달라졌어. 완전 다른 사람이 됐다니까?”


“다른 사람?”


“사귀기 전에는 안 그랬는데, 사귀는 사이가 되니까 내가 누구랑 연락하는지 일일이 다 확인해. 내가 또 은근히 발이 넓잖아? 가끔 과 여자애들이랑도 연락하고 그런단 말이야. 그럼 누구랑 연락했냐고 그러고. 여자면 연락하지 말라고 하는 거야. 내가 아무리 친구라고 해도 지현이는 절대 안 된대. 아. 여자 친구 이름이 지현이야.”


“그래서?”


“이제 친구들이랑 거의 연락 안 해. 지현이가 자꾸 뭐라고 하니까 정말로 죄짓는 것 같아. 저번에도 얘기 했잖아. 나는 여자 친구가 생긴 후에는 미팅도 안 나가. 소개도 안 받아. 그것뿐만이 아니야. 그런 가능성이 있었던 애들이랑 아예 연락 안 한다고. 딱 선을 긋는 거야.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나는 꽤 엄격하거든. 내가 지금 연락하는 여자애들은 정말 그냥 친구야. 전혀 모호한 관계가 아니란 말이지. 근데 자꾸 지현이가 뭐라 하니까 진짜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것 같아. 그래서 지현이 말고는 다른 여자애들이랑 연락 안 해. 오해 받기도 싫고, 그런 얘기 듣는 것도 싫어서. 그래서 하루 종일 지현이랑만 연락해. 그런데도 연락이 조금만 늦으면 서운해 해. 지금은 그나마 영수 너랑 연락하는 거니까. 용서해주실 거야.”


“왜 존댓말을 써.” 나는 슬쩍 웃고는 말을 이었다. “계획 이후에도 역시 쉽지 않네.”


“그러니까. 혹시나 해서 얘기하는 건데, 영수 너도 조심해. 갑자기 사람이 바뀔지도 몰라.” 나는 재준이 말한 명제를 기억했지만 입에 담지는 않았다. 재준이 말을 붙였다. “걔 진짜 이름 뭐야? 미팅 나온 애.”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뗐다. “몰라.”


“몰라? 만나서도 얘기 안 해줬단 말이야? 아니, 그럴 수가 있나? 암튼 걔도 심상치가 않군. 너도 조심해야겠어.”


“그래. 근데 너는 그렇게 힘들면서 꼭 연애를 하고 싶어? 네가 여러 사람 만나고 다니면서 바쁠 때가 더 좋아 보이는 것 같아서.”


“몰라. 나도 잘 모르겠어. 그래도 연락 문제 말고는 다 괜찮아. 이놈의 휴대폰이 문제야. 이것 때문에 항상 서로 연결되어 있잖아. 아니, 연결되어 있다고 착각하잖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으니까. 근데 이건 연결되어 있는 게 아니지, 그렇다고 떨어진 것도 아니고. 아주 이상한 상태야. 단지 서로 맞닿아 있기만 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 교감 없이 그냥 붙어 있기만 한 것 같아. 처음에 연락할 때는 나도 좋았는데, 계속 연락하고 있으니까 아무 감정도 없어. 기계적으로 연락을 하고 있다니까? 내가 어디를 간다. 뭐를 한다. 지현이한테 보고하는 꼴이야.”


“스트레스 많이 받나 보다.”


“그냥 그렇지 뭐. 너는 걔랑 연락하고 있어?”


“연락 안 해. 괜히 연락 안 하려고. 그게 편해서.”


“그래? 연락하는 걸 싫어하는 여자는 내가 본 적이 없는데. 걔는 네 연락을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어.”


“그럴 지도 모르지.” 나는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어? 미안. 이제 끊어야겠다. 전화해서 힘들다고만 한 것 같네. 그래도 여자 친구 있으니까 좋아, 진짜로. 너 데이트하고 나서 다음 주쯤에 얼굴 한번 보자.”


“그래, 그러자. 또 연락해.”


재준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나와 잠시 연락한 이유로 재준이 지현에게 혼나지 않기를 바랐다. 나는 수진에게 내일 약속 시간과 장소를 괜히 물으며 연락을 하는 게 좋을지 고민하며 골목을 걸었다.


길바닥 중간에 깨진 돌멩이 하나가 있었다. 발로 툭 찼더니 돌멩이가 담벼락 밑을 부딪고 멀리 튕겨 나갔다. 빠르게 회전하면서 골목의 물웅덩이로 들어갔다. 수면 위에 수많은 동심원이 연속해서 일어 물결이 생겼다. 수진에게 재준의 명제가 모두 통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이번에는 재준의 것을 빌리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