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의 시간 / 행복 004
동서고금,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사람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있겠지만, 그 으뜸은 ‘행복’이 아닐까.
‘21세기 정치학대사전’에서는 “인간의 삶에서 궁극적인 목적은 행복”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행복’은 모든 사람이 추구하는 최고의 이상이자 가치이다. 불행을 추구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국어사전은 ‘행복’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복된 좋은 운수”,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 또는 그런 상태”. 그래서 사람들은 그 무엇보다도 행복에 관심이 많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여전히 그 행복을 찾거나 누리지 못하고 있다.
시편 1편은 그 행복을 찾아 누릴 수 있는 법을 제시하고 있다.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2절). 이러한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고,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게 된다(3절). 모든 사람이 바라는 큰 축복이고 큰 행복이 아닐 수 없다.
시편 기자가 여호와의 율법에 대한 반응으로 제시한 것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즐거워하는 것이고, 둘째는 주야로 묵상하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흔히 이것을 마음과 이성에만 적용하고 실천과 결부시키지 않는 누를 범하기도 한다. 하지만 악인의 행동을 묘사하고 있는 1절과의 관계를 고려할 때, 시편 기자가 의도한 것은 여호와 율법의 실천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절은 악인들(죄인들, 오만한 자들)이 스스로 ‘마음먹은 것을 따르고’, ‘길에 서고’, ‘자리에 앉는’ 것을 통해 악을 적극적으로 도모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복 있는 사람, 즉 의인도 여호와의 율법을 밤낮 묵상할 뿐 아니라 그 묵상한 내용을 삶에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복이 주어진다.
그런데 여호와의 율법을 실천하기는 말처럼 쉽지 않다. 지켜야 할 율법 항목도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로 인하여 많은 그리스도인이 그것을 멍에처럼 여기거나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심지어 그것을 지키지 못함으로써 좌절감이나 실패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 직면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성경은 우리에게 한 가지만 놓치지 않고 집중하면 된다고 귀띔해 주고 있다.
한번은 한 율법사가 주님께 이렇게 여쭈었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큽니까?” 주님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와 둘째 계명이고,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해 주셨다(마 22:34-40). 모든 율법과 선지자들(예언자, 예언서)의 본뜻이자 골자가 바로 사랑에 달려 있다. 그런가 하면 사도 바울도 율법의 완성이 사랑이라고 강조하였다(롬 13:10). 따라서 ‘사랑’ 하나만 온전히 실천해도 하나님의 율법을 다 지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율법의 완성인 사랑을 실천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일까? 주님이 하신 것처럼 하면 된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그렇게 사랑을 실천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이런 수준의 사랑을 요구하셨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5:12). 주님이 우리에게 제시하신 사랑의 수준은, 그분이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신 것같이 그렇게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이런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