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의 시간 / 믿음 008
누가복음에서 백미(白眉)라 하면,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가 아닐까.
그 이야기가 15장에 소개되고 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어느 날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신의 분깃을 요구하였다. “아버지,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세요.”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받은 재산을 모두 현금으로 바꾼 후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하면서 모두 낭비하였다. ‘먼 나라’는 부정한 동물인 돼지를 치기 때문에, 거기는 이방인 지역이고 죄가 만연한 곳이다. 또 ‘허랑방탕하다’라는 말은 그 재산을 정상적인 경제 활동을 위하여 쓰지 않고 자신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죄를 짓는 데에 사용하였다는 의미이다. 30절에 보면 이런 둘째에 대한 맏아들의 비난이 나오는데, 그는 동생이 창녀들과 함께하느라 그 모든 재산을 허비하였다고 신랄하게 꼬집었다. 모든 재산을 허비한 둘째 아들은 결국 거지가 되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이라는 말이 있다. 내린 눈 이에 또 서리가 내린다는 뜻으로, 어려운 일이나 환난이 거듭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거지가 그랬다. 풍년이 들어야 거지도 제대로 빌어먹을 수 있는데, 그 지역에 크나큰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그의 궁핍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는 그 나라 백성 가운데 한 사람에게 붙여 살면서 들에 나가 돼지를 쳤지만, 돼지의 먹이인 쥐엄나무 열매조차 주는 사람이 없어 배를 채울 수 없었다. 둘째 아들의 이런 모습은 새로운 피조물 이전의 ‘옛사람’을 상징한다. 그의 인생 목표는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삶의 말로는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아버지 하나님과 화목하지 않고, 인생의 목표를 자신에게 맞춘 사람의 결국이 이렇다.
굶주림과 절망에 빠져 있던 그는 스스로 돌이키면서 이렇게 생각하였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나는 여기서 굶주려 죽는구나.” 그의 일차적인 자각은, 품꾼들과 자신의 모습을 비교하는 것이었다. 아버지 집에 있는 품꾼들은 비록 종이었지만 양식이 풍족하였다. 하지만 그는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굶주려 죽게 되었다. 그의 이런 인식은, 하나님 곁을 떠난 사람들 앞에 놓여 있는 처지, 즉 죽음과 심판에 대한 자각을 의미한다.
그의 두 번째 자각은 아버지를 향한 것이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겠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으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나를 품꾼 중 하나로 봐 주세요.” 그는 그 자각의 끝에서 이내 일어났고, 발걸음을 옮겨 아버지께 돌아갔다. 그는 이런 일이 아버지께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일어났고, 따라서 자신은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할 수 없지만, 그래도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만 하지 않았다. 그 생각대로 일어나서 아버지를 향하여 발걸음을 옮겼다. 둘째 아들의 이런 인식과 행동은 아버지 하나님께 돌아가는 ‘회개’를 가리킨다. 회개는 이처럼 자기 눈을 자신이 아닌 아버지 하나님께 돌리고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아버지 집일까, 아니면 먼 곳에 가서 아버지의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거지처럼 지내고 있을까? 만약 아버지 집을 떠나 자기 마음대로 살고 있다면 잘못된 일이지만, 그래도 그 처지를 자각하고 돌이킨다면 이는 매우 잘하는 일이다. 아버지 하나님은 바로 그것을 간절히 소망하신다. 그렇게 소망하실 뿐 아니라 돌아온 아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그 신분도 거지나 품꾼이 아닌 원래의 신분인 아들로 회복시켜 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렇게 될 수 있고, 이러한 사람을 가리켜 ‘새로운 피조물’이라 하였다(고후 5:17).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는 약속은, 지금도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