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의 시간 / 인격 009
사람들은 누구나 부모님이 나의 부모님이 되신다는 사실로 감사한다.
구체적으로 부모님의 어떤 부분에 관해서 감사하느냐고 물으면, 당연히 나를 향한 ‘희생’, 즉 ‘조건 없는 사랑’이라고 말할 것이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자녀 앞에서는 한없이 낮아지는 것이 바로 우리의 부모님이시다. 예수님은 그에 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마 7:9-11a). 그래서 누구나 자신의 부모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부모님께 감사하는 만큼 하나님께도 감사하면서 사는 것일까? ‘예’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 같은데, 왜 그럴까? 그분의 사랑을 경험하지 않았거나, 경험하였더라도 수박 겉핥기처럼 피상적으로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반대로 ‘예’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그분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경험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부모의 사랑에 대하여 말씀하신 그분은, 이어진 말씀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b). 여기에서 주목할 단어는 ‘하물며’이다. 국어사전은 접속 부사인 ‘하물며’의 뜻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더욱이”, “앞의 사실이 그러하다면 뒤의 사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하물며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
시편 136편 1절에서 기자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여기에는 감사의 대상이 여호와시라는 것과 그분이 왜 감사의 대상이 되시는지에 대한 내용이 들어 있다.
‘선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토브’인데, 질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좋다’(good)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분이 악하시지 않고 좋은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계획과 그에 따른 행위가 모두 좋다는 뜻이다. 또 ‘인자하심’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헤세드’이다. 이는 ‘자애’(ASV, NASB, loving kindness), ‘사랑’(NIV, RSV, love), ‘자비’(KJV, mercy) 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자기 백성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가리킨다. 더구나 그분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변하거나 유한하지도 않고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므로 더욱 숭고하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십자가’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크나큰 사랑을 그곳에서 표현하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17). “사랑은 여기 있으니...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라고 말씀하셨다(요 15:13). 이 말씀대로 그분은 친구인 우리의 생명과 풍성한 삶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심으로써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실현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하물며 사랑’을 베푸신 그분께 감사하고 또 감사해도 그 감사함을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