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의 시간 / 의사 누가와 함께하는 26
1. 부활하신 예수님
안식 후 첫날 새벽, 주님은 부활하셨다.
그때 여인들은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주님의 시신이 안치된 무덤으로 갔지만, 여인들이 발견한 것은 ‘빈 무덤’뿐이었다. 여인들이 그 일로 근심하고 있을 때 두 천사가 그들 곁에 서서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천사의 말을 들은 여인들은 달려가서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사람에게 알렸다. 성경은 그 여인들이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인들도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그들 모두는 예수님의 빈 무덤을 목격한 증인들인 셈이다.
그렇지만 사도들은 여인들의 놀라운 소식을 듣고도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전한 말을 허탄한 말, 즉 공허하고 거짓된 말로 여겼다. 아마도 그들은 여인들이 유령이나 헛것을 보았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때 베드로와 다른 제자(요한)는 일어나서 무덤으로 달려갔다. 그들도 역시 여인들처럼 빈 무덤만 확인하고 돌아왔다.
그들과 달리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빈 무덤’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의 실체를 보았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십 리 정도 떨어진 엠마오로 가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결정적인 증거인 예수님의 모습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여전히 혼란스럽고 답답하기만 하였다.
그들의 대화 가운데 끼어드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신 후에, 성경에 쓰여 있는 자신에 관한 내용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하지만 그들은 그때까지도 그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다. 주님은 그들의 강권에 따라 엠마오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머무셨는데, 식사하실 때 떡을 가지고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셨다. 그때에야 그들은 눈이 밝아져 자신들 앞에 계신 분이 주님인 것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주님의 모습은 그들에게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즉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열한 제자와 그들과 함께 한 이들이 모여 있었고, 그들은 주님이 정말 살아나셨고 시몬에게 보이셨다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에 두 사람도 그들에게 주님을 목격한 사건을 들려주었다.
2. 부활 속에 담긴 사실
누가복음 24장은 바로 그때 그곳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신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하여 주님의 부활이 담고 있는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사실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른 어떤 사람이나 존재가 아니라,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신 바로 그분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 증거로 못 자국 난 손과 발을 보이시면서 나인 줄 알라고 말씀해 주셨다(39a절). 주님은 이것을 통하여 자신이 십자가에서 이 세상 모든 죄를 이미 대속하셨고, 또 부활하심으로써 자신이 친히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명하셨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2).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롬 14:9). ‘죽은 자와 산 자의 주’는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 따라서 예수님이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신다는 것은, 그분이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두 번째는, 예수님이 영이 아닌 육체로 부활하셨다는 사실이다.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39b절). 영은 살과 뼈가 없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살과 뼈가 있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은 살과 뼈가 있는 우리의 몸과 같은 모습으로 부활하셨다.
초대교회는 이단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영지주의다. ‘영지주의’(Gnosticism)는 헬레니즘 시대에 유행하였던 이단 종파로, 희랍 사상의 관점에서 기독교를 이해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영과 정신은 선하고, 육체와 물질은 악하다는 극단적인 이원론에 근거하여, 구약의 하나님을 육체와 물질을 만드신 저급한 신으로 취급하였다. 이런 시각에서 구약과 신약의 단절을 과도하게 강조하였고, 선한 그리스도의 영이 악한 인간의 육체를 입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도 육체를 제외한 영의 부활만 인정하였다.
영지주의는 지금까지 신비주의와 같은 이단들을 양성하고 있고, 심지어 기독교 안에서도 이원론이라는 도식으로 구원과 삶의 문제 등에서 나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만약 부활하신 예수님을 살과 뼈가 있고 그래서 만질 수 있는 분으로 인식하고 믿지 않는다면, 우리도 그런 오류에 빠질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그분의 육체 부활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예수님의 다음 행동에는 이 사실에 대한 또 다른 증명이 들어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고 물으셨다. 이에 그들은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렸고, 주님은 그것을 받아서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41-43절). 만약 예수님이 살과 뼈가 없는 영이셨다면, 생선을 잡수실 수도 없고 잡수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그것을 드심으로써 자신이 살과 뼈로 이루어진 존재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셨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왜 중요할까? 주님이 승천하실 때 그와 같은 모습을 하고 계셨고, 또 그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승천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있던 제자들에게 천사가 이렇게 말하였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 1:11).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이 바로 이런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의 부활도 이와 똑같이 일어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 사실을 부인하게 되면, 이것이 단초가 되어 성경 속의 모든 말씀을 신뢰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이 사실이 중요하고 또 중요한 것이다.
세 번째 사실은, 예수님이 부활이 자연 발생적으로 우연히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철저한 계획과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 바로 그분의 부활이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들과 함께 계실 때 하셨던 말씀을 상기시켜 주셨다. 그때 주님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여러 번 말씀하셨다(44절, 4:16-21;18:31;20:37,41-44;마 3:3;5:17). 주님은 그들에게 그 말씀들을 상기시켜 주시면서, 거기에 기록된 모든 것이 자신을 가리키고 있고, 또 그렇게 기록된 말씀이 모두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것, 즉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모두 이루어졌다고 말씀해 주셨다(44,46절).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모세 율법은 모세 오경을, 선지자의 글은 선지서, 그리고 시편은 성문서를 가리키는데, 이는 구약 성경 전체를 의미한다. 구약 성경에서 예수님을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고 또 기록된 그대로 이미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그분의 부활이 자연 발생적인 우연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가설을 철저히 부정하고 있다. 이 사실은 그분의 부활이 창세전부터 이미 하나님의 계획 속에 들어 있었고(엡 1;4-5), 또 그분의 섭리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가 된다.
우리는 이것을 한 마디로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에는 ‘우연’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약속에는 그분의 완전한 계획과 완전한 성취만 존재한다. 우리는 그분과 관련된 모든 약속도 반드시 그렇다고 믿는다. 따라서 47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와 같이, 주님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을 믿을 수 있다.
3. 부활 속에 담긴 의미
예수님의 부활에 이와 같은 사실들이 들어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첫 번째는, 우리의 죄를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분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 모두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이다. 이 말 속에는 우리가 구원과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전제가 들어 있고, 그 전제는 죄 때문에 생긴 것이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고, 그 죄로 인하여 심판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즉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에 떨어져서 심판받는 것은 너무나도 무섭고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은 일은 앞서 예수님에 대한 모든 것이 이루어진 것같이, 반드시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이다. 따라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를 결단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주님은 죄에 대해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 16:9). 왜 다른 모든 죄를 제쳐두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가 되는 것일까? 다른 모든 죄는 주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이미 대속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만 믿으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요 1;12;3:16). 이 말은 반대로 이제 그분을 믿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말도 된다. 그래서 그분을 믿지 않는 것이 죄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지 않고 자신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 제멋대로 살아가기 때문에, 그것이 죄가 되고 결국에는 심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 의미는, 우리가 모두 이 일에 증인이라는 것이다. 손과 발의 못 자국, 음식을 드신 일, 그리고 성경을 통하여 자신의 부활을 증명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고 말씀하셨다(48절). 따라서 제자들의 정체성은 이제부터 ‘증인’이고, 모든 삶의 양식은 ‘증언’으로 채워져야 한다. 증인의 증언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 없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수 없기 때문이다(47절).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인 우리가 입을 열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모든 족속은 복음을 들을 수 없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핍박도 겸하여 주어지기 때문에 무척 어렵고 힘든 일이다. 그렇지만 바로 그런 점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주님은 그 영광스러운 일을 천사들에게 맡기지 않으셨다. 오직 제자들인 우리에게만 맡기셨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에는 전도하시는 일도 들어 있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막 1:38). 이것은 공생애 사역 초기에 하신 말씀인데, 그 말씀대로 주님은 공생애를 마칠 때까지 전도하는 일에 모든 힘을 쏟으셨다. 주님의 이런 모습은 우리가 따라야 할 본이 되고, 또 너희도 그렇게 하라는 강력한 메시지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이렇게 명령하고 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만약 그분을 주님으로 믿지 않는 죄를 회개하지 않았다면, 지금 즉시 회개해야 한다. 또한, 증인의 삶을 살고 있지 않다면, 이제부터라도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써야 한다. 이 두 가지는 선택 사항이 아니다. 반드시 해결하고 실천해야 할 사안이다. 부활에 담긴 이 의미가 온전히 우리의 것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