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딩의 일기장 11
“서현아, 꼭 해야 하니?”
“약속하셨잖아요.”
“지금 시간이 밤 열 시가 넘어가는데?”
“약속은 꼭 지켜야 훌륭한 사람이라고 아빠가 그랬잖아요.”
“그랬지. 근데 시간이 좀...... 아빠가 피곤하기도 하고.”
“아빠, 약속은 지키지 않아도 되는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니?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지.”
“그럼, 얼른 해요.”
“......”
어린 녀석이 꽤 집요하면서도 논리정연하게 파고드네요. 아빠가 빠져나갈 수 없도록 서너 발 앞질러 올가미도 쳐 가면서. 그렇게 말하는 아들이 대견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야속하기도 합니다.
퇴근 후에 한 시간 동안 블루마블 놀이를 하기로 아들과 약속하였는데, 아빠는 회사 일에 시달려 오늘 정말 피곤합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아들과의 약속을 파기하고 쉬고 싶었지만, 아들이 놓아주지 않네요.
이럴 때 서현이의 동생이나 형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저희끼리 어울려 재미있게 블루마블 게임을 하면 되고, 아빠는 그 옆에 여유롭게 누워서 녀석들 노는 것을 흐뭇하게 바라볼 수 있을 테니까요.
애초 자녀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결혼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하나만 낳아 지구의 인구 팽창을 막겠다는 계획은 더더구나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다 보니까 아들 하나만 달랑 갖게 된 것이지요.
저는 서른다섯에, 아내는 서른셋이라는 나이에 결혼하였습니다. 좀 늦은 나이에 결혼하게 된 것이지요. 자연스레 아이도 늦게 갖게 되었고요. 첫아이를 낳은 이후 서둘러서 둘째를 가졌더라면 좋았겠지만, 서현이를 키우느라 너무도 힘들었기 때문에 둘째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이삼 년 후, 서현이 키울 때 힘들었던 기억도 가물가물해질 때는, 아내가 대전이며 김천이며 수원을 오가며 힘든 대학 강사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외할머니가 딸을 돕기 위하여 개봉동에서 북아현동까지 매일 오셔서 서현이를 돌봐주셨습니다. 그런 외할머니께 아이 하나를 더 낳아 맡기면 너무 힘들어하실 것 같았습니다. 또한, 박봉에 시달리는 우리 집의 살림살이로 아이 둘을 양육하는 것이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 둘째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최근 삼사 년 동안은 제 월급이 그나마 조금 더 오르고, 아내도 대전에 있는 대학의 조교수가 되면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겼지만, 어느덧 마흔이 되어버린 아내의 건강 때문에 아이를 더 갖지 못하였습니다.
그때는 이런저런 이유로 둘째를 갖지 못하였는데, 요즘은 그런 것들이 다 핑계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것저것 재지 않고 그냥 둘째를 낳아야 했는데 말입니다.
아이 둘 셋 있는 가정을 볼 때면 참 부럽습니다. 저희끼리 사이좋게 지내며 우애를 쌓아가는 것을 보면서, 형제 우애를 경험하지 못하고 외롭게 크는 서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 미안한 마음에, 아빠와 엄마가 서현이의 형이 되고 또 누나가 되어 줍니다. 목감천에서 자전거도 함께 타 주고, 태권도며 쿵후며 검도의 고수 흉내 놀이도 함께해 주고, 딱지 접기와 딱지치기도 함께해 주고, 알록달록 색종이로 학이며 꽃이며 통통배 만들기도 함께해 주고, 공기놀이도 함께해 주고, 묵찌빠도 함께해 주고, 달리는 자가용 안에서 끝말잇기 게임도 함께해 줍니다.
그리고, 오늘처럼 주사위를 열심히 던지며 블루마블 게임도 함께해 줍니다.
사십 대 중반의 아저씨가 밤 열한 시가 다 되어가도록 열 살짜리 꼬마와 머리를 처박은 채 함께 어울려 주사위를 던지고 있습니다. 주사위에 나온 숫자대로 말을 옮기고 분주하게 돈을 주고받으면서, 호텔이며 빌딩, 별장 등을 짓습니다.
가끔 아빠는 아들의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서 아들이 지어놓은 건물들을 피해 한두 칸 더 가기도 하고 덜 가기도 하며 말을 옮겨 놓습니다. 거기에 걸리면 파산 신고해야 하고, 그러면 아빠는 오늘 게임 종료해야 하거든요.
옆 소파에 앉아 돋보기안경을 쓴 채 성경을 읽고 계시는 외할머니께서, 저희 둘을 한심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허리가 부러질 듯 아프기 시작합니다. 허리를 잘못 폈다가는 근육이 놀래 병원에 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무릎은 또 왜 이렇게 쑤시는지. 블루마블 게임을 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건 완전히 중노동입니다.
아들은 아무렇지도 않나 봅니다. 두 눈 반짝이며 이마와 콧등에 이슬 같은 땀방울까지 맺혀 가면서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녀석은 철인 28호인가 봅니다. 한참 자라는 열 살짜리가 허리가 아프고 무릎이 쑤실 리가 있나요. 이것 보세요, 흥얼흥얼 콧노래까지 날리고 있네요.
“아빠, 정말 그렇게 하실 거예요?”
갑자기 아들의 천둥 같은 목소리가 아파트를 무너뜨릴 듯 날벼락같이 날아옵니다. 할머니도 놀라고 아빠도 깜짝 놀랍니다.
“내가 뭘?”
“지금 주사위 던져서 나온 숫자보다 한 칸 더 갔잖아요.”
“설마 아빠가 그렇게 하겠니?”
“순 엉터리!”
녀석이 이기고 있어 감시가 소홀한 줄 알았는데, 날 선 칼날보다 예리한 아들의 눈초리가 저의 손길이 이상하게 움직이는 것을 그만 보고 만 것입니다.
“야, 너 지금 많이 이기고 있는데 한 번쯤 봐주면 안 돼? 부자지간에 너무하는 거 아니니?”
“이건 게임이잖아요, 게임! 아빠라고 봐줄 순 없어요. 빨리 두 손 들어요.”
“두 손을 왜 들어? 내가 항복이라도 했니, 그냥 진 것뿐인데.”
“진 것이나 항복이나 다 똑같죠, 뭐!”
“하나밖에 없는 아들 녀석이 하나밖에 없는 아빠를 그렇게 좀 못 봐주니?”
이걸 어떡합니까? 오늘 밤은 아빠가 서현이 동생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