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딩의 일기장 15
“서현아, 그렇게 따면 어떡하니?”
아빠는 화들짝 놀라서 아들에게 소리칩니다.
“이렇게요?”
“그렇지, 조금만 더 깊게 잡고. 아니, 그렇게 말고. 그렇게 하면 뿌리째 뽑히잖아!”
그런데 옆에 계신 외할머니도 제가 서현이에게 말한 톤 그대로 저에게 한 마디 날립니다.
“서현 아빠도 그렇게 따면 안 돼! 내가 하는 거 잘 봐!”
‘하이고, 어머님도 참 내! 옆에서 아들이 다 듣는데......’
아들 녀석이 상춧잎을 따는 자세가 영 불안해 보입니다. 저러다 뿌리째 뽑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서현이한테 소리를 빽 질렀는데, 외할머니 보기에는 제가 서현이처럼 불안해 보였나 봅니다. 성질 급하고 직설적이며 매사에 매조지가 확실하신 외할머니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제 뒤통수를 때립니다.
어디를 잡고 어떻게 이파리를 뜯어야 할지 알 게 뭡니까. 아빠나 아들이나 도시에서만 자란 것은 마찬가지인데, 언제 상추 이파리 한 장 뜯어 본 경험이라도 있겠습니까? 치커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난리 오 분 전입니다. 엉성한 우리가 심은 상추랑 치커리 등이 싹을 낸 것만 해도 신기한데, 이제는 그것들이 얼마큼 자라 따도 된다는 외할머니의 허락이 떨어졌으니, 저와 아들은 거의 흥분이 극에 달하여 까무러치기 일보 직전입니다.
도시 촌놈들이 흥분 안 하게 되었습니까? 입맛을 다시면서 두 팔 걷어붙인 채, 밭 안으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폴짝폴짝 뛰어들어 갑니다. 상춧잎이며 치커리 앞으로 달려갔지만, 그 앞에서 아빠와 아들의 손 매무새가 얼마나 엉성하고 난감하였겠습니까. 마치, 신생아실에서 갓 태어난 서현이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잡고 안아야 할지 난감해하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만지면 부서지랴, 안으면 뭉개지랴 겁부터 났습니다. 가슴은 콩닥콩닥 뛰고, 손끝은 어질어질합니다.
그래도 서현이와 제 손바닥에는 미숙하나마 갓 뜯어낸, 싱싱한 채소들이 흙이 묻은 채로 한 장 한 장 쌓이기 시작합니다. 덩달아 아들과 아빠의 기쁨도 한 장 한 장 쌓여 갑니다.
“여보, 이것 좀 상 위에 놔 줄래요?”
“서현아, 네가 가서 들고 올래?”
아빠에게 한 부탁을 아빠는 슬그머니 아들에게 넘깁니다. 그러자 뿔난 아내가 아빠를 향하여 한 방 날립니다.
“아휴, 당신이 해! 서현이가 가져가다 실수로 쏟으면 어떡해!”
저녁에 처가 식구들을 우리 집으로 초청하였습니다. 외할머니, 처제, 처남, 서현이의 사촌 누나인 현진이와 유진이 모두 우리 집으로 모였습니다. 출하 기념 파티가 열린 것이죠.
남편에게 삐친 아내는 손수 지은 따뜻한 밥과 삼겹살을 내 오고, 처제는 상추와 치커리를 깨끗하게 씻어 소쿠리에 담아 옵니다. 저는 아내가 지난겨울 호주 출장 갔을 때 사 온, 우리 부부만 몰래 마시려고 삼 개월 동안 숨겨 두었던 아이스 와인을 개봉합니다.
차려 놓은 상 위에 먹을 것들이 푸짐합니다. 한가운데에 놓인, 큰 소쿠리에 담긴 초록색의 상추와 치커리가 가장 풍성하게 눈 안으로 들어옵니다. 모두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지고, 입술은 귀밑까지 초승달 모양으로 찢어집니다. 입 밖으로는 미소가 삐질삐질 새어 나오고요.
와인 잔을 들어 한바탕 요란하게 부딪치고 나서, 일제히 삼겹살 쌈을 입안 가득히 넣고 깨물어 봅니다. 왁자지껄 오고 가는 대화 속에 고기와 상추와 치커리 씹는 소리도 요란합니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이 순간만큼은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잠 3:9)는 말씀도 안중에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우리 가정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도 이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실 겁니다.
사람 사는 맛이 이런 것일까요? 척박한 땅에서 무농약으로 쑥쑥 자란 싱싱한 상추와 치커리 잎 몇 개를 앞에 놓고도, 모든 가족이 이렇게 풍성해질 수 있으니 말입니다. 땅을 창조하시고, 그 땅에서 식물이 자라게 하시고, 그것을 온 식구가 한 상에 둘러앉아 먹게 하신 경이로우신 하나님께 오늘은 이백 퍼센트 땡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