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격투기와 나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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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los

2000년 초반 한국의 성장물에서 싸움은 결코 빠질 수 없는 요소이다. <말죽거리 잔혹사> 속 수시로 벌어지던 싸움 장면은 단연 청춘물의 상징이었다. 영화 <싸움의 기술>에선 노골적으로 싸움이 성장의 필요조건인 듯 그려낸다. 그때의 물리적 충돌은 지금처럼 엄격한 잣대에 놓이지 않았기에, 싸움은 일상의 한 부분이자 자신의 얄팍한 사회적 지위를 영위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변했다. 이제는 '한마디'의 언어폭력만으로도 고소 대상이 된다. 나는 이런 시대에서 자랐기에 몸싸움보다 말싸움이 익숙했다. 하지만 남자라면 누구나 깊은 곳에 야수성이 있다.(여자도 그럴 수 있다) 고등학교 시절 UFC 경기 영상을 보고 난 뒤, 나는 그 존재를 확실히 깨달았다.



그 당시 스포츠계에는 ‘맥그리거 열풍’이 불었다. 준수한 외모와 화려한 언변, 그리고 옥타곤 위에서 상대를 눕히는 경이로운 퍼포먼스는 MMA를 하나의 주류 종목으로, UFC를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 올렸다. 찬란하게 빛나던 그의 모습은 내 안에 ‘나도 싸움을 잘하고 싶다’는 욕망을 깨우기에 충분했다.



이 같은 욕망의 동기는 사람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한 번에 상대를 제압하고 싶을 수 있고, 누군가는 멋지게 피하고 싶을 수 있고, 누군가는 최소한의 호신술이 필요하다고 느낄 수 있다. 난 모두에 해당했다. 문명이 고도로 발달된 현대 사회에서 싸움을 할 일이 얼마나 있겠냐만은, 싸움을 잘해서 나쁠 건 없지 않는가란 생각은 지금도 유효하다.



싸움의 기술은 다양하다. 주먹으로만 때리는 복싱, 발을 주로 사용하는 태권도, 이 모두를 활용하는 무에타이와 킥복싱, 관절기를 활용하는 주짓수, 상대를 넘어뜨리고 넘기는 레슬링과 유도, 그리고 이 모두를 포괄하는 MMA(종합격투기)등. 과거에는 이들 간 우열을 논하기도 했지만, 최근에는 MMA가 최강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인 듯하다.



원래라면 MMA를 배우고 싶었으나, 가까운 체육관이 없어 차선으로 복싱을 먼저 배워보기로 했다. 복싱은 우리가 직관적으로 아는 때리고 피하는 동작의 근본인 투기 종목으로, 그 자체로 멋이 있었던 것이 그 이유였다. 그렇게 나는 동네 복싱장 문을 두드렸다.



복싱장을 등록할 때 다짐을 했다. 생활체육대회에 참가해 우승해 보고, 기회가 되면 프로 라이선스를 취득하고 싶다고. 이런 초심을 품고 약 2년 동안의 복싱장 생활을 매일 같이 하다 보니, 싸움의 기술뿐 아니라 그 외적인 측면에서도 많은 점들을 깨닫게 되었다.



사람들이 복싱과 인생을 대하는 태도와 심리를 관찰할 수 있었던 소중한 순간들이었다. 나아가 육체적, 심리적, 태도적 모든 면에서 한 층 더 성장할 수 있는 기회였다. <주먹이 운다>에서 강태식이 말한 "복싱은 인생의 축소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이제 내가 겪어왔던 '복싱과 나의 삶' 그리고 더 나아가 '격투기와 나의 삶'에 대해 얘기해보려고 한다.




<주먹이 운다>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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