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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여진 Jul 21. 2019

한국식 낭만에 대한 예찬

'로맨스'라는 단어로 표현 불가한 한국의 '낭만'

1. 나와 낭만

언젠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낭만은 있지만, 내가 스스로 만든 낭만은 없다는 생각. 그런 생각에 도달하자 낭만의 본질적인 의미조차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애초에 감상적이고 이상적인 태도를 가지고 사는 사람인데, 그럼 나는 낭만적인 사람인 건가. 그렇다고 하기엔 나의 현실은 내 낭만적인 꿈들과는 전혀 다른 찌질함인데.


결론은 무엇이겠는가. 나는 받아들였다. 낭만을 너무 멀리 생각하고 있었다고. 그리고 또 한 가지. 유럽, 여행 등 내 꿈들에 대한 낭만조차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이었다. 나에게뿐만 아니라 현실에도 없는 상상 속의 무언가를 현실에서 찾고 있었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낭만적인 포인트가 될 수 있겠지만 나에게는 아니었다. ㄱ을 ㄱ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ㄱ에 대한 내 해석을 ㄱ에게 강요하는 것이 진절머리가 났다. 그것은 낭만이 아니라 오만이었다. 내 사고체계에 갇힌 오만.


나는 현실과 제일 맞닿아 있는 나의 낭만을 찾고 싶었다. 그래야 나의 감상적이고 이상적인 태도에 대해 스스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고, 현실적이고 자조적인 태도 또한 엮어서 이해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2. 로맨스와 낭만

영화 '사과' 포스터다. 짤막하게 영화 내용을 소개한다면 문소리가 극 중에서 차이고 결혼하고 이혼하려다가 화해한다는 내용이다. 이때 사과(apple이 아니라 apologize)는 문소리가 발전해나가는 데 중요한 요소이다.


오래된 작품이기도 하고, 2005년 제작 완료했으나 2008년에 개봉된 작품이기도 해서 작품을 본 사람이 썩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내 편견이긴 하지만- 오래된 한국 영화답게 포스터 한 번 구리게 만든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디자인적인 것은 말하지 않더라도, 영화 내용과 상관없는 포스터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 영화가 참 좋다. 솔직하고 가식 없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반전 따위 없고 현실적인 결말이지만 그래서 등장인물들을 이해하기 쉽다.


오래되어서가 아니라 영화 전개가 촌스럽다. 참 투박하다. 어쩌면 주변에 누군가는 이렇게 살았거나 혹은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내 현실과 참 근접해 있는 낭만이라고 생각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킬링 타임으로 보던 서양식 로맨스 영화랑은 상당히 달랐다. 이럴 때에는 남자 주인공이 당차게 다가와 달콤한 말을 지껄이던데. 여자 주인공은 거기에 맞춰서 담대하게 받아치던데. 이런 것들이 없어서 오히려 좋아했던 것 같다. 나라도 저기서 저렇게 행동했을 것 같고, 어쩔 수 없진 않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느끼고 움직였을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이런 느낌을 나는 '로맨스'가 아닌 '한국식 낭만'이라고 이름 지었다.


현실적이고 퍽퍽하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구체적인 한 마디로 명명할 수는 없겠지만 대충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슬플 때 슬프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 그러다가도 한 번씩 쓴 맛을 뱉지 않고 삼켜내는 것. 너무 대충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내가 가지는 낭만은 그런 것이다. 인생의 달콤하다가도 쓴 면을 무서워하지 않고, 특히 부끄러워하지 않고 묵묵히 견뎌내는 것. 로맨스 영화의 환상적임은 덜하지만 수십 년 뒤의 모습까지도 상상 가능한 중년 부부의 모습이라고나 할까.


하고 싶은 말을 시원하게 해대다가도, 상대방의 모습에 할 말을 아끼기도 하는 모습. 그리고 현실의 우울함을 묵묵히 이겨내는 모습. 이를 가장 잘 표현하는 장면을 그리자면, 비 오는 날 새빨간 천막의 포장마차에 앉아 뜨끈한 어묵탕에 소주를 마시며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떠오른다. 그곳에서 오가는 이야기들은 마냥 불꽃이 터지는 배경에서 키스를 하는 남녀 같지는 않을 것이다. 키스를 하기 전 화장실에서 양치질을 하고 머리를 만지며 신경 쓰는 사람들의 멋없는 모습까지도 담을 수 있는 것이 바로 한국식 낭만이다. 내 환상에 대한 커다란 왜곡이 깨지고 난 뒤부터는 낭만이 로맨스보다 더 와 닿았다.


3. Happily Ever After과 낭만

나의 유치원 때 기억 중 그나마 생생하게 인지하는 기억이 있다. 내가 아플 때마다 할머니께서 비디오 가게의 디즈니 공주 영화를 빌려와 틀어주시곤 했던 것이다. 나는 누워서 그것을 볼 때의 느낌을 기억한다. 공주의 이야기. 그것은 로맨스에 가까웠다. 맨 마지막 장면에서는 항상 "Happily Ever After(평생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나는 그 동화들 말이다.


나는 그 동화를 보고 나면 그 문구 뒤의 일들을 혼자서 상상했다. 상상 속에서는 왕자와 공주가 늙어서도 웃으며 사랑하고 있었다. 물론 동안인 얼굴에 으리으리한 성에서 행복한 생활을 한다는 조건도 딸려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꽤 확신할 수 있다. 동화들의 마지막 장면에서 왕자와 공주가 막 사랑을 이룬 그다음을 보여주지 않고, 단지 "Happily Ever After"이라는 문구로 막을 내리는 이유에 대해서. 사랑을 쟁취해냈을 때만큼 그 뒤가 자극적이게 달콤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혼했을 수도 있고, 성격차이로 매일 다툴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 뒤의 장면들에 대해서는 커가면서 배워가야 하는 숙제였다.


그렇다고 해서 달콤하지 않은 것이 행복하지 않다의 동의어는 아니다. 맵고 짜고 쓴 것들도 그만큼의 자극과 교훈을 전달하기에. 그런 것들은 로맨스가 아닌 낭만에 담겨 있었다. 공주가 드레스를 벗어던지고, 마스카라가 번질 만큼 울기도 하는 장면들이 낭만에 담겨 있었다. 그리고 낭만의 영화 끝에는 폭삭 늙은 공주가 마른 눈으로 왕자의 관을 바라보고 있지 않을까 싶다.


"Happily Ever After"라는 강박에서 벗어나서, 주체성을 찾은 주인공이 살아가는 것이 낭만이다. 완벽히 세팅된 모습으로 러닝을 하는 것이 아니라, 땀을 뻘뻘 흘리기도 하며 엉성한 자세로 뛰다가 쉬기도 하는 것. 인생이라는 긴 경기를 임할 때의 낭만이지 않겠는가. 나는 그러한 낭만에서 엉성함을 인정하고 더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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