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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여진 Jun 14. 2019

대화의 결이 같은 사람

영화 ‘비포 선라이즈’


영화는 단조로웠다. 길을 따라 걸으며 두 사람이 대회하는 바를 꼼꼼히 카메라에 담았다. 난 그게 좋았다. 그들과 같이 대화하는 사람처럼 하나의 토씨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영화에 의미를 담아 관람하는 감상자의 태도가 아니었다. 나는 그들의 대화를 이해하고 있었다. 머리를 굴려가며 생각 회로를 피곤하게 만들었다. 그 피곤함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꽤나 나의 뇌를 섹시하게 만들 정도의 그것이었다. 왜 있지 않나. 지금 하는 대화가 상당히 마음에 들 때, 이 대화를 하고 있는 내 상태, 모습이 나름 괜찮아 보일 때.


그러나, 내가 이렇게까지 대화에 집중하게 된 것은 나의 노력이라기보다, 주인공 남녀에게서 나오는 매력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매력들은 그들의 대화에서 만들어졌다. 그들이 해가 뜰 때까지 나누었던 대화들은 솔직하고, 무엇보다도 잘 어울렸다.


대화의 ‘결’이 같은 사람들이었다.


무슨 말이냐면, 그냥 대화가 잘 통한다는 말이다.

만약 대화에 표면이 있다면, 그 표면의 거칠고 부드러운 부분이 상당히 비슷한 대화라고 할 수 있다.


적당한 유머, 그에 대한 재치 있는 반응.

말의 자연스러운 오고 감.

생각과, 다른 생각들의 충돌이 아닌 공존.

상하관계없는 수평적인 말들.


우리도 누구나가 다 느끼지 않는가. 대화가 잘 통할 때의 행복함을.

그때에 느끼는 행복함은 아마 흔치 않은 기회여서일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이.


그렇기에 영화 속 셀린의 말은 좀 더 곱씹을 만하다.


대화의 결이 통하지 않아 엇나가는 사람들.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무언가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수박 겉핥기 식 말을 하는 사람.

내가 핥고 싶은 본질에 전혀 가까이 가지 못하는 사람.


그를 두고 ‘군중 속 고독’이라 하던가. 군중이 아니더라도 그렇다.

한 사람과 대화를 하는데도 그 결이 맞지 않다면 벽이 있는 것처럼 막히는 기분이다.


모든 사람들이 각기 다른 개성을 갖고 있기에 대화의 양상이 달라지는 게 당연하다는 박애주의적인 말은 하고 싶지 않다.


어쩌면 그것은 박애주의라기보다 이기적인 말일지도 모른다. 왜냐면, 대화의 ‘결’은 실은 대화 참여자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뜻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표면이라고 표현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결’은 노력의 과정이다. 거칠고 부드러운 부분을 맞대어 결을 비슷하게 맞춰가는 과정. 내가 경험한 것들을 말하고, 상대방의 경험과 감정을 듣는 아주 피곤한 과정.


이러한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들과의 대화는 그 사람들의 성격이 나와 달라서가 아니라, 그들의 결이 상당히 나의 표면과 붕 떠있는 부분이 많아서이다. 즉, 상대방이 자신의 결에 무조건적으로 맞추길 바라는 이기심이라는 것이다.


나와 똑 닮은 사람은 없다. 완벽한 통찰을 해주는 사람은 없다. 듣고, 말하고를 반복하는 대화 속에 나의 결에 대해 생각해주는 사람이 필요할 뿐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볼까.


(A)

a: “떡볶이는 맛있는 것 같아.”

.

b: “그거 난 맛없던데. 너무 매워서. 왜, 나는 매운 걸 못 먹잖아. •••”


단적인 예지만 확실히 알 수 있다. b의 문장 속에는 자기 자신을 지칭하는 말이 수차례 들어가 있다. a의 발화에 대한 의문점보다 자기 자신의 세계가 중심이 되어 있는 붕 떠있는 대화.


(B)

a: “떡볶이는 맛있는 것 같아.”

.

b: “왜?”

.

a: “떡이 쫄깃한데, 거기에 자극적인 양념도 배어있잖아.”

.

b: “난 그런 이유로 갈비찜을 좋아해. 갈비찜도 그렇잖아. 고기에 자극적인, 단 양념이 배어있는 거.”

or

b: “나랑 정반대의 생각이네. 나는 그 이유로 떡볶이를 싫어하는데.”


대화 주제가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 혹은 상대방의 발화를 머릿속에서 구현하고 그것에 대한 반응을 이야기하는 것. 떡볶이를 좋아해 달라는 말이 아니다. 떡볶이에 대한 호불호로 이분법적인 싸움을 하자는 것도 아니다. 머릿속으로 생각 한 번 더 해달란 소리다. 나에 대한 생각.



결을 맞추는 건 참 단순하고도 매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발화에 대해 한 번 더 머리를 굴려서 생각을 끄집어내야 한다는 건데, 그건 웬만한 애정이 아니고서야 이뤄내지 못한다. 즉, 대화는 애정 어린 표현이다.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내가 어떤 행동을 할 건지, 앞으로 어떻게 너랑 지내고 싶은지. 모든 것들을 표현할 수 있는 치열한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남녀 주인공이 절대 다시 만나지 않기를 바랐다. 전화번호 교환이나 편지를 주고받지 않겠다는 그들의 약속에 나는 끊임없이 동의했다.


얼마나 결이 같은 대화를 갖기가 힘든지를 알기 때문에. 그들이 후에 만나 서로에게 실망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배려 많고, 애정 많은 대화를 빛바래지 않게 잘 간직하고 있기를 바랐다. 뭐, 영화 ‘비포 선셋’이 후속작으로 이미 나왔으니 할 말은 없지만.


모든 대화가 결이 같을 순 없다. 자연스럽게 통하는 사람들이 있고, 아니라면 최선을 다해 생각하고 결을 맞추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 외에 결이 맞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면, 글쎄. 어떻게 대처할지는 개인마다 다르지 않을까.


나는 결을 맞춰주다시피 하다가 편해질 때쯤 조정해가는 사람인데, 결을 맞춰주는 것에 너무 익숙해진 상대방을 대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나도 내 결을 보여주고 싶은데 그게 안되니. 그렇다면 방법이 있나. 내가 맞추고 있던 그 결조차도 내려놓고 조금씩 붕 뜨게 만드는 게 편하지 않겠나. 혹은 진득하니 맞춰주는 것에 적응해야 할지도.


아무튼 간 아직 대처 방법에 대해서는 정확한 정의를 내리지 못했다. 그래서 제시와 셀린이 작별 인사를 미리 했는지도. 이에 대한 고민 없이.


하지만 그들도 사람 아니겠는가. 공원에서 사랑을 나누고 6개월 뒤의 약속을 믿으려고 한다는 것이. 다시 한번 그들의 결을 맞춰보겠다는 의지, 애정 어린 마음이 보일 뿐이다.


제발 다시 만나지 않길 바랬는데. 그들의 선택이 그렇기에 나 또한 다시 희망을 가지고 후속작 ‘비포 선셋’을 보러 가야겠다.


이게 그들에 대한 희망인지, 내 개인적인 결들에 대한 희망인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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