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 너머에 있는 소속의 은혜
어릴 땐 차멀미가 참 심했다. 지금도 직접 운전하지 않으면 다른 차를 타는 일은 여전히 불편하다. 서울에서 부산을 가더라도 직접 운전하는 것이 내겐 오히려 더 편할 수 있다. 가끔은 과한 배려로 운전대를 빼앗기기도 한다. 그러나 웬만하면 끝까지 고집한다. 그것은 사실 차멀미를 피하기 위한 나름의 고육지책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학교에서 관광버스를 이용해 단체견학을 다녀오던 길이었다. 오래전 일이라 어떤 상황인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버스에서 내려 힘들어하고 있었고, 담임선생님이 부리나케 약국에서 멀미약 같은 것을 사 오셔서 내게 먹여주셨다. 사실 학창 시절 내내 선생님들에 대한 친밀감을 느껴본 적이 별로 없다. 한 반 정원이 80명을 육박하던 시기였으니, 나처럼 조용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던 내향적인 아이는, 담임선생님으로부터 눈길 한 번 받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인지 당시 선생님의 걱정 섞인 말투와 간호는, 내게 선생님과의 '개인적인 만남'이라는 큰 의미로 남았다.
바울사도는 다메섹도상에서 극적인 하나님과의 조우를 경험한다. 모세 역시 가시떨기나무 불꽃으로 임하신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난다. 이 외에도 성경은 절대자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이야기하는 곳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고, 내 삶의 주인으로 인정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함을 얻게 된다. 믿음 공동체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신앙을 더욱 견고히 하라고 권면한다. 우리는 그 만남 속에서 크신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알게 된다고 말한다. 물론 만남은 나의 공로가 아닌 은혜라는 전제가 포함되어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만난 하나님을 이야기한다. 하나님과의 개인적이고도 친밀한 만남이 있다는 어떤 사람의 주장에는 믿음의 강도가 세게 전달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만남의 방법, 표현, 인식의 정도는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모두의 하나님임과 동시에 나만의 하나님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강렬한 체험은 감정의 차원일 수 있고, 신앙의 본질적 관계 즉, 구원과 무관할 수도 있다.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나를 찾아오셔서, 내게 말씀하신다면 어떤 느낌일까?' 그리스도인들이 흔히 이야기하듯이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주셨다. 또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다'가 아니라 '모세나 바울처럼 실제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해 본다. '어떤 사람이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하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 그 밭을 샀다.'고 하는 마태복음 13장의 예화대로 천국의 실제를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께 올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초대 그리스도인으로 순교당한 수많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믿음의 실제를 경험했기에 그 행함이 가능했다는 데에는 추호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여기서 '나는 왜 모든 것을 팔고 싶을 만큼 뜨겁지 않을까?' 하는 질문이 나오게 된다. 심지어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없었다는 것에 자괴감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은 개별적이고 다양할 수 있다. 우리 모두가 베드로나 사도바울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은 서두에 언급한 대로 '은혜'가 전제되어야 하고, 나아가 단회적인 사건을 넘어 매일의 일상 속에서 말씀을 읽고 기도하며 주님과 교제하는 지속적인 관계를 의미한다. 두 번째는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세상 속에서 읽어내고, 동행하겠다는 선포가 인격적인 만남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 싶다.
초등학교시절 대부분의 선생님과 개별적인 만남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나는 6년의 모든 과정을 마치고 함께 졸업한 그 학교의 졸업생이다. 나그네 같은 우리 인생길에 하나님과의 특별하고도 실제적인 만남이 있으면 더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 이미 우리는 주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호칭을 받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 부름 받아 마지막 때에 우리 눈의 눈물을 닦아 주실 하나님이 계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