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 없이 맨 몸으로 길을 찾는 방법
지도를 볼 때 내면에 잠재되어있는 평균 이상의 공간감각을 실감한다. 방향과 공간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만큼 한 번 간 길을 기억해내고, 지도를 보면 어디에 있고 어느 곳으로 향해야 하는지 딱 온다. 감이라는 것이. 그런 나도 길을 잃는 구간이 있다. 인생에 대한 방향은 언제나 나침판의 핀이 빙빙 돌고 있는 상황이다. 현실에서의 길 찾기 만큼 자신 넘치는 일이면 얼마나 좋을까. 지도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할 수 있는 것은 누군가가 갔던 길을 지도삼아 따라 밟아 나가는 것과 인기척이 얼마 없어 잡초가 무성한 길 중 선택하는 것이다. 그 선택은 오롯이 내 탓이 될 것이고…
누구보다 평범한 가정에서 평균 이상의 교육을 받았던 나에겐 인생의 지도란 공부를 잘해서 인 서울 하는 길 밖에 없었다. 다른 갈림길은 쳐다도 보지 않고 실패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학교가 서울시립대야? 성공했다." 나는 일종의 성공이라는 길을 걷고 싶었다. 그리고 그 길이 지금의 내 발아래 있다고 생각했다. 으쓱 어깨를 올리며 이미 성공한 사람인 척 폼을 냈다. 졸업의 시기는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한 것은 으스댄 이력밖에 없었으니 내게 이렇다 할 번쩍이는 것도 없었다. 그때부터였다. 내 손엔 지도도 제대로 작동하는 나침반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
대책을 마련해야 했고, 내게 주어진 갈림길은 몇 없었다. 그중 가장 잘 알고 지금껏 체화된 방법은 쉽게 선택됐다. 나는 사람들이 대부분 가는 길로 들어섰다. '과탑 하는 선배가 이 길로 갔다니까. 나도 한 번.' 하지만, 간과한 것이 있었다. 과탑 선배의 뇌가 나에게는 없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다른 유기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내가 그쯤은 될 것이라고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었다. 대중이 가는 길을 선택하며 안심했으면서도, 여전히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대기업에도 취업해 돈도 벌게 되었다. 이상하게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 시간은 야속하다. 겁나 빨리 흐른다. 나는 길을 잃었다는 것을 인정했고 5년 차가 되었다. 텅 빈 속에 허탈감과 무기력감이 몰려왔다. 지면에 서있지만 동해 바다에 있는 듯했다. 서서히 주저앉는 중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삶은 지루함을 넘어 무의 감각으로 나아갔다. '돈 벌었어. 그래서 뭐 어쩔 건데?' 삐딱한 마음이 꼴 보기 싫은 비관적인 사람으로 만들었다. 이대로 가라앉을 것인지 다시 일어나 어떤 길이든 가볼 것인지 선택해야 했다. 선택해야 한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알았을지도 모른다. 다만, 미루었다. 아직은 잘 모르겠으니까. 선택은 언제나 두렵고 그 뒤의 결과는 알 수 없으니까.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야 할 시간이 왔다. 툴툴 털고, 일어나 바닥을 바라봤다. 누군가가 남긴 발자국들. 저걸 따라갈까? 한편 풀이 무성한 길에는 듬성듬성 풀이 정리돼 있는 듯 아닌 듯했다. 저기로 가야 할까?
여전히 잘 모르겠다. 나의 길을 확고히 정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대단한 일이었다. 스스로가 지금까지 밟아왔던 길과는 다른 길을 시도해보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사주도 신점도 나에게는 지금의 길이 최고라고 한다. 이렇게 힘든데 이게 최고라고? 생각보다 최고가 쉽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도 그 말에 발목이 잡혀 전혀 다른 길을 가는 게 두려워지고 말았다. 발목은 왜 이리도 쉽게 잡히는 것인가… 엄마도 아빠도 안정적인 이 길이 옳은 길이라고 한다. 홀로 다른 길을 가겠다고 바라는 마음은 어딘가 애잔하다. 긴 마라톤을 뛰고 있는데 응원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 제기럴, 스스로 응원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여전히 길을 잃은 상태로 내가 어떤지도 제대로 가늠하지 못하고 있다. 가끔은 내가 눈을 뜨지 못한 것은 아닌지 헷갈린다. 뜬 눈이라면, 앞이라도 보여야 하는데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게 눈을 감은 건지 내면의 미세먼지가 심각한 것인지 싶다.
나는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어떤 곳이든 앞을 보고 어딘가로 나아가기 위해 안간힘을 쓸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얼마 없어 보인다. 그저 방향 감각은 잃었지만, 그 안에서 이리로 저리로 유영하다 보면 나의 세계는 넓어지게 될 거라고 믿을 뿐이다. 그러다, 이제 조금 알 것 같은 순간이 오기를 기다린다. 오늘도 지도 없이 맨 몸으로 헤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