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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약과 Jan 02. 2022

잘하는 건 정말 중요한 것일까?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어떻게 찾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서점에서 책을 뒤적인다. 책들을 나란히 펼쳐본다. 무언가를 찾기 위해. 나의 강점을, 잘 생각하는 방법을, 최고가 되는 방법을, 그것에 대한 해답을 찾아 나선다. 그럼 책에서는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방법을 알려준다. 아직 가스활명수를 먹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 여전히 속은 더부룩하다. 책들 사이로 더 근본적인 부분으로 다가가는 방법을 찾아 나선다. 


이를 테면, 나 다운 삶을 사는 방법. 나는 네가 아니고 쟤도 아닌 내가 되고 싶다. 그런데 ‘나답다’라는 건 뭘까? 내가 좋아하는 일이 있다는 것. 여기서 좋아한다는 기준은 무엇일까? 만족하는 삶의 형태는 이런 모습이라는 것. 어떤 삶을 살면 만족할 수 있는 걸까? 불만족스러웠던 순간들로 삶의 지평이 물들여져 있다. 기억이란 것은 이상하다. 만족과 행복의 순간을 지워내고, 그 위에 불행을 얹어내 버린다. 제 멋대로, 기억을 뒤섞는다. 나의 기억은 온통 그런 기억들 뿐이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아.’ 하는 순간들. 서점에서 뒤적인 책들의 의견은 대게 이곳으로 수렴했다.


'경험을 많이 하세요.'


이곳에 수렴하면 나는 체념과 가까운 듯한 한탄을 쏟아낸다.


“하... 선생님 저도 안다고요. 그런데 어디론가 가더라도 막 가면 안 되잖아요. 막 가다 정말 낭떠러지라도 만나면 책임질 거야?”


그 낭떠러지에 몰리고 몰려 내가 떨어지게 될 거라고 생각하니 눈앞이 아찔해진다. 내겐 나침판이 필요하다. 어디로 가면 될 것인지, 이곳으로 향하면 그곳이 적어도 낭떠러지만은 아니라는 표지판 같은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모두가 지도를 펼쳐들며, 이곳저곳을 가보라고 권한다. “아무 데나 찍고 전진해봐!” 그것이 정답이라면 내겐 가혹한 정답에 불과하다. 안타깝게도 나의 지갑은 얄팍하다. 그러니 나는 이곳저곳을 모두 가볼 능력이 없다. 이곳저곳 중 신중히 몇 개, 어쩌면 단 하나를 추려내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선택이 절벽의 방향이 아니기를 빌어야 한다. 선택은 신중해지고 신중한 만큼 시간이 걸린다. 결정은 뒤로 미뤄질 수밖에 없다. 나는 선택하고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없다. 인생은 해답지가 없어서 자꾸만 길을 잃는 기분이다. 여긴 어디일까.


어쩌다 보니 직장인 5년 차가 되었다. 그 삶은 나른해 보일지도 여유 있어 보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안정적이고, 어떤 이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일 것이다. 타인의 시선에 맺힌 나는 멋지고, 여유만만해 보이지만, 정작 스스로는 ‘썩었다’라는 생각이 든다. 여기저기 썩고 곪아 부패하고 있다. 어서 고치지 않으면 큰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왜 썩었지?’ 이유를 모르겠다. ‘어떻게 고치지?’ 방법도 모르겠다. 스스로 고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주저앉아 있을 때 친구의 말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스스로 할 수 없다면 전문가를 찾아가 봐.’ 지금 나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모르고 영혼이 없는 삶을 살고 있는 나의 모습. 진정한 썩음은 이런 것이다. 속이 비어있는 인간의 모습. 그때 나는 낭떠러지 앞이었다. 다만, 아무도 내가 낭떠러지 앞에 있는지 몰랐을 뿐. 심지어 나조차도. 


똑똑. 어서 오세요. 그리고 곧이어 만성 우울증 진단명과 함께 안녕히 가세요. 그로 인한 불안정적인 사고. 2장의 종이와 15분의 진료로 나의 상태가 설명됐다. 어이가 없었다. ‘뭐가 이리 쉬워?’ 믿기지 않았다. 나 같은 사람이 왜 우울증에 걸리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분명 잘 웃고 잘 떠드는데. 내가 왜 우울증이야? 하지만, 사실은 안심하고 있었다. 내가 많이 힘든 이유를 알았으니까.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이지만, 기대고 싶은 글자를 손에 쥐고 병원에서 나왔다. 나는 우울증이었어. 그래서 그랬던 거였어. 하지만, 믿기진 않아. 여전히 거짓말 같아. 그렇지만 어쩐지 위안이 됐다.


약을 처방받았다. ‘이 약을 먹으면 이곳으로 가시오 하고 길이 보이려나? 그럴 리가 없는데?’ 역시나 믿지 않으면서도 내심 기대하는 마음으로 약을 삼켰다. 더 이상 기댈 곳이 약 몇 알뿐었으니까. 약을 먹어도 차도는 보이지 않았다. 당연하다.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길도 보이지 않았다. 당연하다. 약이 무슨 만병 나침판 일리가 없으니까. 그래도 약은 놓을 수 없었다. 약을 먹으면서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나는 우울증이라 그래. 그러니까 나는 우울증이라 그런 거야.’라고 애써 나를 위로했다. 약을 먹고 2달, 아니 한 3달이 지난 후, 사고의 변화를 체감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지 않고 있네?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불안에 떨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의 행위들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우울감과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불확실함은 약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그럴 때면 나는 다시 낭떠러지 앞을 향해 나아갔다.


‘괜히 태어났어.’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나의 행복을 바랄 뿐이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큰 일인 줄은 몰랐다. 그곳으로 가는 길은 마치 미세먼지 최악의 날과 같다. 내 소원이 생각보다 이루기 어려운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멈추고 싶었다. 하지만, 시계는 계속 움직였다. 틱탁 틱탁. 빌어먹을 매정한 시간. 세상에 얼마나 많은 일과 경험을 쌓을 수 있는지 모르지 않는다. 다만, 방대한 시장 안에서 효율적으로 나에게 잘 맞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고 싶을 뿐이다. 이제 무의미한 일자리와 삶으로부터 벗어나 웃으면서 "그래 오늘도 살길 잘했어!" 하는 삶을 살고 싶다. 근데 그게 이렇게 까지 어려울 줄은 몰랐다. 나는 줄곧 우울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단지 쓸모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하지만 그건 작은 이유가 아니었다. 삶의 무의미함은 가슴을 먹먹해지도록 만들었다. 그것을 안고 사는 삶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괜히 태어났어가 태어나길 잘했어로 바뀌는 순간이 올까? 그 길과 방법은 여전히 모른다. 역시나 약을 먹으며 책을 읽고 이런저런 방법들을 추려내 시도해보는 수밖에. 학생 때의 삶은 정해진 해답지가 있는 삶이었다. 어른이 된다면 그 틀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로워질 줄 알았는데, 막상 성인이 되어 만난 것은 황량한 사막이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줄이야. 지금까지 왔던 길이 잘못되었을 줄이야. 서른이 다가오는 지금 새로운 방향으로 길을 틀을 용기가 필요하다. 나는 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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