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흡연 레이스
어릴 적 아빠는 담배를 폈다. 엄마는 식당에서 먼저 몸을 일으키는 아빠의 등 뒤로 우리에게 거래를 했다. “아빠 담배 피는 거 보면 5천원 줄게.” 그 때는 돈의 가치도 모르고 딱히 돈이 필요하지도 않았으면서 0이 3개나 붙는 지폐 한 장을 받는 다는 기쁨은 알고 있었다. 고개를 공기 그릇에 박고 허겁지겁 먹은 뒤 아빠의 뒤를 슬금 슬금 밟았다. 그럼 저 멀리 아빠의 손에 반짝이는 빨간 불빛을 보고 유레카를 대신해 “아빠! 담배피지!” 하며 기뻐했다.
시간을 흘러 아빠는 어른의 흡연이 아이의 흡연 동기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담배를 끊었다. 대신 담배를 피지 않는 만큼 술로 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아빠의 배는 점점 자라나는 중이다. 아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빠의 뒤를 이어 담배를 핀 가족은 남동생이었다. 마치 이어달리기 레이스를 하듯 동생은 뭐가 그리 급하다고 중학생 때부터 담배를 뻐끔거렸다. 구름 과자를 만들고 올 때면 엄마는 교복에서 나는 냄새에 눈을 찌푸리고, 동생은 피씨방에서 베었다며 허접한 거짓말을 뱉어냈다. 그러다 한 번씩 손가락 냄새를 검사하려는 엄마와 그것을 피하려고 괜히 화를 내는 동생을 보곤 ‘저게 그리 중요한가…’하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된 나는 담배에 대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술을 마시다가 남자친구의 담배를 몰래 훔쳐 피거나 친구들의 돛대를 쟁취하는 건 술자리에서만 느낄 수 있는 하나의 기쁨이었다. 이런 기분에 담배를 피는 구나 하고 느꼈지만 나의 흡연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일시적 행위이자 일탈의 기쁨에 그쳤다. 담배를 입에 물어 불을 붙이면, 주변의 시선이 따가웠다. 보이지 않는 꼬리표가 붙은 듯 사람들은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다. 남자 동기들처럼 그저 담배를 피고 있을 뿐인데, 여성인 내가 담배를 피는 것을 당연하게 보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 눈빛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다 시간은 또 흘렀고 직장인이 되었다. 회사 생활은 날이 갈수록 어둠의 빛을 띄기 시작했고 나는 어디가로 추락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누구나 하는 직장 생활이 버겁다고 느껴질 즘, 친구들과의 여행을 가게 되었다. 친구의 전자담배에 호기심을 갖자 친구는 일회용 전자담배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가벼운 호기심으로 예전의 술자리에서 느꼈던 기쁨을 느끼고자 편의점에서 전자담배를 하나 골랐다. 밤이 되었고 신체 알코올 농도가 점점 짖어지기 시작하자, 우리는 편의점에서 산 것을 하나씩 꺼내들어 베란다에 나란히 섰다. 작고 긴 것이 라이터 같이 생겼는데 입을 데고 숨을 마시면 맛있는 향이 나는 연기가 나왔다. 나는 연초의 매캐한 냄새가 없는 전자담배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일주일가량 핀 담배는 더 이상 뿌연 연기를 내뿜지 못하는 쓰레기가 되었다. 수명이 다한 담배를 일회용 쓰레기 통에 툭하고 버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날, 전자담배 가게에서 기계와 액상을 구매하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길거리의 담배 연기를 그토록 혐오하던 내가 담배를 구매했다는 사실에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시간은 언제 그랬냐는 듯 흡연의 삶에 적응하게 했다.
나는 그렇게 가족의 담배 레이스에 합류하게 되었다. 하지만 가족의 누구도 알지 못하는 레이스 참가자가 될 예정이다. 아직은 여성의 담배에 대한 혐오감이 타인을 넘어 지인에게 번지는 것이 두렵다. 여성의 담배도 남성의 담배로 모두 공평한 시선에 오를 때까지 나는 감출 것이다. 그것이 아직 우리의 가족에게는 당연하지 않기에 나는 익명의 레이서가 되었다.
담배를 피면서 좋은 습관이 생겼다고 하면 누군가 아이러니하게 생각할 것이다. 이미 담배를 피는 행위가 나쁜 습관이라는 사회적인 시선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에겐 탈출구이자 도피처이고 휴식과도 같은 시간들이 생겨났다. 우선, 아침에 일어나면 아침 운동을 하고 담배를 피러 가는데, 그 때 햇빛을 받으며 마시는 상쾌한 공기가 하루의 시작을 알린다. 일어나자마자 담배를 피는 이유는 잠에서 깨어나기 위해서이다. 지금은 이 행위의 이유를 햇빛을 받으러 가기 위함이라고 말하겠다. 아침에 온몸으로 햇빛을 받는 것은 정신 건강과 신체적 사이클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이제 아침에 일어나 운동을 하고 옥상에 올라가 자외선을 쐬며 흡연을 하는 것은 하루를 시작함에 있어 중요한 루틴의 일부가 되었다.
두 번째 좋은 습관은 담배를 피기 위해 움직임이 많아졌다는 사실이다. 하루에 많은 시간을 의자에 앉아있던 예전과는 달리 기분의 환기를 위해 자리에 일어나 옥상으로 향하면서 나의 움직임은 증가했다. 몸에게 휴식을 더하는 나의 행위로 인해 사색의 시간 또한 늘어났다. 옥상에 올라가 햇빛과 나만이 함께하는 시간을 통해 오늘의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생각하고, 방금 전 읽은 책에 대한 생각이나 그림에 대한 생각이 늘어났다. 스스로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 경험으로 나의 생각은 점점 깊어지고, 유연해져 영역을 넓혀가고 있음을 느낀다. 스스로 쉼을 선택하는 경험이 이토록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사색의 시간답게 옥상을 향할 때면 핸드폰을 가져가지 않는다. 오직 생각을 하기 위함이다. 이 시간만큼은 방해받고 싶지 않기에 나는 전자담배만을 손에 쥐고 옥상을 향한다. 그러니 담배는 어쩌면 나에게 해로운 것이 아니라 이로운 것에 해당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무심코 시작한 흡연 생활에서 이토록 고마운 점이 많아서 아직까지 나의 흡연 생활은 지속되고 있다.
흡연을 하면서 연전히 새로운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친구와 함께 등산을 갔을 때였다. 무심코 꺼낸 전자담배를 보며 친구가 나에게 ‘아저씨’라고 말을 했다. 내가 성차별적 발언이라고 언급하자, 친구는 말을 바꿔 ‘아줌마’라고 했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그 점이 이해되지 않는다. 흡연의 대상이 ‘아저씨’와 ‘아줌마’가 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 일까? 세상은 여전히 여성의 흡연에 대해 꼬리표를 붙이려고 한다. 사회는 성별에 따라 흡연의 의미를 사실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거울에 의해 변형되어 보여지는 것이 아닐까.
흡연을 옹호하고 싶지는 않다. 몸에 해로운 것을 부추기고 타인의 흡연을 응원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정신 건강에 이롭다고 말하기에도 개인적 의견일 뿐 애매한 구석은 여전하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이로운 행위가 되었으니 그것만으로 만족하고 있다. 흡연이 이롭다고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흡연을 대체할 다른 행위가 나타난다면 나는 쉽게 금연에 성공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 전까지는 흡연이 주는 기쁨에 취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