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임화경 - 그림· 이정운
서점을 운영하면서 아무래도 제일 좋은 건, 새로운 인연에 대해 집착을 하거나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어떤 이든 서점에 불쑥 들어와 자신이 원하는 책을 찾아보고 마음에 맞는 책을 발견하면, 그저 책방을 지키고 있는 나에게 계산을 요구하는 정도의 접촉. 내가 서점을 하면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 중 하나다.
서점을 운영하기 전에 나는 여러 관계에 감정을 생산하고 소모해야 한다는 규칙을 만들어내고 지키느라 지쳐가고 있었다. 사회생활을 위해 만나는 모두가 나를 좋아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최대치의 좋은 관계를 만들어 두자는 스스로의 약속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무게였다.
“안녕하세요, 사모님. 오랜만에 전화 주시네요. 3년 만이죠? 잘 지내시죠? 무슨 일 있으세요?”
“아, 네. 실장님. 아직 저를 기억해주시네요~ 감사해라. 다름이 아니고 전에 발코니 확장 부분에 문제가 있나 봐요. 아래층 벽에 결로처럼 물줄기가 잡혀요. 아무래도 한번 방문해 주셔야겠어요.”
“아, 그러세요? 당연히 가야죠. 설비팀 데리고 다음 주 중에 찾아뵐게요.”
“네, 감사합니다. 역시 실장님이시네요. A/S 기간이 많이 지나서 안 오실 줄 알았어요. 오실 때 전화 주세요. 기다릴게요.”
11년 동안 건축 관련 사업체를 운영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성격이 조금 까다로운 고객과의 만남은 다반사이고 한 두 번은 엄청난 비밀이 보장되어야 하는 사람과의 작업도 있었다. 때로는 세상에 이런 부류의 삶도 있을까 감탄할만한 오늘을 사는 고객도 있었다. 많은 사람과 부딪치고 다양한 관계를 이어가면서 느낀 건, 그들이 나에게 원했던 게 사실 별 것 아니라는 것이다. 합리적인 견적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내는 것. 그리고 친절한 모습으로 자신의 의견을 반영해 줄 것. 이런 원칙들은 내가 일한 만큼의 이윤을 얻기 위해 치러야 할 기본적 태도라고 생각하면 사실 못할 것도 없고, 어려울 것 없는 것들이다.
이 조그만 이치를 깨닫기까지 수년이 걸렸지만 결국 나는 숙련된 표정과 정돈된 화법으로, 그리고 소통에 특화되었다. 조금 과장되지만 절제된 프로의 제스처로 최소한의 노력을 통해 많은 고객들의 러브콜을 지속적으로 받는 디자이너가 되었다.
“저는 한 번도 실패를 해 본 적이 없어요. 제가 도전했던 시험에 한 번도 떨어져 본 적이 없고, 갖고 싶은 것들을 놓친 적이 없었죠. 사랑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실패나 패배, 이런 것들을 잘 몰라요. 아! 소소하게 놓친 것들이야 많죠. 저 공모전도 많이 떨어져 봤고요. PT도 많이 떨어져 봤어요. 하하. 제가 말씀드리는 건 그런 소소한 것들은 제쳐두고 말씀드리는 건데… 이해가 가세요?”
그러는 동안 새로운 제안들이 줄을 이었다. 약간의 변화는 늘 있지만 그런 기회들은 더 많은 분야로 진출할 수 있게 도와줘서 어려운 줄도 모르고 일에 매달렸다. 사소하게 생기는 충돌과 스트레스는 어떤 ‘큰 것’을 생각하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때로는 돈이 되기도 하고, 명예가 되기도 하고... 내게 ‘큰 것’이 되어줄 것이라는 막연하고 멍청한 기대.
막연히 실체가 없는 어떤 것을 위해 매달리다가 나는 결국 내 마음을 무시한 대가로 원래의 나를 잃어버렸다.
결코 잡히지 않는 중심 줄을 가상으로 달아 놓고 무거운 스트레스와 긴장을 메고 뛰는 이상한 또 다른 내가 새롭게 태어났다. 그렇게 고정되었다. 소통은 불통이고 ‘만들어진 나’는 진짜 ‘나’보다 더 커진 위상으로 나를 지휘하였고, ‘원래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겁먹고 움츠러드는 것 뿐이었다. 이 시기에도 역시 ‘표피의 나’는 당당히 밖으로 나가 사람들을 만나고 웃으며 존재감을 더 크게 드러내고 있었지만 ‘원래의 나’는 사라졌을 뿐이다.
그 이후로 내 시간은 말할 수 없을 만큼 황폐했다. 가족이나 친구 모두 나를 지탱하는 힘이 되지 못한다는 생각에 가까운 이들조차 외면했고, 내 고통을 더 악화시키는 일들에만 주력을 했다. 그 무렵 나의 가장 큰 조력자였던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피폐해진 내 삶은 상실감으로 더 사무쳤고, 결국 나는 병원과 약에 잠시 기대게 되었다.
돌이켜보니, 나는 나 자신에게 너무 무례했다.
예민하고 민감했던 ‘나’를 억지로 모른 체하며 타인들한테서 비롯되는 것들에만 집중했다. 결국 나 자신에게 버림받았었다고 생각한다. 손톱만 슬쩍 꺾여도 아픈데, 나는 내면의 고통을 알면서도 외면했다. 그리고 결국 버릇처럼 하던 나의 일을 손에서 놓았다. 그건 자의였을까?
“서교동에서 작은 서점을 운영하고 있어요. 뭐- 처음 시작하게 된 이유는 별 다른 건 없고요. 책방은 누구에게나 오랜 꿈이죠. 그저 글 읽는 것도 좋아하고 쓰는 것도 좋아해서 자연스럽게 시작하게 됐어요. 운도 맞았던 것 같고요. 원래는 인테리어 디자이너였는데 지금은 일단 휴업 상태고요. 책방을 시작했으니 전념하고 싶어요. 그래도 시작하고 나니 좋은 점이 더 많네요. 경제적으로는 좀 어려워도 하고 싶은 일을 해서 너무 좋아요. 곧 책도 만들 예정이에요.”
책을 읽고, 손님을 맞이하고, 글을 쓴다.
서점 안에서 이 규칙은 습관처럼 느슨해지려는 내게 기분 좋을 만큼의 긴장을 입혀주는 수단이다. 서점에 오시는 손님에게는 간단한 인사로 감사를 대신하고, 얼굴이 익은 사람들에게는 적당히 선택에 끼어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온전히 나를 위한 즐거운 의지다.
그렇게 남의 삶에 끼어드는 일을 줄이는 대신 요즘 내가 즐거운 일을 하고 또 무얼 할 수 있을까 하루 종일 들여다본다. 무엇을 먹고 싶은지, 무얼 읽고 싶은지, 어떤 시간을 보내고 싶은지 매 순간마다 나를 위해 결정한다. 마주치는 낯선 사람들의 경계가 날카롭지 않은 이 곳에서 나는 매일 책과 그들을 통해 용기를 얻고 치유하고 있다. 날카로웠던 내 감정의 칼이 오늘은 조금만 더 무뎌지기를 기대하면서...
오늘은 또 뭘 해볼까?
임화경: 서교동에서 "안도북스" 서점을 운영하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
독립 잡지 <언니네 마당> Vol.09 하자보수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91196033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