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주의로 치유하다 / 글· 풍선
꿈에서 깨어나 보니 내 옆에 처음 보는 아기가 내게 간절한 눈빛으로 도움을 청하고 있다.
나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안함에 휩싸였고 아주 잠깐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비폭력 출산을 위해 조산원에서 산고를 겪었지만 병원에 가지 않는 나를 이해 못하는 친정엄마에게는 연락하지 않았다. 의지할 곳 없는 마음. 밤잠을 설친 탓에 어느샌가 남편은 ‘드렁드렁’ 코를 골며 자고 있다. 조산사의 도움을 받아 출산을 하고, 아직 젖은 한 방울도 나오지 않지만 조산사는 나의 젖꼭지를 아기의 입에 갖다 댄다. 본능적으로 아이는 그것을 꽉 문다. 난생처음 겪어 보는 아기의 입술에 넣어 보는 젖꼭지의 감촉은 나를 자꾸만 뒷걸음질하게 했다. 나는 이제 이 아이의 ‘밥통’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하는가?
혼자 화장실을 오가며 나는 다시 태어났다. 텔레비전에서 보던 ‘감격의 출산’은 연출되지 않았고 그제야 무지하게 졸음이 밀려왔다. 머릿속에는 마무리 못했던 대학원 마지막 학기 졸업 논문이 아른거린다. 왜 이렇게 인생이 마음먹은 대로 안될까? 뭔가 해보겠다고, 능력 있는 여자가 되겠다고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와 28살에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리고 1년 만에 아이가 생겨버렸다. 6년 동안 연애를 했던 남자와 이제는 사랑과 우정 사이를 갈지자로 오가고 있는 이 타이밍에.
큰 아이 돌잔치를 하던 무렵 둘째가 생겨 양육을 위해 전업주부로 지내야 했다. 남편도 사회생활하느라 고생하고 있지만 그래도 남편이 부러웠다. 나는 양육을 하며 세상 물정에 어두워졌고 아이들이 즐겨보는 만화영화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곤 했다.
우울함과 자괴감이 들 때마다 내 영혼에 대해 깊이 들여다볼 기회가 생겼다.
두려운 과거들이 내 앞을 스쳐지나가기도 했다. 초등학교 갓 들어갈 무렵 내 속의 어린아이가 사촌 오빠에게 자주 성폭행을 당했다. 작은 식당을 운영하던 엄마는 자주 큰 이모 집에 나를 맡기곤 했는데 한참 성에 관심이 많던 오빠는 연약한 나를 추행했다. 그때는 그게 무슨 행동인지를 몰라 가만히 있으라는 오빠의 지시를 따르기만 했다.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겠다는 약속의 대가로 용돈 천 원이나 초콜릿을 받기도 했던 것 같다.
조금 더 커서 어린이 성폭행 관련 다큐멘터리나 뉴스를 볼 때마다 사람들이 나의 그런 상처를 아는 것이 두려웠다. 나 자신이 더럽게 느껴지고 성인이 되어서도 수치심이 강력하게 나를 옥죄곤 했다. 성인이 되어서 사촌 오빠를 만날 일이 아주 가끔 있었는데, 그때마다 황급히 그 자리를 빠져나오기 바빴다. 오빠가 너무 무서웠다.
그러다 ‘아우성의 구성애의 성교육’ 강의를 듣게 되고, 여성주의 책들이나 사상들을 접하면서 그동안 내가 얼마나 허구적인 것들에 상처받고, 매달려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여성주의를 만나고서야 나는 오빠에게 당당히 지난날 사과를 받아내고 뺨 한 대 아주 세게 갈길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여전히 실행으로 옮기지 못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나의 몸이 더럽다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고, 섹스와 오르가슴에 대한 자신감이 조금씩 생겨 나고 있다.
집 앞 목련 나뭇잎이 수채화 빛깔처럼 물들고 스스로 땅을 향해 온몸을 던지는 겨울.
내 영혼은 여전히 사랑을 기다린다.
이제 아픈 부위를 드러내고, 빨간약을 발라 본다.
내 인생의 하자 보수는 바로 여성주의 세계관을 갖게 된 것이다. 두 아이를 출산한 후 쭈글쭈글해진 배를 더 이 상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었고, 여성들의 외모지상주의와 성의 상품화에 반대한다. 조금 더 용기를 내서 그 시절 오빠에게 뺨이라도 시원하게 날려주고, 사과를 받을 수 있는 그런 날이 오겠지, 꼭 그러하리라.
이제 나는 알았다.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뼛속까지 여성주의 세계관이 있어야 한다고!
독립잡지 "언니네 마당"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91196033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