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가루 (여성 매거진 <언니네 마당> Vol.09 "하자보수" 中)
내 책상 서랍 안에는 이십여 년이 지난 편지 한 통이 있다. 책상 정리를 할 때마다 다수의 물건들이 정리되곤 하지만 이것만큼은 서랍 안 한쪽에 신줏단지처럼 모셔 놓는다. 주소도, 이름도 적히지 않은 하얀 봉투 안에는 평범한 줄무늬 편지지가 들어 있다. 그리고 편지지를 열면 반듯하게 적은 글자들이 한가득 채워져 있다. 편지를 쓴 주인처럼 무심하고 무뚝뚝한 글자들이다.
편지지에 쓰여있는 글자들은 처음부터 아예 인쇄되어 나온 무늬처럼 보인다. 오랜 세월을 보내며 종이와 잉크는 한 몸이 된 모양이다. 나는 다시 한번 그것을 찬찬히 읽는다. 이미 외울 수도 있는 내용이었지만 한 글자 한 글자 읽을 때마다 전에 없이 마음이 울렁거린다.
스무 살의 어느 날 그 편지는 머리맡에 놓여있었다. 그 당시 난 대학 시험에 떨어지고 난 후 불안하고 우울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모든 것이 끝이라 생각했다. 현실을 부정하고 누군가의 실수 때문이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는 변하지 않았고 나는 허공에 버려진 것만 같았다.
눈앞이 캄캄했고 그것을 헤쳐 나갈 힘도 없었다. 기대했던 미래도, 자신만만했던 인생도 모두 끝인 듯했다. 마치 손발이 묶인 것처럼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무섭고 괴로웠다. 비어 있는 길고 긴 시간들이 내게 쏟아졌지만 나는 그 시간 안에 갇힌 채 그대로 멈춰 서 있었다. 하루 종일 햇살이 곱게 드는 마루 끝에 앉아 있다 보면 그대로 바스러지고 싶었다. 숨을 쉬고 있지만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았고, 머릿속은 터질 듯이 복잡했지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백지로 덮고 싶은 시간들이었다. 내 인생에 있어서는 안 될, 없어도 상관없는 순간이었다. 할 일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내게 관심 없는 가족들이 원망스럽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꼴 보기 싫었다. 세상의 모든 슬픔과 어둠은 모두 내가 짊어지고 있는 듯했고 나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행복하고 즐거워 보였다. 나도 그들처럼 행복해지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났는데 머리맡에 무언가 놓여 있었다. 편지 봉투 두 개와 장미꽃 한 송이였다. 한 봉투 안에는 곱게 접은 편지가, 또 다른 봉투에는 만 원짜리 몇 장이 들어 있었 다. 장미꽃은 아무리 봐도 집 앞마당에서 꺾은 것 같은데 생각만큼 잘 끊어지지 않았는지 줄기에는 상처가 잔뜩 나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내게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았다. 성년의 날을 맞아 가족들이 준비한 성의가 내겐 그저 어렵고 귀찮았다. 편지 내용은 이해하기 어렵다 못해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고 상처 난 줄기의 장미꽃은 내 모습 같아 측은해 보일 뿐이었다. 악몽 같은 시간들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라던 나는 그저 화가 나고 속상할 뿐, 가족들의 진심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알게 되었다. 하얀 도화지로 덮어두고 싶었던 그때가 오히려 그들의 말처럼 지금까지 나를 지켜주고 힘을 준 시간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상처받고 괴로웠던 나보다 그것을 지켜보던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더 힘들었는지를…. 그것을 알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비록 장미꽃은 바스러져 사라지고 돈도 다 쓴 지 오래지만 오래된 편지만큼은 가족들과 함께 남아 조용히 나를 지켜주었다. 그리고 이제는 고맙고 소중한 보물이 되었다.
그러고 보면 모든 것이 그렇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는 듯하다. 지난 세월 힘들었던 경험들이 지금의 나에게 도움을 주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아직도 이유를 찾아내지 못한 무수한 일들이 남아 있긴 하지만 어쩌면 세월이 조금 더 지난 후에 이유를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패는 여전히 고통스럽다는 것이 내 솔직한 심정이다.
여성 매거진 <언니네 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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