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1998년 금산동 작은 방에서의 추억/ 글 한량, 그림 alma
“오늘 밤 그대에게 말로 할 수가 없어서
이런 마음을 종이 위에 글로 쓴 걸 용서해”
- <1994년 어느 늦은 밤> 장혜진 노래/김현철 작사/김동률 작곡
내가 가장 기억에 남는 선물을 말하려면, 1994년의 어느 계절 늦은 밤으로 시간을 되돌려야 한다. 라디오를 끼고 살았던 중·고등학교 시절, 소중한 그대에게 주었던 ‘짜짓기 테이프'( ‘짜깁기 테이프’가 올바른 표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쓴이의 필(feel)이 충만하도록 그 시절, 그 단어 ‘짜짓기 테이프’로 표현합니다.)…. 비오는 날, 스산한 가을, 눈이 흩날리는 밤이면 그에 맞는 곡들이 흘러나오던 라디오, 그 시절의 음악들. 약속 없는 주말에 찌뿌드드하게 일어나는 늦은 아침, 라디오에서 척 맨 지오니의 <Feel so good>이 귀를 깨우면 그날 하루가 ‘Feel so good’이었다.
좋아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주파수를 돌리고 마음에 드는 노래가 소개될 때마다 데크로 후다닥 뛰어가 “틱” 녹음 버튼을 눌러 이미 대기하고 있는 공테이프에 녹음을 했고, 어둠 속에서 철자가 틀린 줄도 모르고 삐뚤빼뚤 제목과 가수 이름을 적는 것만으로도 설렜다. 차곡차곡 테이프가 늘어났고, 꼭 그만큼 라디오에서 소개된 곡의 제목과 가수 이름을 적은 메모지도 쌓여 갔다. 나는 밤이면 금산동 작은 내 방의 책상 앞에 앉아 그 메모지들을 만지작거리면서 그대에게 전할 ‘짜짓기 테이프’ 궁리를 하는 것으로 넘쳐나는 시간을 보냈다.
정성이 빠진 선물은 선물이 아니다.
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짜짓기 테이프’를 만드는 것은 꽤 여러 공정과 정성을 요하는 일이다. Side A, B 양면에 담길 노래를 선곡하고, 총시간을 계산해 그에 맞게 60분, 90분, 120분짜리 공테이프를 준비해야 한다. 더구나 나는 최고의 사운드를 위해 나에게는 스튜디오(?)였던 일산 이모네 집에까지 가서 이것을 제작했다. 이모네 집에는 그 시절 최고급이었던 인켈 오디오가 있었으니까. 테이프 겉면의 노래 리스트에도 소홀할 수 없었다. 글씨는 물론이거니와 펜의 선택도 중요한데, 간혹 리스트의 마지막 즈음을 쓰다가 망할 펜이 번지기라도 할 때면 그 허탈함이란! 테이프 겉지의 소재에 따라 글씨가 예쁘게 써지는 펜을 선택하여 곡의 제목과 가수 이름을 한 글자, 한 글자 눌러쓰고 마지막으로 포장을 했다. 때에 따라서 좀 더 소중한 사람에게는 카드에 짤막한 글귀를 남기는 대신 나의 목소리로 테이프에 메시지를 녹음하기도 했다. 그렇게 내가 만든 짜짓기 테이프들은 S에게, L에게, J에게 건네 졌다. 뭐라고 말하며 전해줘야 할지 부끄러워서 마냥 두근대는 심장과, 심장보다 더 떨리는 손으로 그 아이의 손에 테이프를 전해주던 그 순간. 뒷짐을 진 채 하릴없이 발을 배배 꼬면서 ‘고마워’라고 수줍게 받아 들던 그 아이를 보며, 난 행복감에 어쩔 줄을 몰랐다.
지금도 그 아이가 가끔 배경처럼 그 시절 그 테이프 속 음악을 기억할까?
이어폰을 눌러 오감을 집중하며 음악을 들은 적이 있을까. 나의 소박한 정성이 깃든 테이프가 그들에게 짧은 순간이라도 ‘좋다’라는 기분을 갖게 하는 그런 선물이었기를 바란다. 그 시절의 소년, 소녀는 벌써 20년의 시간을 훌쩍 흘러와 버렸다. 대부분의 짜짓기 테이프는 추억의 잔해로 사라졌을 것이다. 운 좋게 테이프가 남아있다 한들, 그 속의 음악을 들려줄 데크까지 남아 있을 운까지 기대하기는 어렵겠지…. 하지만 어느 날 문득 흘러나오는 귀에 익은 노래에서 그들이 그 테이프의 존재와 그 테이프에 담긴 내 마음을 기억할지 궁금하다. 이제는 가물가물해진 그 선물의 기억이 잠시라도 그들을 미소 짓게 만든다면 그것만으로 난 참 좋겠다.
More than words….
금산동 집 앞 작은 개울가를 건너 언덕을 오르고, 코가 알싸했던 파밭을 가로질러 놀이터로 뛰어가는 것만으로 지루하지 않은 시기였던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을 지나, 고등학교 야간 자율학습(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밤 12시까지 스파르타식 강제 학습)으로 신체적인 ‘지랄발광’을 뺏긴 나는 어떻게든 에너지를 발산할 무언가가 필요했던 것 같다. 그게 라디오였고, AIWA 마이마이였고, 그러니까 결국은 음악이었다. 그리고 그 에너지를 고스란히 짜짓기 테이프에 녹여냈다. 짜짓기 테이프의 단골로 쓰였던 곡 중에 익스트림의 <More than words>가 있다. 도입부의 통기타가 마음을 무너뜨리거니와 무엇보다도 제목이 좋았다. more than words라니, more than words라니….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야. 그 이상의 것이 있어." 난 장혜진의 <1994년 어느 늦은 밤>의 가사처럼, 익스트림의 <More than words> 곡명처럼 테이프를 만들었다. 그리고 한참 시간이 지난 후, 어느 술자리에선가(만취했을 때) “다시 만들어 줄 수 있어?”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난 단호히 못하겠다고 답했다. 서른이 훌쩍 넘은 지금 여기에는 로빈 쿡과 존 그리샴, 파트리크 쥐스킨트, 이문열의 <삼국지>, 전람회와 더 클래식, 업타운, 보이즈 투 맨과 머라이어 캐리, 올포원과 테이크 댓, 본 조비, 에어 서플라이, 퀸, 해리 코닉 주니어, 영화잡지 <KINO>, 이정식의 <0시의 재즈>와 배유정의 <FM 영화음악>이 흘러나오는 금산동 그 방의 공기가 없고, 곡명과 가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던 메모지에서 나던 눅눅한 냄새도 기억에서 사라졌다. CD도 팔리지 않는 시대이다. 언제든지 파일로 음악을 전송받고 음악을 귀 기울여 듣기보다는 그저 배경음이 되어버린 지금, ‘쓸데없는’ 짜짓기 테이프는 더 이상 환영받는 선물이 아니다. 그래도.... 그래도 말이다... 아직도 마음을 전하는데 음악만 한 것은 없다. 같은 음악을 들으며 말없이 앉아있는 햇살 좋은 나른한 오후, 내가 선곡한 음악을 미소 지으며 같이 들어주는 사람이 지금 내게는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이다.
잡지 언니네마당 블로그
언니네 마당 11호 "일은 합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