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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의 첫걸음은 하자와 맞짱 뜨기

글: 레알

by 이십일프로

1월의 마지막 날 저녁, 횡단보도의 파란불이 깜박이는 걸 보고 빨리 건너려고 신호등만 보고 뛰었습니다. 몇 발자국 못 가서 우회전하는 차바퀴가 제 발등을 사뿐히 밟는 걸 두 눈으로 보면서 어.어.어, 차바퀴가 지나가네, 하고는 횡단보도 위에 쓰러졌습니다. 멋진 남자 사람이 달려와서 괜찮은지 묻는 일은 영화에서나 있는 일이고, 현실은 아스팔트 바닥 위에 혼자 십여 분 누워있어야 했습니다. 십여 분 동안 행인과 지나가는 운전자들의 호기심 거리가 되면서 말이죠. 두 발 뼈가 으스러져서 수술을 하고 깁스를 하게 되는 재난이 일어났습니다.


두 발이 불편해지자 발이 사소하지만 꼭 필요한 일에 얼마나 많이 관여하고 있는지 깨닫고 있습니다. 발바닥에 힘을 줄 수 없으면 앉고 일어설 수 없을 뿐 아니라 바지를 내리고 올릴 수도 없습니다. 평소에 무의식적으로 하던 하찮은 일을 해내는 게 ‘과업’처럼 다가왔습니다. 병원 침대에 누워 매일 어떻게 하면 두 발을 사용하지 않고 바지를 내리고 변기에 앉을지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해보곤 합니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고, 엉덩이를 조금씩 움직여서 바지를 내리고 올리는 요령을 어느 순간 터득해서 매일 매일 엉덩이를 조금씩 더 정교하게 움직이는 일에 보람마저 느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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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금 병원에서 부러진 뼈들과 인대를 맞추는 대대적 보수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두 발의 사용을 철저하게 제한당한 채 침대에 감금당한 시간을 보내면서 그리운 건 정말 사소한 일들입니다. 전등 스위치를 원하는 시간에 켜고 끄는 일(병원 다인 병실에서는 단체 생활을 해서 제 마음대로 소등할 수 없습니다), 시원하게 머리 감고 샤워하기 등등. 일상은 이렇게 불편 그 자체지만 또 한편으로는 살아온 궤적을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동안 많은 친구들이 물어오는 안부 전화와 문자, 걱정 속에서 혹은 병원에서 심심할까 봐 직접 찾아오는 가족과 친구들은 신체 하자를 통해 본 소중한 자산입니다.


하자는 ‘흠’을 의미하고 흔히 부정적 이미지를 지닙니다. 하지만 뒤집어 보면 하자가 없다면 보수를 고민할 필요도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지 고민하게 되는 보수는 하자와 짝꿍입니다. 하자 없는 보수는 없습니다. 눈엣가시 하자가 주는 미덕은 바로 이 생각의 전환입니다. 하자를 마주하는 일이야말로 보수의 첫걸음이면서 가장 좋은 보수인지도 모릅니다. 엉덩이를 움직여 바지를 올리고 내리는 방법을 궁리하면서 두 발의 출중한 역할에 대해 깨닫고, 으스러진 발 뼈의 고통을 완화해주는 가족과 친구들의 온기를 가슴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이게 보수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자가 있어도 버팀목이 될 수 있는 건 분명합니다.


<언니네 마당>의 하자보수 버팀목은 독자 여러분입니다. 제9호 ‘인생의 하자보수’로 엮은 다양하게 사는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숲을 거닐며 하자와 맞짱뜰 용기(?)를 낸다면 <언니네 마당>은 제대로 보수를 한 거라고 희망을 품어봅니다.



독립잡지 <언니네 마당 > Vol.09 "하자보수"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91196033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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