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다식
(이 글은 2014년 5월 27일, 독립잡지 언니네 마당 창간준비호 온라인 버전에 실린 글입니다. )
예, 그날은 그러니까 2014년 5월이었습죠.
소인은 동무들과 오랜만의 회합을 마치고 저녁 9시쯤 토끼 같은 새끼와 나무늘보 같은 남편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요. 차가운 어둠이 내려앉은 청량리역은 왠지 을씨년스러운 게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 것만 같았죠.지하철을 나와 버스를 타기 위해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로 진입했습니다. 소인의 다리는 소중하니께요....
그런데 그때 어디선가 “어! 저 아저씨!” 하는 외침이 들리는 겁니다.
소인이 내려다보니 바로 옆 올라오는 에스컬레이터에서 술이 거나하게 취한 아저씨 한 분이 에스컬레이터를 타던 중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지는 겁니다. 아찔한 순간이었죠. 그러나 다행히 아저씨는 술 취한 사람 특유의 스텝으로 자연스럽게 주저앉듯 뒤로 넘어졌고 많이 다치진 않은 듯 했죠. 전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그런데 이 아저씨가 일어나지 못하고 계속 누워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에스컬레이터는 멈추지 않고 계속 위로 위로 올라가고 있는 중이었죠. 그런데 모두 서서 바라보고 웅성거리기만 할 뿐 아무도 아저씨를 도와주지 않는 겁니다.
아저씨를 태운 에스컬레이터는 점점 더 꼭대기 계단으로 향하고 있었죠.
머리카락이나 옷자락이 저 우악스러운 기계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그래서. ‘안되겠다. 이건 내가 나서야겠다’ 싶었던 거죠. 소인은 <예스마담>의 양자경처럼 에스컬레이터 반대편으로 훌쩍 뛰어 넘어 가고 싶었지만, 그렇게는 못하고, 제가 탄 에스컬레이터가 안전하게 바닥에 도착했을 때 목표물인 아저씨를 쓱~ 쳐다봤죠. 아저씨는 뒤집어진 풍뎅이 마냥 버둥거리며 일어나질 못하고 있었습니다. 목표물과의 거리를 확인하고 그야말로 바람처럼! 혹시 슈퍼소년 앤드류를 아시나요? 네. 바로 그겁니다. 아저씨를 향해 달려가 일으켜 세웠죠. 그야말로 전광석화, 탄지지간, 여조과목, 명모호치였죠. 그리고 모여 바라보기만 하는 사람들에게 일갈했죠.
"한번만 도와주세요!"
마침 건장한 아저씨가 달려와 술 취한 아저씨를 부축했고 저는 바닥에 떨어진 동전과 열쇠가 에스컬레이터로 빨려 들어가 청량리역이 폭발하고 수많은 인명피해가 날 뻔한 순간! 그것들을 주워 위기를 모면했죠.
정말 일촉즉발의 순간이었죠. 휴~ 지금 생각해도 아찔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 소리가 우레와 같이 들리지는 않았지만 아저씨의 진심 어린 감사 인사를 받았습죠. 아저씨에게 동전과 소지품들을 전해주고 전 유유히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마치 모든 일이 끝난 후 떠나는 영웅의 쓸쓸한 뒷모습이랄까요? 그곳의 공기는 말 그대로 청량하게 바뀌어 있었습니다. 소인은 옷깃을 여미며 “이로써 지구의 선과 악의 스코어는 1:1이 되었군.” 라고 중얼거리며 밤에 젖은 청량리역을 떠났습니다.
전광석화 電光石火 | 번갯불이나 부싯돌의 불이 번쩍 거리는 것과 같이 매우 짧은 시간이나 매우 재빠른 움직임 따위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탄지지간彈指之間 | 손가락을 튕길 사이라는 뜻으로, 아주 짧은 동안을 이르는 말.
여조과목如鳥過目 | 새가 눈앞을 날아 지나간다는 뜻 으로, 세월이 빨리 지나감을 이르는 말.
명모호치明眸皓齒 | 맑은 눈동자와 흰 이라는 뜻으로, 미인美人의 모습을 이르는 말. (은근슬쩍 이런 글을 끼워 넣은 필자의 음흉함이 엿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