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지르셔도 그건 못 해드립니다

헬스장 클럽에서 만나요#4

by 지친 잉어

상큼한 욕설로 나의 첫 근무를 장식해 준 양도 회원님 덕에 첫 근무날부터 진상 고객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 나는 기억력이 부족한 사람인지 매장명은 물론 사람의 이름을 외우는데 참 소질이 없는데, 이번 업무를 처리하며 해당 회원님의 이름을 세 번씩 읊조리며 암기해 두었다. 어느 날 헬스장에 운동하러 오게 되면 어떻게 생겼는지 얼굴이나 보자 하는 마음이었다.



운동하러 오시는 회원님들의 입장기록이 컴퓨터 출석 프로그램에 자동 처리 되는지라, 출석표만 보더라도 이 사람이 매일 운동을 오는 부지런함의 끝판왕인지, 어쩌다 일주일에 한두 번을 올까 말까 하는 기부형 천사인지 알 수가 있다. 더 나아가 비슷한 시간대에 방문하는 기록을 보면 이 사람은 매우 규칙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셜록 홈스가 키우는 개의 벼룩이라도 금방 알 수 있다. 어쩐지 허가 없는 뒷조사를 감행하는 불법적인 일을 저지르고 있는 기분도 들었지만 따지고 보면 쓸데없는 죄책감에 불과했다.

헬스장에 등록 당시에 개인정보 제공을 동의하는 약관에 서명을 했을 테며, 그 사람의 이름과 연락처를 비롯한 나이 등 개인 정보는 화면에 이미 공개적으로 전부 띄어져 있어 굳이 내가 일부러 찾아 열람을 한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업무를 볼 수 있도록 최소한의 개인정보가 정당하게 제공되는 컴퓨터가 근무하는 내 손에 쥐어진 것이 아닌가. 물론 이 정보를 허락 없이 외부로 유출하거나, 개인적인 용도로 쓰인다면 그땐 정말 문제가 되겠지만. (이와 관련한 또 다른 에피소드가 있으니 다음을 기대해 주시라.)



내게 욕설을 퍼부은 회원님의 등록 사진에는 마스크를 낀 채 턱을 주먹으로 바치고선 휴대전화를 보느라 시선을 아래로 향한 채 찍힌 모습이 담겨있었다. 얼굴이 절반이상 가려진 데다가, 이런 비스듬한 각도로는 누구인지 알아보기 힘들 것만 같았다. 방문 기록일지에는 주말에도 빠짐없이 꾸준히 나오던 사람이 최근 일주일 동안 운동을 나오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대체 언제쯤 다시 나오려나 벼르고 있던 중, 기습공격을 당한 건 오히려 내 쪽이었다.







한 중년 여성이 입장체크도 누르지 않고 휙 들어와서는 다짜고짜 데스크 안으로 몸을 기울이며 회원권 기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찾아보라는 명령을 내렸다. 저희 초면 아닌가요? 최소한 누군지 이름정도는 밝혀줘야 나도 찾아주든 말든 할 것 아닌가. 만화영화에 나오는 악당들조차 지들이 나쁜 짓을 저지를 누구누구라고 자기소개를 매회차 빠짐없이 하는데, 현실 인간들은 참 예의도 없다. 그러나 아직 출근 이틀차 밖에 되지 않은 새내기 삐약이인 나는 자본주의적 마인드로 만들어낸 미소를 만들고선 친절히 성함이 어떻게 되는지 되물었다.


이름 석 자를 듣자마자, 올 것이 왔다는 긴장감이 맴돌았다. 지금 내 앞에 떡 하니 서서 못마땅하게 입술을 삐죽이는 여자가 바로 어제 내게 도레미 치는 여자와 사기꾼이라는 타이틀을 동시에 달아준 장본인이었다. 그는 펌이나 염색을 하지 않고 단정하게 자른 단발머리에 선글라스를 걸친 50대 여성이었다. 적갈색 립스틱을 바른 입술이 검정 머리색과 더 대비되어 눈에 들어왔다. 당장이라도 욕설을 퍼부을 준비가 된 듯 입술이 꿈지럭거렸다. 여기서 내가 주눅 들 필요가 하나도 없는 상황이었지만 괜스레 긴장되기 시작했다.



"이번에 양도받으신 것까지 합해서 회원권은 00월 00일에 끝나고, 개인사물함은 00월 00일에 끝나세요."



이에 개인사물함은 왜 회원권보다 한 달 가까이 더 일찍 끝나냐는 기출변형 질문이 들어왔다. 나를 너무 얕보았군, 속으로 콧방귀를 뀌며 야무진 톤으로 대답했다. 애당초 양도받는 회원권과 개인사물함의 남은 기한 일수가 각각 다르기 때문에 그렇다는 설명을 했다. 어라? 이 설명은 이미 어제 전화로도 했던 안내했던 부분이다. 그러나 확인차 다시 물어볼 수도 있지. 그렇고말고.



그러나 그녀의 반격은 생각보다 거셌다.

회원권과 개인사물함의 일수가 차이나는 경우, 기간맞춤을 해줘야 하는데 왜 안 해놨냐고 따지고 들기 시작했다.


여기서 기간맞춤이란 회원권을 우선 결제해 두고서는 운동복이나 개인사물함 같은 옵션을 나중에 결제할 경우, 회원권이 먼저 끝나버리고 옵션이 며칠 정도 남는 경우, 서비스 차원에서 회원권을 그만큼 기간을 더 늘려주는 것이다. 내 돈 내고 대여한 옵션이 며칠 남았는데, 회원권이 먼저 끝났다는 이유로 며칠에 대한 손해를 보라고 하면 손해를 보았다고 길길이 날뛰어지는 게 사람 마음이지만, 서비스로 늘려준다고 하면 기분 좋아지는 단순한 동물이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녀가 들이댄 논리에 넘어갈 뻔했다. 이 경우에는 포함되지는 않지만, 실제로 그리 해줘야 하는 때도 있으니 순간적으로 판단력이 흐려졌다. 그러게, 내가 왜 기간맞춤을 안 해놨지? 마우스 클릭을 몇 번 딸각거렸다. 회원님은 턱에 주먹을 말아쥔 턱을 받치고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거봐, 이렇게 일 제대로 안 해놨을 줄 알았어'라고 한숨 섞인 혼잣말로 중얼거리시면서 얼른 네가 잘못한 일 수정해 놓지 않고 뭐 하느냐는 눈빛으로 내가 조작하는 마우스를 재촉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수정 완료> 버튼을 누르려던 , 매니저님에게 들었던 칭찬이 퍼뜩 나의 정신을 바로잡아 줬다. 첫 업무 치고는 복잡했는데도 불고하고 실수 없이 잘 처리했다는 칭찬이었다. 거기에 이 전산 업무는 내가 처리했지만,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무슨 일을 잘못 저지를지 모를 내가 불안했을 매니저님이 모니터링을 하면서 직접 컨펌한 내용이기도 했다. 즉, 이중 확인 된 나의 일처리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간신히 되돌아온 이성적 사고가 해당 경우에는 직접 결제를 해서 일수가 차이 나는 게 아니고 양도를 받은 것이기 때문에 기간맞춤을 해드릴 수 없다는 올바른 반격을 내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여기서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00 이가 3개월짜리 끊고 한 달 밖에 안 다녔었다는데. 그럼 나한테 회원권이랑 개인사물함이 두 달 치가 다 넘어와야 하는 게 맞지 않냐고."


정말 기절할 노릇이었다. 어제 전화 통화에서는 소리를 질러대느라 내가 한 말은 싹 다 잊어먹은 모양이다. 그도 아니면 듣는 척만 했던지. 아니면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양도를 하는 회원이 정지 기간 동안 개인사물함에서 짐을 빼가지 않은 탓에 일수가 차감되어 그렇다는 설명을 대체 몇 번째 반복하는 중인지 이제는 자동응답기 로봇이 될 지경이었다.

이렇게 새로 막 일하기 시작한 신입 주제에, 본인의 주장에 져주지 않고 따박따박 반박을 하니 어지간히 짜증이 났나 보다. 그녀는 준비해 온 마지막 필살기를 꺼내 들었다.



"걔가 쉬었다고? 그런 적 없다던데?"



당사자가 몸이 아파서 운동을 쉬겠다고 정지를 신청한 서류에 모든 정보가 다 기록 보관되어 있는데, 무슨 말씀이실까요. 그런 억지 주장 부리신다고 해결되는 거 아닙니다...라고 정색을 하고 싶었다.

나는 들이박을 용기는커녕, 간사한 꾀에 발이 꼬여 넘어가지 않기 위해 바짝 긴장하고 있던 터라 차분한 톤을 유지하는데 힘을 쏟고 있었다. 나까지 흥분해 버려서 잘못 판단해서 꾀에 넘어가버리기라도 하면 안 되니까.


어찌 됐든, 내게 혼란을 주어 개인사물함을 한 달 더 사용할 수 있게 기한을 늘려주는 실수를 하게 만들어 그 혜택을 날로 먹으려는 꾀부림에 그녀의 바람대로 넘어가지 않은 나의 완승이었다. 논리적인 척 찌르고 들어오는 공격들을 잘 방어했고, 헬스장의 재산을 원칙의 이름으로 지켜냈다. 긴장 속에서 정신없이 첫 경기를 치르느라 기운이 쪽 빠져나갔다. 그러나 이겼는데도 썩 기쁘지 않았다.







그 순간 일을 잘 기억해 내었다는 기쁨과 무탈히 처리했다는 뿌듯함보다, 기묘한 찝찝함이 커튼처럼 내 머릿속을 어둡게 둘러쳤다.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답은 금방 알 수 있었다. 그건 그 사람이 나를 만만하게 깔보았다는 반증이 끈적하게 들러붙었기 때문일 것이다.


헬스장을 오래 다닌 회원일수록, 근무하는 사람이 신입인지 아닌지 바로 구분하는 법이다. 그 사람 입장에서는 평소 못 보던 내가 있으니, 이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내가 분명 아직 업무에 적응을 못 했을 거라 여겼을 테다. 헬스장에는 매뉴얼에도 담겨있지 않은 여러 가지 경우의 조건이 있으며 기존 근무자들이 오랜 경영 노하우로 만들어내 규칙들이기 때문에 거기에 같이 녹아들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당연하게도, 정직원들만큼이나 여기서 오랫동안 운동을 다닌 회원들도 이러한 규정과 규칙들을 다 꿰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고양이가 쥐 휘두르듯, 신입 아르바이트생 정도는 만만한 수준을 넘어서 쥐락펴락 할 수 있는 손수건보다도 쉬운 존재였던 셈이다.



타인의 미숙함을 도구삼아 자신의 이득을 취하고자 하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을 것이다.

거스름 잔돈을 더 많이 받아도 모른 채 계산대를 떠나가는 사람이 있을 것이며, 육안으로 수입산 고기인지 아닌지를 구분하기 어려워하는 소비자에게 국내산이라 속여 비싸게 돈 받고 파는 판매자도 주변에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근로자의 실수로 인해 빚어진 결과에서 우연히 이득을 취해 가는 것과 다르게 의도적으로 실수를 유발하려 살살 덫으로 유인하는 행위는 질 나쁜 전략에 불과하다 생각한다. 어떤 한 실수로 인해 어떠한 손해를 입고 곤욕을 치르게 될지 나 몰라라 하기에는 이미 세상을, 그리고 이 사회를 겪을 만큼 겪었을 나이에 들어서 있지 않는가. 자신의 만 원을 아끼기 위해 타인을 곤란의 구렁텅이에 밀어 넣는 이기심을 어디에서 온 것일까.



긴 실랑이 끝에, 모래사장에 축 늘어진 오징어처럼 기운 빠진 몸을 의자에 반쯤 기대었다.

앞으로 내가 무슨 서비스 혜택 같은 거 넣어주나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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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런치 작가 [지친 잉어]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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