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장 클럽에서 만나요 #3
벼락치기 수능 특강처럼 이틀 동안 반짝 인수인계를 받은 후, 본격적으로 혼자 첫 근무를 하기 시작했다. 들어오는 회원님 한분 한분에게 밝게 인사를 건넸다. 동네 중장년층 어르신들이 주 고객으로 특히 오전시간에 많이 온다는 말 그대로였다. 새로 일하기 시작했냐며 살갑게 반겨주시거나 앞으로 오래 일하기 바란다며 격려의 말을 건네주시는 어르신들에게 일이 익숙하지 않아 헤매더라도 잘 부탁드린다는 멘트로 인사성 있게 받아쳤다. 오랜만에 어르신들에게 둘러싸이니 마치 어릴 적 어른들에게 둘러싸여 귀여움을 받던 시절이 떠올랐다. 세련된 운동기구들과 번쩍이는 조명, 음악이 있는 신세대 노인정 같은 인상과 동시에 서울에 아직도 이런 사람 냄새나는 정감 있는 곳이 있을 수 있구나 싶어졌다.
인수인계 동안 배운 내용들은 간단해 보이면서도 꽤나 복잡했다. 회원권 가격은 매월 진행되는 프로모션에 따라 바뀌었고 추가적인 행사가 있을 시에는 서비스로 한 달이 추가 연장되기도 했다. 운동복과 짐을 두고 다닐 수 있는 개인 사물함 대여비가 각각 별도였고, 일정 기간 이상 등록함에 따라 할인이 들어가기도 하는 둥 여러 가지 부수적인 조건이 존재했다. 여기까지는 괜찮았으나, 가격표에 제시된 것과 달리 부가세를 따로 계산해서 결제를 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었다. 수학에 약한 나로서는 바로바로 암산하기는커녕, 계산기를 즉석에서 제대로 잘 조작할 자신조차 없었다. 결국 고민 끝에 집에서 미리 부가세가 포함된 모든 경우의 수를 다 계산해 표로 만들어 프린트를 해올 정도였다. 심지어 표를 만드는 과정에서 계산 실수도 있었다. 나 자신이 못 미더워서 지피양(챗 지피티의 애칭)에게 계산값이 다 맞는지 물어보지 않았더라면, 잘못된 금액을 내내 받아다가 아르바이트비로 다 물어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로 인해 손해를 본 헬스장은 운영이 어려워져 나를 해고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내 돈 벌어 내 직장을 살리는 꼴이 되는 상황은 나도 손해이니 계산 실수만큼은 없어야만 했다.
다음으로 나를 비롯한 여러 근무자를 머리 아프게 만드는 것으로 '정지'가 있었다. 출장이나 여행, 입원 등으로 잠시 헬스장을 다니지 못하는 사정이 생겼을 때 회원권 이용을 잠시 정지시켜 두고, 다시 운동을 나올 때 남은 일수만큼 마저 이용을 가능하게끔 도와주는 시스템이었다. 회원 입장에서는 단순히 신청 서류만 작성하고 언제부터 못 나온다고 날짜만 통보하고 가버리면 끝인 일이었지만, 회원권의 남은 일수를 확인하고서 기존 회원권을 죽인 다음에, 새롭게 정지권을 만든 후 수동으로 프로그램에 날짜를 조정하는 일은 말로 듣는 설명보다 까다로웠다. 하다못해 정지시켜 놓고서는 예정보다 일찍 나오시는 경우, 디데이 계산기로 날짜를 돌려가며 아침 1교시부터 마주한 수학시간 같았다. 퇴사할 즈음엔 별로 어려울 것 없는 업무였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처음이 어려운 법이다.
마지막으로는 양도다. 이사, 건강 문제 등으로 헬스장을 도저히 다닐 수 없는 지경에 다다랐다 싶으면, 다른 사람에게 싸게 내놓고 팔아넘기는 것이다. 당근마켓에 가끔씩 올라오는 양도권이 바로 이 경우일 테다. 업체 입장에서는 해당 이용권의 사용자의 이름만 바꿔주면 될 일로 간단하게 생각된다. 나도 일하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실제로도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즈음엔, 내가 퇴사하면서 헬스장 FC근무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 인수인계를 하면서다.
만약 당신이 운동복 대여와 개인사물함 이용권까지 결제해 둔 상태라면 양도할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나는 셈이다. 그러나 운동복 대여와 개인사물함 이용은 필수가 아닌 선택 옵션이기 때문에 회원권과 꼭 동일한 일수로 맞아떨어지라는 법이 없다. 처음부터 결제해서 이용한 경우는 땡큐베리 감사지만, 운동 도중에 결제하는 사람의 경우는 일수가 어긋나기 때문에 다시 수학익힘책을 들고 와야 하는 지경인 셈이다.
가뜩이나 잔뜩 긴장된 상태의 첫 근무날부터 날 곤욕스럽게 만든 건 다름 아닌 정지된 상태의 회원이 찾아와 다른 회원에게 양도를 하겠다는 과제였다. 각각 따로 하기도 벅찬데. 업무에 적응도 되기 전부터 일타쌍피 같은 이런 커다란 시련이 찾아올 줄이야. 기본 연산수칙을 뗐더니 갑자기 미적분을 들이대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러나 베테랑 사수한테 직접 인수인계를 받은 나였다. 동영상으로 일일이 설명하는 모니터 화면을 녹화하여 다시 듣기를 하며 복습을 했다. 오전 시간대에 오롯이 혼자 근무하는지라 누가 계산을 도와줄 사람도 없기에 집에서 지피티한테 엑셀 파일을 만들어달라는 부탁까지 해가며 연습도 알차게 했던 나였다. 자신감을 가지고 배운 대로만 처리해 나의 노력이 빛이 발할 순간이었다.
이 회원님의 경우는 이러했다. 회원권을 정지시켜 두는 동안 사물함의 짐을 빼지 않아 사물함의 사용기한 일수는 얼마 정도 차감된 상태로, 회원권과 사물함의 일수가 한 달 가까이 차이가 나는 상황이었다. 이 부분을 거듭 강조받으며 인수인계를 받아둔 덕에, 회원권의 남은 일수에 속아 사물함의 일수까지 늘려주는 업장에 손해를 물어다 주는 어리바리한 아르바이트생 인상을 줄 일은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양도 가능한 회원권 일수와 사물함비 일수와 더불어 양도비가 발생하여 양도인이나 양수인 두 분 중 아무나 지불해 주시면 된다 설명을 드렸다. 자화자찬을 하는 오만을 떨고 싶지는 않지만, 첫 근무날부터 마주한 복잡한 업무치고는 군더더기 없이 반듯한 안내였다. 내 설명이 매끄러웠다고 해서 상황도 그렇게 흘러가리라 믿은 나는 순진한 병아리였다.
내 설명을 들은 회원님은 즉시 전화를 걸어 맘에 미리 정해두기라도 한 듯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신이 아파서 당분간 못 다닐 것 같은데 정지는 한 달 이상 불가능하고, 그렇다고 남은 회원권을 그냥 버리기엔 아까우니 양도를 받아가라는 것이었다.
양도를 할 땐, 보통 본인이 넘겨주는 일수만큼 너무 손해보지 않는 수준의 액수를 받고서 남에게 되팔이 하는 법이다. 그러나 대충 대화의 흐름을 듣자 하니, 양도인은 어차피 버려질 회원권, 따로 돈을 받지 않고 공짜로 거저 넘겨주겠다는 뉘앙스였다.
이에 상대편에서 오케이 승낙이 떨어진 듯하였고, 나는 양도로 받은 회원권은 재양도는 물론 중지가 불가능하다는 부가적인 설명을 위해 전화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양도비 만 원이 발생한다는 설명이 끝나자마자 바로 욕설이 날아왔다.
"야이, 도레미를 친 여자야,
남의 돈을 떼어먹으려고 어디서 개수작을 부리려 들어?
무슨 이런 사기꾼여자가 다 있어?."
(독자분들이 수월하게 글을 읽으시려면, 들었던 말 그대로 문자로 옮겨 적는 게 인지상정이겠으나, 상스러운 말을 그대로 옮겨 적잖니 불편하다. 최대한 완화시켜 표현하려 노력했다는 것만을 알아주시면 감사하겠다)
양도 시 발생하는 비용이 내가 정한 원칙도 아니며, 내가 계약서 항목에 적어 넣은 것도 아니며, 없는 걸 거짓으로 만들어내 내 주머니를 몰래 챙기려는 수작도 아니다. 애당초 양도비 만 원을 챙겨 받는다고 해서 내 형편이 대단히 나아질 것도 없다. 요즘 같은 물가에는 만 원으로 점심 한 끼 해결하는 것도 쉽지 않은 수준이니.
운영 원칙대로 안내했을 뿐인데, 나는 한순간에 만 원에 눈이 돌아 회원에게 사기를 치는 정신 나간 여자가 되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살면서 별의별 모욕적인 말들을 다 듣고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사기꾼이라는 말은 난생처음 듣는 얘기였다. 심지어 사기를 당했을 때도 사기꾼이라는 말을 내뱉어보지도 못했는데 말이다.
혹시 누군가가 진상 짓을 부린다면, 들이박으라는 사수의 이야기는 떠오르지도 않았다. 당장 스피커 너머로 소리소리 지르는 분노한 목소리를 가라앉힐 방법을 머릿속으로 빠르게 매뉴얼 차트를 넘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때 떠오른 대책은 하나였다.
양도비는 회원권을 받아가는 사람이나 회원권을 내어주는 사람 둘 중 아무나 지불하면 되는 것이다. 업체 입장에서는 어찌 됐는 양도를 해주기 위해 프로그램에 마우스 몇 번 클릭하는 대가로 만 원이라는 금액의 소득만 벌어들이면 상관없는 일이다. 두 사람 중 누가 지불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그 두 사람이 서로 타협할 일이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였다. 둘 중 아무나 지불하셔도 상관없다는 말에, 팔팔 끓어올라 삑삑 소리를 질러대던 주전자가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바로 이때다 싶어 상의해 보시라며 전화를 다시 넘겨드렸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내 바람대로 두 사람이 누가 만 원을 지불할지에 대해 옥신각신 다투기 시작했다.
끊이지 않을 것 같은 두 사람의 팽팽한 타협전(戰)을 지켜보며, 어서 사인해 주길 바라는 신청서를 바라보며, 양도비용은 넘겨받는 양도인이 내야 하는 걸로 정해버리면 일이 더 쉽지 않을까 싶어졌다.
이 경우는 단돈 만원이라는 양도비로 석 달을 넘게 쓸 수 있는 회원권을 받아 헬스장을 다닐 수 있는 기회로, 사실상 엄청난 이득이지 않을 수가 없다. 원래라면 석 달을 제 돈 주고 다니기 위해서는 거의 십만 원에 달하는 금액을 지불해야 하니까.
두 사람의 타협전은 싱겁게 끝났다. 당장 양도 신청서를 유효화 하려면 만 원을 지불해야 하는데, 당장 수화기 너머에 있는 사람이 와서 지불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따라서 당장 지갑에서 만 원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은 신청서를 작성하고 있는 당사자였다. 당장 양도를 해야 남은 일수가 안 깎이니 일단 지불을 하되, 나중에 만나면 만 원을 자기에게 달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고서는 빨간 장지갑에서 만 원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어차피 이렇게 될 일이었다. 중간에서 왜 내가 잠시 사기꾼이 되어야 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일단 받아 든 만 원으로 소동을 일단락 지을 수 있었다.
오히려 진상이 없다는 말에 속아 넘어가 근무하기로 결심한 내가 사기당한 피해자가 된 듯한 기분에 속상했다. 첫 근무날부터 신고식을 화려하게도 치렀다는 안도의 한숨이 공기 중으로 희석되기도 전에, 이튿날 양수인이 찾아와 2차 진상을 부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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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런치 작가 [지친 잉어]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