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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수 Feb 18. 2020

자유, 고립, 그리고 욕망

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에 대한 서평




자크 라캉,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글의 서두에서 갑자기 라캉의 격언을 인용한 이유는 후반부에서 다루기로 하고, 먼저 <자유로부터의 도피>의 요지에 대해서 살펴보자.


1. <자유로부터의 도피>의 문제의식: 자유를 얻은 근대인들이 다시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이유


이 책의 주제를 간단히 요약하면, 근대인은 개인에게 안전을 보장해주는 동시에 개인을 속박하던 전(前)개인주의 사회의 굴레에서는 자유로워졌지만, 개인적 자아의 실현, 즉 개인의 지적・감정적・감각적 잠재력의 표현이라는 적극적 의미에서의 자유는 아직 획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 자유로부터의 도피, p16.


근대 유럽과 미국의 역사는 인간을 속박해온 정치적・경제적・정신적 족쇄에서 풀려나 자유를 얻으려는 노력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이러한 근대 서구사회로의 이행 과정에서, 중세 사회의 붕괴로 생겨난 인간의 불안이라는 현상을 분석한 책이다.


근대 사회와 대비하여 중세를 특징짓는 것은 개체적 자유의 결여다(직업 선택의 자유, 거주 이전의 자유 등이 없었던 것을 생각해보자).
- 자유로부터의 도피, p.56.

개체화 과정은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반면, 자아의 성장은 수많은 개인적・사회적 이유로 방해를 받는다. 이 두 경향의 차이는 참을 수 없는 고립감과 무력감을 낳고, 이것은 나중에 ‘도피의 메커니즘’으로 논할 심리적 메커니즘으로 이어진다.
- 자유로부터의 도피, p.46.

중세 사회의 전통적 유대‘로부터’ 해방된 것은 독립이라는 새로운 느낌을 개인에게 주었지만, 그와 동시에 고독과 고립을 느끼게 했고, 회의와 불안으로 그를 가득 채웠으며, 결국 그를 새로운 복종과 강박적이고 비합리적인 행동으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 자유로부터의 도피, p.113.


중세시대에는 교회, 길드, 마을(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어서 거의 일평생 살아가는) 등 개인이 동질감을 느끼고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울타리가 있었다. 물론 이 당시의 개인이 행복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들은 권위에 복종하고 자유를 포기하는 대신, 근대인들 그리고 그 후예인 우리 현대인들이 겪는 심리적 문제인 고립과 무력감에서 조금 더 자유로울 수 있었다.


특히 중세시대에는 교회의 교리, 그리고 교리에 따른 가치관과 생활양식이 자아를 채웠기 때문에, 교회가 제시한 이정표대로만 살아가면 길을 잃을 염려가 없었다. 사실 대다수 민중들은 오히려 거주 이전의 자유조차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경직된 신분제 사회에 스트레스를 받으면 받았지(평생 돈을 모아서 영주에게 돈을 주고 자유인의 자격을 사는 농민들의 모습을 생각해보자), 고립과 무력감을 느낄 여유는 없었다. 교회가 제시한 기준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영주의 명령에 따라 하루하루 일해서 먹고살기에도 바빴다.


이에 비해 근대인의 모습은 어떠한가? 자유는 근대인에게 독립성과 합리성을 가져다주었지만, 한편으로는 개인을 고립시켰고 그로 말미암아 개인을 불안하고 무력한 존재로 만들었다. 중세를 지배했던 종교적・절대적 진리와 가치가 상실되면서 불안과 허무함이 그 자리를 메우게 된 것이다. 니체는 이를 ‘태양이 사라진 세상’으로 표현한 바 있다.


고독감과 무력감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할 때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권위에 복종하거나 이미 용인된 행동 양식에 강박적으로 동조함으로써 우리의 개체적 자아를 없애려고 노력한다.
- 자유로부터의 도피, p.144.


개인이 불안과 허무에 기인한 고립에서 벗어나려면, 자유라는 무거운 부담을 피해 다시 의존과 복종으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인간의 독자성과 개인성에 바탕을 둔 적극적인 자유를 완전히 실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근대인들은 적극적인 자유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자유로부터의 도피, 즉 (1) 권위에 복종하거나, (2) 자동인형과 같이 순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권위주의로의 도피의 대표적인 예로는 독일의 나치즘 광풍을 들 수 있는데, 이 글에서는 ‘자동인형적 순응’이라는 현상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이 현상은 지금 우리 대한민국 사회에서도 여전히 관찰되고 있기 때문이다.      



2. 자동인형적 순응


이 유별난 메커니즘은 근대 사회에서 정상인 대다수가 발견하는 해결책(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한)이다. 간단히 말하면, 개인은 자기 자신이기를 그만둔다. 그리고 문화적 유형이 그에게 제시한 성격을 그대로 수용한다. 따라서 그는 모든 타인과 똑같아지고, 타인들이 그에게 기대하는 모습과 똑같아진다. ‘나’와 외부 세계의 차이는 사라지고, 그와 더불어 외로움과 무력함을 두려워하는 의식도 사라진다. 이 메커니즘은 일부 동물에게서 볼 수 있는 보호색에 견줄 수 있다. 이런 동물들은 주위 환경과 너무 비슷해 보여서 거의 구별할 수가 없다. 자신의 개별적 자아를 포기하고 자동인형이 되는 사람은 주위에 있는 수백만 명의 다른 자동인형과 똑같기 때문에, 더 이상 고독과 불안을 느낄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가 치르는 대가는 비싸다. 그것은 자아의 상실이다.
- 자유로부터의 도피, p.194.


“문화적 유형이 그에게 제시한 성격을 그대로 수용.”, “그는 모든 타인과 똑같아지고, 타인들이 그에게 기대하는 모습과 똑같아진다.”...... 읽으면서 머리가 멍해졌다. 약 80년 전인 1941년에 발행된 책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에리히 프롬이 가진 문제의식은 8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 다른 구절들도 살펴보자.


근대인은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다는 환상 속에서 살고 있지만, 사실 그는 ‘의당’ 원할 것을 원할 뿐이다.

우리는 자기의지를 가진 개인이라는 환상 속에서 살고 있는 자동인형이 되어버렸다.

자아의 상실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깊은 회의를 낳기 때문에, 순응의 필요성을 증가시켜왔다. 만약 내가 남들이 나에게 기대한다고 생각되는 모습에 불과하다면, ‘나’는 과연 누구일까?

타인의 기대에 어긋나면 우리는 남들의 비난을 받고 더욱 고립된 위험을 무릅써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 인격의 정체성을 잃어버릴 위험까지 무릅쓰게 된다.

타인들의 기대에 순응하고 남들과 다르지 않으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이 회의는 잠잠해지고, 어느 정도의 안정성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치르는 대가는 비싸다. 자발성과 개성을 포기한 것은 삶을 방해하는 결과를 낳는다.

- 자유로부터의 도피, p.260~262.


롱패딩 광풍은 애교로 여겨질 정도로 우리 사회에서는 유행, 그리고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를 획일적인 기준이 많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파편화된 개인은 사회에서 통용되는 기준에(그것이 정말 통용되는 것인지, 통용되는 것처럼 보일 뿐인지는 알 수 없다) 자신을 맞춘다. 그러한 기준에 부합한 삶을 살게 되면 타인들로부터 인정을 받기 때문이다.      


대다수가 비슷한 것을 추구하고, 비슷한 길을 걷고자 한다. 모두가 인정하는 길이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미디어는 이러한 획일화를 심화시킨다. 이러한 ‘정답’에서 벗어나 다른 길을 걷는 사람들(소위 말하는 오리지널스)은 후에 대박을 치지 않는 이상 타인으로부터 인정을 받기 어렵다. 물론 우리는 이 ‘비슷한 것’, ‘비슷한 길’이 무엇인지 어렴풋하게나마 직감적으로 알고 있다. 성공, 부, 안정적인 직업과 같은 키워드가 바로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나도, 이 글을 보는 당신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이미 사회적 기준에 따른 인정욕구를 내면화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당신이 페라리를 소유하게 되었다고 가정하자. 페라리를 타고 무인도를 혼자서 신나게 질주하는 것과 페라리를 타고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며 강남역 부근을 돌아다니는 것. 어떤 것이 더 직관적으로 끌리는가? ‘하차감’이라는 단어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언급한 몇 가지 사례만으로도, 우리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나만의 가치를 추구하기보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인정받고 확인받을 수 있는 가치를 추구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제는, 모두가 얻으려 하고 가치를 부여하는 그 무엇은 희소한 자원인 경우가 많다는 데에 있다. 모두가 원하는 것을 소수만 얻는 잔혹한 현실. 그렇다. 바로 ‘불평등’ 문제가 떠오르게 된다. 개개인이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고, 개인의 적성과 취향에 따라 업이 분배되고, 그 업에 대한 사회적 평가의 차이가 크지 않다면 사회는 지금보다 더 행복해질 것이다. 불행하게도 현실은 이와 거리가 멀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는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만 두드러진 것이 아니며, 20세기, 아니 심지어 19세기에서도 줄기차게 지적된 것이다.



3. 욕망의 충돌

    

에리히 프롬이 말한 자동인형적 순응의 문제가 심화되면, 획일화된 가치를 추구하는 자동인형들의 ‘투쟁’으로 격화될 가능성이 있다. 이는 바로 한정된 자원을 둘러싼 무한경쟁으로서, 일찍이 헤겔이 말했던 ‘인정투쟁’의 개념과 통하는 부분이 있다. 헤겔은 사회의 출발점이, 인간들이 서로를 인격이 아닌 욕망의 대상으로 보면서 전개되는 ‘인정투쟁’에 있다고 보았다. 서로의 욕망이 충돌하여 인정을 받기 위한 싸움이 일어나면 누군가는 자기의식을 갖는 인간으로서 대우받고, 누군가는 자기의식을 인정받지 못하고 인간으로서 대우를 받지 못하게 된다. ‘인간으로서의 대우’와 같은 표현이 조금 극단적으로 느껴지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다음과 같이 이해했다(헤겔의 맥락과 다를 수 있다).     


수요나 선호도에 따라 수직화된 가치의 계층에서, 모두가 최상단의 가치를 희망함으로써 욕망이 충돌하게 되고(모두가 다른 것을 희망하면 욕망이 충돌할 일이 없다), 사람들은 투쟁을 통해 이를 쟁취함으로써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함     


욕망의 충돌. 인간이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기 때문이다. 타자는 또 나의 욕망을 욕망한다.

글의 서두에서 라캉을 인용한 이유이다.


책을 읽으면서 불연듯 떠올라 메모했다.


프랑크푸르트학파 3세대를 대표하는 학자 악셀 호네트 또한 그의 저서 <인정투쟁>을 통해 인정 욕망의 철학적・사회적 근거를 밝히려고 시도하였다. 악셀 호네트가 말하는 인정 개념 역시 헤겔의 인정 개념에서 출발한 것이다. 여기에 위르겐 하버마스 등의 개념을 활용하여 인정이라는 단어를 통속적이고 개인화된 것으로 통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현실세계의 격렬한 사회 갈등과 투쟁의 트리거가 될 수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인정과 투쟁의 관계는 인정의 유보나 불인정의 상태를 염두에 둘 때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즉 자유로운 정서적 욕구의 분출과 충족을 가로막는 신체에 대한 폭행, 법적 권리의 유보나 불인정, 사회적 연대에서의 배제는 해당 당사자에게 '무시'나 '모욕'으로 이해되며, 이는 '분노'라는 심리적 반작용을 일으키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투쟁을 추진하는 심리적 동기가 된다는 것이다.
- 악셀 호네트, <인정투쟁>, 사월의 책, p.16.

인정투쟁 개념은 인정받고자 하는 근본 기대가 훼손될 때 야기되는 도덕적 경험의 틀 속에서 사회적 저항과 봉기의 동기가 형성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 이와 같은 규범적 기대 태도가 사회적으로 깨질 때 일어나는 것은 무시당한 느낌 속에서 표현되는 도덕적 경험이다. 이런 식의 훼손감이 집단적 저항에 동기를 부여하는 토대가 될 수 있기 위해서는 이 훼손감이 바로 전체 집단에게 전형적인 것임을 증명할 수 있는 상호주관적 해석 틀 속에서 주체가 이 훼손감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 악셀 호네트, <인정투쟁>, 사월의 책, p.301.


헤겔과 에리히 프롬, 라캉, 그리고 생존 철학자인 악셀 호네트까지. 이들이 말하는 문제의식은 현재 진행형이다. 절대가치를 상실한 근대인의 허무, 나치즘의 광풍,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위기 속에서 본질적으로 비슷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80년 전에 쓰여진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지금 시점에서도 충분히 의미 있는 텍스트로 평가될 수 있는 이유이다.


에리히 프롬은 ‘자발적인 활동’이 자유라는 문제의 해답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자발적인 활동의 정의는 불분명하지만, 이를 위해 민주주의 사회가 지향해야 할 체제로 ‘계획 경제’를 이야기하고 있다(사회주의식 계획경제라기 보다는 정부의 개입이 강하게 요청되는 수정자본주의 느낌이다). 이 글에서는 에리히 프롬의 문제의식과 비슷한 문제의식을 드러낸 다른 학자들의 사상, 그리고 간략하게나마 현대 대한민국 사회의 모습까지 살펴보는 것을 목표로 하였기에 문제의 해답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생략하고자 한다.      


나 또한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자동인형에 불과했음을 깨닫는다.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966935


#서평 #에리히프롬 #자유로부터의도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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