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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수 Mar 03. 2020

현대사회의 위기 진단

박찬국 저,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에 대한 서평



최근 20세기를 주름잡은 석학들(막스 베버, 마르틴 하이데거, 에리히 프롬, 위르겐 하버마스 등등)의 책을 읽으면서,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1. 그들은 인간이 ‘신’이라는 절대가치에 억눌려 인간성을 발휘하지 못했던 중세시대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며, 상당수가 무신론자다. 

2. 종교개혁, 그리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특히 홀로코스트)에 대해, 사회학・심리학적 연구대상으로서 매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3. 그들은 ‘근대’ 혹은 ‘근대성’의 개념을 매우 중요시한다. 다만 ‘근대’에 대한 정의는 각자 다르며, 근대의 출발점으로 보는 시기도 각자 다르다. 가령 막스 베버는 ‘신은 죽었다’라는 선언이 선포된 시점을, 미셸 푸코는 1789년 프랑스 혁명(라파예트와 시에예스가 초안을 작성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 발표됨)을 근대의 출발점과 연관 짓는다. 

4. (3번과 연결해서) 근대를 마냥 옹호하거나 미화하지 않았다.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면서 생겨나는 부작용, 즉 이성의 도구화와 인간의 수단화(ex. 인간을 단순히 생산성과 노동력으로 파악하는)에 대해 경계하였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교과서에서 다루는 내용 정도만 익히고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갔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보고나면 잊혀지기 마련이었다. 20대 초반, 서울대 100대 필독서니, 대학생 필독서니 하는 목록에 석학들의 책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았지만 딱히 흥미를 가지진 않았다. 그러다가 우연한 계기로 책을 한 권 한 권 읽으면서, 왜 석학들이 위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위와 같은 관심들을 가졌는지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에 대해, 그것들의 ‘중요성’에 대해 나도 공감하기 시작했다.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이해의 지평이 조금이나마 넓어진 느낌이랄까.


물론 2020년 현재 시점에서는, 단순한 주장이나 이론보다 ‘데이터’가 세상을 이해하는 데 훨씬 중요하다(ex. 팩트풀니스나 스케일 같은 책들). 애매모호했던 것들, 그래서 추측의 영역으로 미루어졌던 것들이 방대한 데이터를 통해 사실인지 아닌지 밝혀지게 되었고, 매우 강력하고 유용한 지식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아마도 행동경제학 분야가 이러한 데이터 중심 연구방법의 가장 큰 수혜자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1749년 출판된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같은 책도 여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여기에서 그 유명한 ‘삼권분립’의 개념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삼권분립과 같은 현대 민주주의의 핵심 제도는 데이터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명확한 원인과 근거를 찾는 것도 어렵다. 1919년에 독일의 한 대학에서 이루어진 강연인 막스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정치>도 마찬가지다. 100년 전 책에서 ‘의원내각제’, ‘비례대표 선거제’ 등을 이야기한다. 정치 뉴스에서 자주 등장하는 개념과 단어들이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정치에서 벌어지는 병폐현상들, 미국과 일본에서 벌어지는 현상들 모두 이 강연에서 진단하는 문제점에서 몇 발자국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막스 베버가 100년 뒤를 내다본 점쟁이도 아닌데 말이다. 


최신 연구든, 아니면 100년 전 책이든,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는 데에 필수적인 지식을 제공하는 양서들이 있다. 특정 시대에만 반짝했다가 사라지는 지식이 아닌, 시대를 아우르는 지식, 즉 ‘시대의 교양’을 쌓아나가기 위해 씽큐베이션의 그룹원들과 함께 12주 동안 매주 책을 읽고 서평을 쓰고 있다. 매우 즐거운 여정이었는데,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오프라인 모임을 갖기 어려워진 것, 모임의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 조금 아쉽다. 



20세기의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



서론이 조금 길어졌는데, 박찬국 교수가 하이데거의 핵심 사상을 쉽게 해설한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네 가지 중 특히 4번(현대사회의 위기와 한계)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았다. 이 글에서는, 책에 등장하는 여러 내용 중에서도 특히 하이데거가 현대사회의 현실을 진단(약 50년 전 기준의 현대사회이나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한 것과 관련해서 이야기를 해볼까한다. 먼저 현대사회의 뿌리인 근대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고 넘어가자.




철학에 문외한인 사람들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그 유명한 “신은 죽었다”라는 니체의 선언. 많은 학자들은 이 선언을 근대문명에 대한 진단의 출발점이라고 평가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기독교적 절대-유일신관에 기초한 종교적 세계상이 ‘신의 사망’과 함께 와해되었다는 것이다. 이 와해과정은 천 년이 넘도록 단 하나의 절대진리를 숭상하고 살았던 서구인들에게 크나큰 정신적 공황상태를 안겨주었다. 니체의 글을 조금 더 살펴보자.


우리는 어떻게 바닷물을 다 마셔 없앨 수 있었을까? 지평선을 송두리째 지워버리도록 우리에게 지우개를 준 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우리가 이 지구를 태양으로부터 떼어버렸을 때, 우리는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이제 지구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모든 태양으로부터 멀어져가는 것인가? 우리는 지금 계속 추락하는 것 아닌가? 뒤로, 옆으로, 앞으로, 즉 모든 방향으로? 아니 도대체 아직 ‘위’나 ‘아래’가 있기나 한 것인가? 우리는 지금 무한한 무(無) 속을 방황하는 것은 아닌가? 텅 빈 공간이 우리에게 입김을 불어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더 추워지지 않았는가? 줄곧 밤이 오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또 더 많은 밤이? 
- 전성우, 막스베버 사회학, 나남, p.45(Friedrich Nietzsche, 1960, Werke in drei Bänden, hg, von Karl Schlechta, Zweiter Band, München, 127.에서 재인용).


니체의 절규가 암시하듯이, ‘의미’의 자원(‘바닷물’)을 다 마셔버렸고, 의미의 지평선을 지워버렸으며, <신>이라는 태양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킨 서구의 근대세계는 동사(凍死)의 위험, 즉 모든 가치기준의 와해와 모든 의미자원의 고갈이 만들어내는 추위에 의한 동사(凍死)의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다(전성우, 막스베버 사회학, 나남, p.45.).


베버는 근대적 상황에 대해 모든 것이 단지 존재하고 일어나기만 할 뿐, 더 이상 무언가를 의미하게 되지는 않는 세계라고 표현하였다. 인간과 세계의 존재의미를 해석하고 정당화할 수 있는 모든 초월적, 절대적 기준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지평선이 지워진 무한한 공간에 접어든 인류는 진정한 자유를 찾게 된 것일까? 이렇듯, 태양(유일신, 절대가치)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후 엄습하는 추위, 즉 무의미의 추위를 극복해나가며 ‘탈주술화’의 근대사회가 시작되었다. ‘탈주술화’에 대해서는 아래의 베버의 정의를 참고해보자.


원칙적으로 이제 더 이상 신비스러운 혹은 비밀스러운, 계산될 수 없는 힘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즉 우리가 모든 사물을 (원칙적으로는) ‘계산’을 통해 ‘지배’할 수 있다는 사실의 인식 혹은 이 사실에 대한 믿음.

- 막스 베버, ‘탈주술화’에 대한 정의


신비스럽고 비밀스러운 종교적 관념은 사라졌다. 중세라는 주술적 시대에서 깨어난 인간은 모든 사물과 현상을 계산을 통해 설명하고 지배할 수 있다고 인식함과 동시에 실제로 그렇게 믿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과 믿음의 1등 공신은 바로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었다. 


그렇다면 과학과 기술은 주술에서 해방된 우리에게 참된 진리를 선사해주었을까? 이제 잠시 숨을 고르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서 하이데거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기술적으로 조직된 인간의 전 지구적 제국주의를 통해서 인간의 주관주의는 정점에 도달한다. 이러한 정점으로부터 인간은 획일적으로 조직화된다. 이러한 획일화는 대지에 의한 완전한, 즉 기술적인 지배의 가장 확실한 수단이 된다. 주체성이라는 자유는 그에 상응하는 객체성 안에서 철저히 소진된다.
-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 p.35.


신만이 진리를 드러내고 신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서양의 중세인들이 믿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는 과학이야말로 진리를 드러내고 과학을 응용한 기술만이 인간의 삶을 안전한 토대 위에 올려놓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단적으로 말해 중세시대의 서양인들이 신에 전적으로 의존하려고 했듯이, 현대인들은 전적으로 과학과 기술에 의존하면서 이것이야말로 존재자들을 파악하고 그것들과 관계하는 유일하게 올바른 길이라고 믿는 것이지요.
-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 p.49.


하이데거는 현대의 과학과 기술이 단순히 도구적인 것이 불과하다는 견해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오히려 현대인들은 과학기술을 도구로 보는 것을 넘어 그것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으며, 과학과 기술이 이미 일종의 종교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를 묻는 것입니다.
-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 p.47.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과학과 기술은 일종의 신적인 존재가 되었고, 현대는 종교와 가장 무관한 시대인 것처럼 보이면서도 가장 종교적인 시대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과학기술이 인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현상을 가리켜 에리히 프롬은 ‘산업종교’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 p.50.


뭔가 이상하다. 베버가 ‘근대인간’의 가장 중요한 자격요건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은, 무의미의 세계를 직시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와 이 세계를 밝힐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 내겠다는 의지였다. 즉, 각자가 의미와 가치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이른바 ‘가치 다신교’의 사회). 


그런데 1920년에 사망한 베버와 달리, 2차례의 세계대전과 현대기술문명의 급격한 발전을 목도한 하이데거나 에리히 프롬 등 여러 학자들은 진정한 ‘가치 다신교’ 사회가 좌절되었음을 지적한다. 탈주술화 과정에서 든든한 우군이었던 과학과 기술이, 신생 종교와도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즉 다양한 가치가 인정받고 병존하는 세상이 오기보다는,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 따른 효용성 관점 그리고 세계화된 자본의 관점에서 가치들의 질서가 재편성되기 시작했다. 아마도 과학기술만능주의가 이 새로운 종교의 명칭이 아닐까.


나치즘의 사회심리학을 연구한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지적하듯, 자유를 얻은 인간들은 다시 자유로부터 도피하였다. 이러한 자유로부터의 도피 현상을 하이데거의 텍스트에 적용해보면, “절대가치를 상실하고 무의미의 불안을 겪던 인류가 과학기술만능주의로 도피한 것”이 현대사회의 가장 큰 문제라는 진단을 내릴 수 있다. 


이러한 과학기술만능주의로의 도피현상의 문제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신생 지배계급의 탄생을 그 중 하나로 언급하고 싶다. 김승섭 교수의 <우리 몸이 세계라면>에서도 살펴본 바 있듯이, 지식은 권력에 의해 선택되고 유포된다. 막강한 과학기술과 자본을 가진 나라가 세계를 지배하고, 막강한 과학기술을 가진 글로벌 대기업이 해당 산업계(界)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UN헌장과 세계인권선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노예처럼 살아가는 가난한 나라의 국민들이 존재한다. 과학기술의 선봉장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 국가, 연구기관, 그리고 학자들이 지식을 생산하면, 후발 주자들은 그 지식을 부지런히 학습하기 바쁘다. 지식의 획일화는 필연적으로 가치의 획일화를 야기한다.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시대, 그러나 최강대국인 미국은 과거의 로마제국을 뛰어넘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는 과학기술과 자본으로 무장한 강대국 중심의 국제질서에 예속되어 있는 자유일지도 모른다.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2556211


#서평 #씽큐베이션 #하이데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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