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국 저,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에 대한 두번째 서평
봉준호 감독은 영화 ‘기생충’의 오스카상 수상 당시, 영화계의 거장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The most personal is the most creative)라는 그의 유명한 격언을 인용하며 경의를 표하였고, 이것이 대서특필되어 인구에 회자된 바 있다.
그 내용을 보고 위대한 현대 건축가인 일본의 안도 타다오가 남긴 말이 생각났다.
“가장 지역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인 것이다.”
집단, 세계 이전에 개인과 지역이라는 소규모의 기본 단위가 존재한다. 마틴 스콜세지와 안도 타다오라는 거장들의 통찰은,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네트워킹이 가속화되고 욕망과 취향이 획일화되는 현대 사회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고 생각한다.
눈을 들어 먼 곳을 바라보고 원대한 꿈을 꾸기 이전에, 나의 발밑을 먼저 바라보자. 내가 딛고 서있는 땅, 무수히 많은 걸음 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사소한 것들.
‘궁핍한 시대의 철학자’라고 불리는 하이데거는 인간이 이 단순하고 소박한 사물들의 부름에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다면, 인간에게 찾아오는 고독감, 무력감, 허무감을 절대 극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보았다.
우리의 존재를 지탱하고 우리에게 미소 짓는 단순 소박한 사물들은 자연이라는 단어로 광범위하게 통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도시가 발전하고 인간이 쌓아올린 인공적인 건축물이 점차 자연의 영역을 침범해감에 따라, 자연은 개발과 건축을 위해 포기되고 대체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하에서는 자연적인 것, 즉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과 대비되는 인공적인 창작행위인 건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우선 건축가들이 많이 인용하는 철학자인 하이데거가 생각한 건축의 본질을 간단하게 살펴보자.
하이데거가 생각한 건축의 본질은 인간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것도 아니며, 건물을 더 미학적으로 아름답게 만들기 위한 것도 아니다. 시골의 작고 낡은 농가라 하더라도 사역으로서의 세계가 자신을 훤히 드러낼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주는 것이 건축의 본질이다.
-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 p.207.
(전략) 신전을 이루는 돌뿐 아니라 신전을 떠받치는 바위는 신전 속에 흡수되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돌과 바위로서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드러냅니다. 이러한 돌과 바위는 그것들이 신전을 떠받치는 것이 되기 전에는 우리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그저 그런 자연 산물에 지나지 않았지요. 신전은 바위 위에 서 있는 채로 대지에 의존하면서, 동시에 대지를 대지로서 환히 드러냅니다.
-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 p.220~221.
하이데거는 우리의 삶이 단순 소박한 사물들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단순 소박한 사물들을 깊이 있게 보고 경험해야하며, 이런 사물들을 완전히 떠난 인공세계 안에서는 인간의 삶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하이데거가 생각하는 건축의 본질은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단순 소박한 사물들이 자신을 환히 드러낼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주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단순 소박한 사물들이 자신을 환히 드러낼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주는 것> 이 정의를 곰곰이 생각하면서, 나는 두 명의 건축가를 떠올렸다.
먼저 첫 번째로, 20세기 최고의 거장으로 추앙받는 프랑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1887~1965년)이다.
게껍데기 모양의 지붕과 벽에 난 크고 작은 창들로 한눈에 보기에도 기이해 보이는 프랑스 롱샹성당은 르 코르뷔지에의 후기 건축물 중 하나로서 그의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
롱샹성당은 지붕과 벽 사이에 작은 공간을 두고 그 틈새를 통해 빛을 유입시킴으로써 육중한 천장이 마치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내부는 그야말로 다양한 빛의 향연이 펼쳐진다.
예배홀은 앞쪽 제대 주변으로 갈수록 폭이 넓어지는 사다리꼴이며 성당 내부에는 인공 조명이 아닌 자연 채광만 존재한다. 지붕과 벽 사이에 작은 공간을 내고 그 틈을 통해 빛이 들어와 육중한 천장이 마치 공중에 떠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했다. 남측 벽에는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창을 배치해 빛의 농담(濃淡)을 조절하고, 시간에 따라 빛의 각도가 변화해 예배 공간에 신비한 효과가 연출된다. 이런 빛을 통해 내부 공간을 성스럽고 장엄한 장소로 느끼도록 하고 있다.
르 코르뷔지에는 ‘집은 살기 위한 기계’라고 선언하는 등 철저하게 기능주의와 합리주의를 신봉해 ‘근대 건축의 아버지’라고 불렸다. 그런데 그의 후기 작품인 롱샹성당은 근대 건축 이념인 합리주의로부터 일탈하여 르 코르뷔지에의 신념의 전환점을 보여주는 작품이 되었다.
(참고 : 건축가의 성지가 된 20세기 최고 걸작 http://realty.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2/25/2017022501013.html)
르 코르뷔지에는 “나는 이 성당을 건축함에 있어 침묵의, 기도자의, 평화의 그리고 영적 기쁨의 장소를 창조해 내기를 원했다”라고 했다. 르 코르뷔지에의 이 소망은 하이데거의 사상과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인간의 삶에 필수적인 존재인 ‘빛’이 자신을 환히 드러냄으로서, 이를 통해 경이를 느끼고 존재의 성스러움을 느끼는 터전. 이것이 바로 롱샹성당이 아닐까 한다.
두 번째로는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던 현대 건축의 거장인 안도 타다오를 소개하고 싶다.
강원도 원주시에 있는 뮤지엄 산, 제주도에 있는 본태박물관, 글래스하우스와 지니어스 로사이, 서울 대학로의 재능문화센터(JCC), 강서구 마곡지구에 건립중인 LG문화센터, 경기도 여주에 있는 마임비전빌리지 등 안도 타다오의 작품은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높게 혹은 낮게 쌓아올린 벽과 벽 사이에 길다랗게 난 통로. 그 벽의 틈새로 스며들듯 들어오는 한줄기 빛과 그림자. 혹은 그 벽 전체를 따라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 아니면 건물 주위를 둘러싸고 호수처럼 잔잔하게 흐르는 물 등이 그의 작품들의 주요한 특징이며, 그의 시그니쳐 기법은 바로 노출콘크리트라는 소재를 표현하는 기법이라고 한다.
바로 위에 설명했듯이 우리나라에도 안도 타다오가 설계한 건축물이 많지만,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빛의 교회’(일본 오사카 소재)를 살펴보자.
안도 타다오는 노출콘크리트 같은 투박하고 거칠며 단순한 소재를 가지고 집을 짓지만, 그가 지은 건축물 안에 일단 들어서면 자연의 모든 요소들은 자신이 만든 건축물을 떠받쳐 주는 배경으로 변해버린다.
그가 만든 건축물 속에 들어가는 순간 자연의 빛은 그 집의 조명이 되고, 물은 그 집의 연못이 되고, 바람은 그 집의 풍경을 변화시키는 무대장치가 되고, 소리는 그 집의 음악이 된다.
(참고 : '건축 대가' 안도 타다오, 이 사람의 건축에서 엄청난 영향 받았다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535874)
롱샹성당과 마찬가지로, 빛의 교회 역시 빛이 자신을 환히 드러내고 이 성스러운 빛이 인간 스스로의 내면을 조망하도록 일깨우는 터전이라고 생각한다. 안도 타다오는 경제적 효율우선주의의 합리성 속에서 농락되고 휘둘러지는 오늘날의 건축에 대한 문제의식을 ‘빛의 교회’를 통해 나타내고자 했는데, 이러한 문제의식은 아마 르 코르뷔지에가 자신의 초기 기능주의 및 합리주의 노선을 전환하게 된 계기와도 일맥상통할 것이다(안도 타다오는 르 코르뷔지에의 모든 설계도판을 외울 정도로 그를 동경했다).
아래는 안도 타다오의 ‘빛의 교회’ 작품 발표문이다. 하이데거가 건축가로 활동했다면 이런 작품 발표문을 쓰지 않았을까 생각한다(안도 타다오처럼 노출콘크리트 기법을 애용하지는 않았을 것 같지만). 2018년에 원주에 있는 뮤지엄산을 방문하고 안도 타다오에게 푹 빠졌었고, 이후 그의 책과 그가 등장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파일까지 구매했다. 아무래도 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되면 오사카로 빛의 교회를 보러 가야겠다.
<마음이 빚은 건물>
- 안도 타다오의 ‘빛의 교회’ 작품발표 중
돌이켜보면, 오늘날의 건축은 경제적 효율우선주의의 합리성 속에서 농락되고 휘둘러지는 상태가 아닌가 싶다.
정말로 오늘날의 건축은 상품가치로밖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일까.
단순한 소비의 대상물로서 취급되며, 엄청난 양이 만들어졌다가 또 사라져 간다.
거기에는 ‘만들고’, ‘사용하는’이라는 인간의 행위는, 경시되고, 무시되고, 굴욕마저 당하며 묻혀버리는 것 같은 자괴감밖에 들지 않는다.
이 일을 처음 맡았을 때, 나는 이 일을 이런 상황에 대한 문제제기로서 생각하고 싶었다.
(중략)
지금까지 손과 다리와 같은 인간의 신체가 유일하게 건축과 접촉하는 부분에는 항상 자연재를 사용해왔다.
목재나 콘크리트와 같은 실체가 있는 것이야말로 건축을 구성하는 중요한 소재이며, 이 소재들을 신체를 통해서야만 본질적으로 건축을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개구부를 될 수 있는 한 최소화하고자 하였다.
‘빛’이란 깊은 어둠이 배경이 되었을 때, 비로소 처음으로 밝음을 얻지 않을까. 여기에서는 자연을 ‘빛’이라는 요소로 한정시키고, 극한까지 자연을 추상화한다. 건축은 그에 호응하면서 드디어 순수화되어 간다. 직선적인 ‘빛’은 바닥에 떨어져 형상을 그린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해가는 빛의 십자가 속에서 사람과 자연과의 관계는 근원적으로 인식되어져 갈 것이다.
출처 : https://protocooperation.tistory.com/307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2556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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